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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럿 되고 싶다는 8세 난민 모타 “비행기 몰고 아빠 찾으러 갈 거예요"

정원엽의 요르단 르포
시리아 난민 캠프를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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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에서 둘째로 큰 요르단 자타리 난민 캠프. 2011년 만들어진 이 캠프에는 10만 명 이상의 시리아 난민이 살고 있다. [자타리=정원엽 기자]


피난길에 아빠와 생이별한 가족
15세 둘째 아들이 생계 책임져
7명이 난로 하나로 겨울 버텨
생계유지 힘들고 교육소외 심각

로마시대 유적지로 ‘아시아의 폼페이’로 불리는 요르단 북부 제라시는 시리아 난민들이 정착하는 주요 거점 중 하나다. 시리아 내전 발발 5주년인 지난달 15일 제라시의 한 시리아 난민 가정을 찾았다.

대낮인데도 집은 냉기가 돌았다. 시리아 난민 크루드 모하드(42·여)는 텅 빈 방으로 기자를 안내했다. 벽에 붙여 깔아 놓은 쿠션 외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그는 아껴 뒀던 난로를 꺼내 불을 붙이고는 시리아 다라를 떠날 때 이야기부터 꺼냈다. 5년 전 시리아에서 크루드 가족은 단란한 삶을 살았다. 남편 파이(49)는 전기 기술자였고 아이들은 열심히 공부했다. 하지만 2011년 3월 15일 시리아 내전이 터졌다. 그들이 살고 있던 다라의 집도 여러 차례 공습을 받았다. 지하실로 수십 번씩 피신하며 고향에서 1년간 버텼지만 결국 아이들 걱정에 시리아를 떠났다. 피난 길에 헤어진 남편은 생사 확인조차 되지 않고 있다.

“2012년 2월 살림살이를 하나도 못 챙기고 요르단 국경을 넘었어요. 국경 인근 자타리 난민 캠프로 갔지만 난민들이 계속 밀려와 주변 도시로 이사했죠. 집값이 싼 곳을 찾아 다섯 번 이사 끝에 제라시에 살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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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르단 제라시에 살고 있는 시리아 난민 크루드 모하드(오른쪽) 가족. 왼쪽부터 사안(9), 아크만(12), 모타(8). 맏아들 무함마드(23)와 둘째 아들 칼데(15)는 일하러 나가 참석하지 못했다. [제라시=정원엽 기자]


큰아들 무함마드(23)는 4년 전만 해도 전도 유망한 대학생이었다. 수의학을 공부하던 무함마드는 바샤르 알아사드 정권의 독재 반대 시위에 참여했다가 경찰에 붙잡혔다. 시민을 향한 정부군의 발포가 이어지고 생화학무기 사용설이 돌던 때였다. 다치지 않았다는 소식에 안도했지만 경찰 조사 후 돌아온 큰아들은 예전의 그가 아니었다.

“경찰에서 고문을 당했고 힘들게 풀려나서 돌아오는 길에 갑작스러운 교통사고를 당했어요. 병원비가 없어서 1년 반 동안 침상에만 누워 있었어요.” 크루드는 큰아들의 사고를 힘겹게 설명했다. 무함마드가 회복된 뒤 크루드 가족은 요르단으로 향했다. 무함마드는 시리아 여성과 결혼했지만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몸이 편치 않아 레스토랑에서 청소를 하며 생활비를 벌고 있다.

크루드의 둘째 아들 칼데(15)도 어려운 삶을 이어가고 있다. 11살 때 요르단에 온 칼데는 요르단 학교를 다니기 위해 1년간 대기명단에 이름을 올리고 기다려야 했다. 크루드는 “성적도 우수했고 상도 많이 받았다. 정말 똑똑한 아이다”고 말했다.

하지만 칼데는 지난달 학교를 그만둬야 했다. 형이 몸이 아파 정기적으로 수입을 확보할 수 없었고, 어머니도 신장이 나빠지며 일을 그만둬야 했기 때문이다. 칼데가 7명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게 됐다.

칼데는 길거리에서 커피와 껌, 군것질거리를 팔고 있다. 오전 7시부터 오후 5시까지 일하고 받는 돈은 8000~1만원이다. 한 달이면 24만원 정도 번다. 한 달 생활비가 집세 등을 포함해 80만원가량 든다. 부족한 돈은 구호기구의 지원과 칼데의 형 무함마드와 형수가 벌어오는 돈으로 충당한다.

냉기를 느낀 크루드가 난로 옆으로 오며 “작은 가스 난로가 참 고맙다”고 말했다. 난로는 국제 구호기구 월드비전의 웜플러스(Warm+) 사업에서 지원받은 것이었다. 한 달에 네 번 6만4000원씩 난방비를 지원하고 아동용 재킷·양말 등을 지원하는 사업이다. 깨진 창문 사이로 들어오는 바람과 돌로 된 바닥의 한기를 느껴 보니 난로의 불씨가 얼마나 소중한지 절감했다.

“요르단으로 온 후 3년간 한겨울에도 난방을 해 본 적이 없어요. 난로 덕분에 가족들이 모여서 겨울을 따뜻하게 날 수 있었어요. 저녁이면 난로 주변에서 아이들의 이야기도 들을 수 있고요.”

난로는 단순한 방한용품이 아니라 가족을 묶어 주는 일종의 구심점 역할을 하고 있었다. 학교를 다니는 셋째 아들 아크만(12)과 막내 아들 모타(8)의 이야기는 아픈 어머니와 하루 종일 커피를 팔고 돌아온 큰형의 피로를 풀어 주고 있다. 월드비전은 지난해 12월부터 6개월간 웜플러스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어머니 품에 안긴 모타는 “전쟁이 끝나고 어른이 되면 뭐가 되고 싶으냐”는 물음에 “비행기 조종사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 “멋진 꿈이네”라고 칭찬했더니 모타는 “비행기를 몰고 아빠를 데리러 갈 거예요”라고 말했다.

인터뷰에 응한 시리아 난민 캠프의 가족들은 5년 전만 해도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있었다. 하지만 내전은 가족을 헤어지게 하고, 남편을 불구로 만들었으며, 아이들의 꿈을 앗아갔다. 시리아 내전으로 25만 명이 사망했고 1100만 명이 집을 잃었다. 시리아 전체 인구(2300만 명)의 절반가량이다. 이 중 460만 명은 크루드 가족처럼 고향을 떠나 다른 나라로 흘러 들어갔다. 요르단에만 63만 명(공식통계)의 시리아 난민이 거주한다. 820만 명의 아이들이 내전의 영향을 받고 있으며 200만 명은 교육에서 소외된 ‘잃어버린 세대’가 되었다. 지난해 터키 해안에서 익사한 세 살 아기 아일란 쿠르디도 시리아 난민이었다.

시리아 난민 이야기는 중앙일보 홈페이지(www.joongang.co.kr)에 ‘시리아 난민 캠프를 가다’는 제목으로 4회 연재된다. 후원 월드비전 02-2078-7000(www.worldvision.or.kr)

자타리=정원엽 기자 wannab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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