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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호의 사람 풍경] ‘3유 3무’의 삶…“너도나도 해외박사, 그게 싫어 외국 한번도 안 가

5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혈기왕성한 청년이 빗자루를 들었다. 오래된 전적(典籍)에 쌓인 먼지를 쓱쓱 털어냈다. 어지러이 널린 책은 좀 먹은 게 많았고 책장 곳곳에는 쥐들이 새끼를 쳤다. 청소를 마친 저녁 무렵, 마스크를 벗고 코를 풀면 새까만 먼지 뭉치가 나왔다. 그래도 힘든 줄 몰랐다. 한국 문화의 고갱이와 함께한다는 즐거움이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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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송미술관 입구의 백진달래가 꽃망울을 터뜨렸다. 최완수 실장이 40여 년 전 경기도 안산에 있는 조선 전기 문신 강희안 고택에서 얻어온 귀한 꽃이다. 최씨는 “손바닥만했던 게 이렇게 자랐다. 흙과 물에 민감해 무심한 듯 세심하게 살폈다. 자식도 그렇게 키워야 한다”고 했다. [사진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서울 성북동 간송미술관 최완수(74) 한국민족미술연구소장의 얘기다. 1966년 4월 6일, 그는 식민사관 극복이라는 웅대한 꿈을 안고 간송미술관에 들어왔다. 50년이 흐른 지금 미술사학계의 큰 어른으로 우뚝 섰다. 일제강점기 우리 문화재 지킴이였던 간송(澗松) 전형필(1906~62) 선생의 뜻을 잇고 있다. 그를 만난 지난 4일, 미술관 입구에 무인석(武人石) 두 개가 눈을 부릅뜨고 있다.
 
미술관 수문장, 선생님을 닮았네요.
“제가 여기 오기 전부터 있었어요. 조선시대 무인석은 주로 공신들 무덤에 놓였지요. 문인석보다 단조롭지 않아 더 예쁘죠.”
항상 고운 한복 차림입니다.
“2003년 돌아가신 어머니께서 제가 평생 입을 옷을 지어놓으셨어요. 철 따라 바꿔 입을 정도죠. 세탁소만 왔다 갔다 하면 돼요. 하지만 마음에 많이 걸립니다. 마음 놓고 불효했으니까요.”
대장경을 맘껏 보려고 간송에 오셨죠.
“신수대장경(일본에서 편찬한 대장경) 새것 100권이 있었어요. 불경 공부 없이 한국미술을 연구할 수 있나요. 국립중앙박물관에 1년가량 있다가 왔습니다. 이제 대장경은 너덜너덜해졌고요.”
간송과 함께한 지 반세기입니다.
“이제야 뭘 모르는지 알게 됐어요. 젊어선 패기와 만용, 사명감으로 불탔습니다. 한국사 정체성(停滯性)을 주장하는 식민사관에 앞뒤 안 가리고 달려들었죠.”
‘모르는 걸 안다’, 소크라테스 말이죠.
“그간 해온 일을 마무리 지을 때입니다. 그런데 너무 많네요. 일모도원(日暮途遠), 해는 저물고 길은 멀다는 말이죠. 공자도, 석가도 여든 살 넘게 살지 못했어요.”
어떤 마무리를 말하는 겁니까.
“스물넷 젊어서 목표한 걸 어느 정도 시늉은 낸 것 같아요. 겸재(謙齋) 정선(1676~1759) 연구는 대강 끝낸 것 같고, 이제 추사(秋史) 김정희(1786~1856) 글씨를 정리해야죠. 그게 가장 시급합니다.”
 
| 미술사학계 ‘진경시대’ 개념 정립
“조선의 고유색 겸재에 와서 드러나
석물 얼굴도 서울 사람으로 바뀌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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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년 간송미술관에 들어왔을 때의 최완수씨. 고서 먼지를 털어내고 있다. 책 정리에만 4년을 보냈다.

최 소장은 한국 미술사학계에 ‘진경(眞景)시대’ 개념을 정립했다. 단순한 학술용어가 아니다. 우리 문화에 대한 주체적 자각이다. 중국 사상, 중국 그림을 넘어선 조선 사상, 조선 그림의 발흥이다. 그 한복판에 겸재가 있고 추사가 뒤를 이었다. 대체로 숙종 대부터 정조 대까지를 아우른다. 송강(松江) 정철(1536~1593)의 한글 가사문학, 서포(西浦) 김만중(1637~1692)의 한글 소설, 석봉(石峯) 한호(1543~1605)의 서체를 거쳐 겸재의 진경산수화에서 꽃을 피웠다. 밑바탕에는 중국의 주자성리학을 새롭게 해석한 율곡(栗谷) 이이(1536~1584)의 조선성리학이 깔려 있다. 조선 문화의 절정기로 불린다.

| 식민사학 극복 위해 미술사 연구
“전국의 조선 왕릉 실측조사 마쳐
언제까지 미국 흉내 내며 살 건가”

 
‘겸재는 나의 운명’이라고 했습니다.
“71년 간송미술관 첫 전시가 겸재였습니다. 조선의 고유색이 겸재에 와서 드러나기 시작했죠. 그전에는 소를 그려도 중국의 물소를 그리고 사람에도 중국 옷을 입혔어요. 요즘 우리가 미국 흉내 내고 사는 것과 비슷합니다. 조상들 보기가 부끄럽죠.”
추사의 무엇을 정리하는 건가요.
“편년(編年)이죠. 대표작 연도를 확정하고 해설을 붙이는 겁니다. 그래야 맥(脈)이 서죠. 제 전공이 불상입니다. 인도부터 석굴암까지는 책으로 냈는데, 이후 작품도 매조지 해야죠. 조선왕릉 석물도 정리해야 하는데, 시간이 될 수 있을지…. 일모도원입니다.”
조선왕릉은 또 뭐죠.
“가장 큰 숙제입니다. 76년부터 제자들과 전국 왕릉을 돌며 실측조사를 마쳤어요. 자꾸 욕심이 생겨 아직 보고서를 내지 못했어요. 실록·문집 속 관련 기록도 다 뒤졌습니다. 식민사관 탈피의 결정적 증거를 제시할 겁니다. 제가 못하면 제자들이 끝내겠죠.”
 갈수록 어려운 느낌입니다.
“왕릉 석물에도 크고 작은 변화가 있습니다. 시대별 양상을 살피면 조선 문화의 자주성을 찾을 수 있어요. 진경시대에 오면 석물 얼굴이 서울 사람으로 바뀝니다. 동물 모양도 우리 것으로 달라지고요. 얼마나 놀랍습니까. 절로 환희심(歡喜心)이 입니다. 미술사 연구는 이렇게 눈으로 보여주는 겁니다.”
학자들의 공감을 얻을 수 있을까요.
“진경시대를 처음 꺼낼 때도 시큰둥했죠. 조선 전기나 후기나 그림은 다 똑같지 않나, 그런 생각이 대세였어요. 하지만 요즘은 진경산수에 대한 시비가 거의 없잖아요. 우리 문화를 어떻게 키워가야 하는지, 그 답은 다 역사 속에 있습니다."

| 경전을 날줄로, 역사를 씨줄로 삼아
“이성보다 공부가 좋아 혼자 살아
평생 입을 한복 지어준 어머니께 불효”


최 소장은 ‘3유(有) 3무(無)’의 시간을 보냈다. ‘세 가지 있는 것’은 한복·차(茶)·술이요, ‘세 가지 없는 것’은 처자·휴대전화·해외여행이다. 매일 밤 9시 취침 새벽 3시 기상, 자기관리에 철저하다. ‘최완수 학파’로 불리는 내제자 50여 명을 도제식으로 키워왔다. 미술관에서 함께 밥을 해먹고 빨래도 하며 학문공동체를 일궜다. 해마다 화제가 되는 간송미술관 전시는 그런 땀과 피의 일부일 뿐이다. 오는 20일부터 서울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에서 ‘간송문화전 6부:풍속인물화전- 일상, 꿈, 그리고 풍류’가 열린다.
 
늘 공부와 풍류를 같게 보셨는데요.
“산다는 게 다 공부입니다. 책상머리 독서가 다는 아니죠. 술을 마시더라도 늘 공부 얘기를 하잖아요. 서로 읽은 책 얘기하고, 가슴속 진실한 생각을 나누고….”
연구실 ‘경경위사(經經緯史)’가 눈에 띕니다.
“제 좌우명이죠. 통도사 극락암 경봉(1892~1982) 스님께서 써주신 겁니다. 원래는 추사의 글이죠. 경전을 날줄로, 역사를 씨줄로 삼는다는 뜻입니다. 경전은 사람답게 사는 법을, 역사는 사람이 살아온 행적을 보여줘요. 인문학의 방향을 말해줍니다. 둘을 병행해야 해요. 간송 선생님도 이 넉 자를 집에 걸어 놓았다고 해요. 6·25 때 부산에 피란 가면서도 품에 안고 있었고….”
공부를 그만두고 싶은 때는 없었나요.
“그런 생각을 할 틈이 없었죠. 살림이 가난한지라 신문·잡지에 부지런히 글을 써야 했습니다. 매해 봄·가을에 전시도 기획해야 했고요. 자다가 벌떡 일어난 게 한두 번이 아니죠. 혼자 살았기에 가능했던 것 같습니다.”
이성이 그리운 순간도 있었을 테죠.
“간절하게 그리웠다면 누군가를 만났겠죠. 하지만 저는 공부가 가장 좋았습니다. 비승비속(非僧非俗), 꼭 머리를 깎아야 중이 되는 건 아니죠. 그렇게 지내왔어요.”
학자라며 외국도 둘러봐야 합니다.
“박사를 딴다며 너도나도 해외로 가는 게 미웠습니다. 안 가도 충분히 할 수 있다, 그런 걸 보여주려 했어요. 꼭 찍어 먹어야 장맛을 압니까. 큰 줄거리는 멀리서 더 잘 보입니다. 앞으로도 외국행 비행기는 타지 않을 겁니다. 갑자기 맘을 바꾸면 죽는다고 하잖아요.”
선생님은 어떤 부처를 닮았을까요.
“시골버스를 타보세요. 거기서 만난 최고 미남과 그 동네 사찰 부처님 얼굴이 비슷합니다. 제 고향이 태안반도(충남 예산)잖아요. 서산 마애불처럼 보이지 않나요.”(웃음)
총선이 코앞입니다. 한마디 하신다면.
“정치인이고, 기업인이고 이 시대 리더들은 기득권이죠. 그 기득권을 지키려면 무엇보다 베풀어야 합니다. 베풀면 오래가고 베풀지 않으면 망합니다. 경주 최부잣집 가훈을 떠올려 보세요. ‘재산은 만 석 이상 가지지 말라’고 당부했습니다.”
 
학문 외길 채찍질한  세 스승…서예가 김창현, 김상기 교수, 최순우 전 중앙박물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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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기(左), 최순우(右)

세상의 인연은 벼락처럼 온다. 한 사람의 나침반을 돌려놓는다. 최완수 소장도 삶에서 세 번의 벼락을 맞았다. 그의 학문 외길을 채찍질한 세 명의 스승이다. ‘용장 밑에 약졸 없다’고 했다. 그가 지난 반세기 제자들과 동고동락해온 것도 어쩌면 스승이 남긴 커다란 유산 덕분이다.

최 소장의 첫 스승은 경복고 1학년 첫 한문(고문) 시간에 만난 서예가 백아(白牙) 김창현(1922~91) 선생이다. 첫눈에 서로를 알아본 그들은 평생 사제관계를 유지했다. “왕실 외손 출신이셨죠. 추사와 비슷합니다. 한학뿐 아니라 왕실 문화에 정통하셨어요. 보학(譜學)에도 밝으셨고요. 음식·의복 등 제게 생소했던 서울 상류층 문화를 알게 됐습니다. 우리 역사에 대한 긍정적 시각도 익혔고요. 선생님이 돌아가셨을 때 비문을 제가 지어 올렸습니다.”

두 번째 스승도 운명처럼 다가왔다. 서울대 사학과 한문원전 첫 강독 때였다. 동빈(東濱) 김상기(1901~77) 교수가 “누구 읽어볼 사람 없나”라고 물었다. 한문에 약한 학생들이 입을 다물고 있을 때 “제가 해보겠습니다”고 손을 든 사람이 바로 최 소장이었다. “역사를 보는 눈과 사료를 다루는 법을 배웠습니다. 제가 간송미술관에 와서 책을 정리할 때도 늘 도와주셨죠. 선생님 회갑 때 덕산온천에 모시고 함께 지냈던 게 어제 같습니다.”

마지막 스승은 혜곡(兮谷) 최순우(1916~84) 전 국립중앙박물관장이다.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로 유명하다. 경주 불상 발굴현장에 있었던 최씨를 간송미술관에 처음 소개한 주인공이다. “인재 욕심이 강하셨어요. 그러니 경주까지 직접 찾아오셨겠죠. 우리 미술품을 보는 감식안을 길러주셨습니다."

글=박정호 문화전문기자·논설위원 jhlogos@joongang.co.kr
사진=권혁재 사진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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