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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생각 사라지고, 창작 상상력 솟고, 심신 건강해져요

때는 1934년, 식민지 조선의 경성(현 서울)에 사는 소설가 지망생(이라지만 사실은 청년백수) 구보씨는 오늘도 “아무런 사무도 없이” 대문을 나선다. 스물여섯까지 아내도, 직업도 없는 아들을 걱정하는 어머니가 “어디, 가니?” 하고 묻지만 답하지 않는다. 집을 나와 광교를 거쳐 종로 네거리로, “조그만 한 개의 기쁨을 찾아” 남대문에서 광화문으로 향했다가 다시 종로 네거리로, “그 멋없이 넓고 쓸쓸한 길을 아무렇게나” 떠도는 구보씨. 박태원의 1934년작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은 근대 도시 경성을 유랑하는 외로운 산책자의 하루를 그린다.

80여 년 전의 구보씨처럼 이 봄에도 서울을 걷는 사람들이 있다. 짧게 지나가는 이 찬란한 계절이 아쉬워, 혹은 복잡한 마음을 비우기 위해, 또는 건강한 몸을 원해 길을 나선 이들이다. 목적지를 향해 전력으로 질주하는 대신 천천히, 그러나 멈추지 않고 발을 옮기는 사람들. 길 위에서 만난 그들에게 물었다. 당신은 왜 걷고 있습니까.

80개국 다닌 도보여행가 김남희씨
낯선 도시의 산책길 찾아 걸으면
일상이 여행이 되고, 여행이 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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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부암동 주택가에서 백사실 계곡으로 이어지는 숲길을 걷는 도보여행가 김남희씨. “서울이 걷기 좋은 도시인 이유는 이렇게 도심 한가운데 숲이 있다는 것”이라며 “자연이 인간에게 건네는 특별한 위안이 있는 것 같다”고 했다. [사진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일상’을 ‘여행’으로 바꾸는 마법=서른셋, 회사에 사표를 던졌다. 전세 보증금과 적금 해지한 돈을 들고 세계일주를 떠났다. 휴가로 떠난 여행과는 달리 시간이 많았다. 두 발에 의지해 걷기로 했다. 그렇게 13년, 유럽·아시아·아프리카까지 80여 개국을 걸어다녔다. 『소심하고 겁 많고 까탈스러운 여자 혼자 떠나는 걷기 여행』 『라틴 아메리카 춤추듯 걷다』 등을 쓴 ‘도보여행가’ 김남희(46)씨다.

마침 3주 전 태국에서 돌아왔다는 그에게 전화를 거니 “서울 부암동 주민센터 앞에서 만나자”고 했다. 인사를 나누기 무섭게 치킨집, 작은 카페 등이 들어선 부암동 언덕길을 오르기 시작한다. “스페인의 산티아고도, 남미의 파타고니아도 너무 좋았지만 내가 가장 사랑하는 길은 역시 서울의 이곳이에요. 집에서 입던 옷 그대로, 휴대전화를 잊은 채, 불쑥 바람이 그리울 때 나설 수 있는 길이니까요.” 서울에 머무르는 동안은 일주일에 세 번 이상, 부암동에서 북악 스카이웨이로 이어지는 골목과 숲길을 산책한다. “이어폰은 끼지 않고 주변의 풍경과 소리에 눈과 귀를 열어놓은 채 걸어요. 흘러가는 온갖 잡생각을 그대로 두고 걷다 보면 어느 순간 깨끗이 비워지는 느낌이 찾아오기도 하죠.”

그에게 걷기는 ‘접촉’이다. 무심코 스쳐 가던 것들에 시선을 주고, 인사를 건네는 일이다. 토요일 오후, 광화문에서 약속이 있다. 차를 타고 가면 금방 도착하는 걸 알지만 ‘오늘의 여행지는 광화문’이란 느낌으로 천천히 걸어보기로 한다. “새로 들어선 카페도 들여다보고, 휴대전화로 길가의 꽃 사진도 찍어보고, 그렇게 익숙한 것과 다시 만나는 거예요.” 외국의 낯선 도시에 도착하면 “먼저 그 도시의 산책길을 찾아 마치 현지인처럼 느릿느릿 걸어 보라”고 권했다. 그렇게 걷다 보면 “일상이 여행이 되고, 여행이 일상이 되는” 마법이 일어난다.
 
내가 좋아하는 산책로
♦ 서울 부암동 주민센터-산모퉁이 카페-백사실 계곡 별 장터-북악스카이웨이 : 도심 한가운데 숨은 보석 같은 길. 아기자기 예쁜 카페도 많다.
♦ 강원도 인제 아침가리계곡길 : 계곡 물소리에 발 맞춰 걷 는 드문 체험. 깊은 숲의 정취가 마음의 피로를 씻어준다.

만화가 겸 일러스트레이터 오동진씨
작품 속에서 나와 진짜 세상 만나
다른 이들 삶을 엿보는 게 즐거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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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일 오전 봄꽃이 활짝 피어 있는 서울 남산의 산책로를 걷고 있는 웹툰작가 오동진씨.


 ◆걷기, ‘내 삶’과 거리 두기=웹툰 ‘드림캐쳐’ ‘한국사람 다 됐네’를 그린 만화가이자 일러스트레이터 오동진(34)씨. 봄이면 그는 거의 매일 서너 시간씩 걷는다. 서울 남산으로, 북한산 둘레길로, 때론 도심을 가로질러 홍대까지. 7일 서울 하얏트 호텔에서 남산공원을 거쳐 국립극장으로 이어지는 길가엔 벚꽃과 개나리가 만발했다. “걷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날씨는 1년에 아주 잠깐뿐이잖아요. 누릴 수 있는 행복은 누리고 가야죠.”

서른 무렵 대전에서 서울로 올라왔다. 수년간 이어진 웹툰 연재로 몸과 마음이 지친 상태였다. 마침 자리를 잡은 곳이 남산 아래 해방촌. 일은 없고 시간은 많던 때라 ‘남산에라도 올라 볼까’ 길을 나섰다. 처음엔 겨우 서너 정거장 거리인 남산도서관까지 오르는 것도 쉽지 않았다. 숨이 턱까지 차오르고 시야가 흐려졌다. 어느 날 잠시 멈춰 주변을 둘러보니 서울의 도심 풍경이 바로 눈 아래 펼쳐져 있었다. 낯설기만 하던 이 도시가 친근하게 다가오는 순간이었다.

홀로 작업하는 만화가에게 걷기는 ‘삶의 균형을 잡아주는 추’와도 같다. 작업실에 틀어박혀 작품에 갇혀 있던 생활을 뚫고 나와 진짜 세상을 만나는 경험이다. “집을 나와서 걸어야 비로소 계절의 변화와 시간의 흐름을 느낄 수 있어요. 태블릿 모니터 위에서 돌아가는 제 삶을 한 발짝 떨어져 바라보게 되죠.” 장충동을 지나 을지로로 향하는 길. 신분증을 목에 건 회사원들이 점심을 먹으러 우르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오 작가는 “걸으며 다른 이들의 삶을 엿보는 게 즐겁다. 앞으로의 창작을 위한 자양분을 쌓는 시간이기도 하다”고 했다.

내가 좋아하는 산책로
♦서울 하얏트 호텔-남산공원-국립극장 앞길-을지로 방 산시장 : 계절의 변화를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 을지로 골목골목 숨은 맛집을 찾는 재미까지. 
♦충남 공주 제민천길 :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읍사무소, 오 래된 교회와 재래시장 등 구도심의 정겨움이 남아있는 길.

전 마라톤 대표 방선희 한체대 교수
그냥 걷기와 걷기 운동은 달라
노르딕 워킹, 자세 곧게 해줘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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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선희 교수가 6일 서울 상암 월드컵공원 하늘공원 둘레길에서 노르딕 워킹을 하고 있다.


◆걸으면 몸과 맘이 달라집니다=십수 년 앞만 보고 달렸던 그에게 걷기는 인생의 ‘쉼표’와도 같았다. 승부를 가리기 위한 달리기로 지친 몸과 마음에 자연을 벗삼은 걷기는 ‘치유’처럼 다가왔다. 마라톤 국가대표였던 방선희(44) 한국체육대학 외래교수 얘기다.

틈만 나면 차가 드문 곳 어디든 걷기 시작했다. 걷다 보니 자연스레 걷기의 운동 효과에 주목하게 됐다. “20대 후반 선수 생활을 은퇴하고 체육 이론을 공부하면서 현대인에게 신체와 정신 건강 모두를 지켜줄 운동이 필요하단 걸 깨달았어요. 두 가지를 충족시키는 최상의 운동이 바로 걷기였죠.” 하지만 “‘걷기’와 ‘걷기 운동’은 다르다”고 강조했다. 그냥 걷는 건 산책이지 운동이 많이 되는 건 아니란 의미다. 운동 효과가 좋은 걷기법을 고민하다 닿게 된 것이 ‘노르딕 워킹’이다.

6일 서울 상암동 월드컵공원 난지순환로에서 만난 그는 노르딕 워킹에 쓰이는 ‘폴(pole)’을 들고 있었다. 노르딕 워킹은 북유럽 스키 선수들이 여름에도 훈련하기 위해 개발한 운동법으로 북유럽에선 대중적인 걷기 방법이다. “허리를 곧게 펴고, 팔을 자연스럽게 흔들고, 다리는 십일자로 해야 한다는 올바른 걷기법을 모르는 사람은 드물어요. 그러나 바른 자세를 지속하기는 무척 어렵죠.” 노르딕 워킹에서는 높이가 배꼽 정도까지 오는 폴이 일종의 ‘추진체’로 작용해 허리 자세와 걸음걸이를 곧게 해 준다.

하늘공원 둘레길에서 노을공원으로 이어지는 5.8㎞ 코스를 걷는 동안 그의 곧은 자세는 흐트러짐이 없었다. “조금 힘들다고 걸음을 멈추지 마세요. 꾸준히 걷다 보면 몸과 마음에 놀라운 변화가 분명 찾아옵니다.”
 
내가 좋아하는 산책로
♦ 서울 월드컵공원 하늘공원에서 노을공원으로 이어지는 둘레길 : 꽃과 나무를 감상할 수 있는 넓은 평지. 주중엔 한적하고 초보자가 걷기에 알맞다.
♦ 경북 문경새재 산책로 : 경사도가 완만한 흙길. 문화 유적을 감상하며 걸을 수 있다.

때는 다시 1934년, 소설가 지망생 구보씨는 경성 산책을 마친 후 “내일 밤에 또 만납시다”라는 벗의 제안에 “이제 나는 생활을 가지리라”며 대답을 망설인다. 하지만 다음 날도 여느 때처럼 어머니의 한숨을 뒤로 하고 산책에 나서지 않았을까. 걷기의 매력에 중독돼 버린 이 사람들처럼 말이다.
 
“걸으면 생각 떠올라” 철학자 니체·루소도 걷기 매니어

“겨우 몇 줄만 빼놓고 전부가 다 길을 걷는 도중에 생각났으며, 여섯 권의 공책에 연필로 휘갈겨 썼다네.” 독일 철학자이자 시인 프리드리히 니체(1844~1900)는 못 말리는 ‘걷기 매니어’였다. 1879년 9월 지인에게 쓴 편지에서 니체는 『방랑자와 그의 그림자』라는 책을 쓰는 동안 어떤 날은 하루 여덟 시간까지 걷고 또 걸었다고 했다. 그에게 산책은 몸의 움직임에 자극을 받아 지성이 깨어나는 순간이었다.

프랑스 철학자 장 자크 루소(1712~78)도 “뭘 좀 써보려고 의자에 앉아도 도대체 생각이 떠오르지 않을 때” 길을 나섰다. 논문 ‘인간 불평등 기원론’을 쓸 땐 매일 아침 파리 생제르맹이나 볼로뉴 숲을 걸으며, “인간의 본성과 이를 왜곡시킨 시간과 사물의 변화”를 생각했다. 동네 사람들에게 ‘걸어 다니는 시계’ 역할을 했던 규칙적인 산책자 이마누엘 칸트(1724~1804)에게 걷기는 건강 유지를 위한 습관이었다. 몸이 약했던 칸트는 산책 도중 땀이 흐르는 게 느껴지면 바로 걸음을 멈추고 그늘에서 쉬었다고 전해진다.

19세기 ‘천재시인’ 아르튀르 랭보(1854~ 91)는 ‘도피의 열정’에 휩싸여 유럽 전역을 걸어 다녔다. “난 그저 걸어 다니는 사람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야”라며 자신의 정체성을 걷는 데서 찾았다.

※프레데리크 그로, 『걷기, 두 발로 사유하는 철학』(책세상) 참고.

글=이영희·임선영 기자 misquick@joongang.co.kr
사진=권혁재 사진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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