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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를 바탕으로 대한민국을 바꿔 나가고 싶다”

일러스트 박용석 parkys@joongang.co.kr



권영진(54) 대구시장과 인터뷰를 하기까지 두 번이나 일정을 바꿔야 했다. 매일 자정 너머까지 이어지는 살인적인 스케줄에다 수시로 끼어드는 급한 일정이 더해졌기 때문이다. 대구에서 하기로 한 인터뷰는 몇 바퀴를 돌다 결국 서울 일정 속의 빈틈을 찾아 겨우 성사됐다. 권 시장의 요즘 몸무게는 76㎏. 키(168㎝)에 비하면 많이 나가는 편이다. 지난해 8월 주말 조기축구를 하다 발을 삔 이후 올 1월까지 운동을 못한 데다 매일 저녁 2~3개의 약속을 소화했다. 권 시장은 원래 스포츠광이다. “스포츠는 내 삶의 에너지”라고 말할 정도다. 다친 발이 회복된 한 달 반 전 운동을 다시 시작했다. 매일 새벽 5시30분에 기상해 관저 주변 헬스장에서 한 시간 반 러닝머신과 스트레칭으로 땀을 흘린다. 주말엔 이웃들과 축구ㆍ테니스 등을 다시 시작했다. 그래서인지 하루 5시간만 자고 쉴 틈 없이 일정을 소화한다는 권 시장의 낯빛은 윤기가 돌았다.



특별기획ㅣ지방도시 경쟁력 ④ 물·의료·에너지 도시 꿈꾸는 대구시장

 



대구의 1인당 소득(GRDP)은 전국 14개 광역 시·도 중 꼴찌다. 그것도 1990년대 초반 이후 20년 넘게 깨지지 않고 있다. 박정희·전두환·노태우·박근혜, 이렇게 대통령을 네 명이나 배출한 도시와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성적표다. 3개월 뒤면 취임 만 2년을 맞는 권영진 대구시장의 목표는 이 해묵은 기록을 깨는 것이다. 물과 의료·에너지 산업을 핵심 미래 먹거리로 삼고 추진 중인 ‘대구 미래비전 2030’은 이런 오명을 벗기 위한 미래전략이다. 권 시장은 지난달 22~26일 4박5일 일정으로 중국 내륙도시 충칭(重慶)과 우한(武漢) 등지를 다녀왔다. 의료관광을 포함한 대구 홍보를 위한 비즈니스 출장이었다. 지난달 29일 서울 일정 중 짬을 낸 권 시장을 중앙일보 사옥에서 인터뷰했다.



-대구시 의료관광 홍보를 베이징이나 상하이가 아닌 내륙도시에서 한 것은 뜻밖이다. “중국은 이제 경제개발의 핵심 축이 기존 해안 도시에서 중서부 내륙 개척시대로 들어섰다. 지난해 중국 전체의 경기침체에도 불구하고 충칭의 경제성장률은 11%를 넘었다. 하지만 우리나라 기업인 대부분은 여전히 중국 해안도시 진출에만 열을 올리고 있다. 이번 중국 출장의 성과가 적지 않았다. 충칭과 우한에서 대구로 향후 3개월간 주 3회 전세기를 띄우는 등 연말까지 관광객 3만 명을 보내기로 했다. 앞으로 생겨날 시너지가 상당할 것이다.”



충칭은 중국 4대 직할시 중 하나로, 서부지역에서는 유일하다. 인구 2900만 명. 면적 8만2400㎢로, 남한(9만9720㎢) 면적에 버금간다. 도시 하나가 국가 규모인 셈이다. 후베이성의 성도인 우한도 만만찮다. 인구 1000만 명에 면적(8494㎢)은 서울(605㎢)의 14배에 달한다. 특히 우한은 전체 면적의 4분의 1이 호수와 강으로 이뤄진 물의 도시다. 물 산업의 중국 진출을 추진 중인 대구시로서는 전략지역 중 하나다. 대구시는 지난해 12월 이미 하수 슬러지 처리 전문기업 엔바이오컨스와 함께 중국의 환경수도로 떠오르고 있는 장쑤(江蘇)성 이싱(宜興)에 진출해 한·중 합작기업을 만들었다.



-시장에 당선된 지 만 2년이 돼 간다. 그동안 대구를 원하는 대로 많이 바꿨나. “변화의 희망을 봤다. 과거 대구시민들은 정치·경제 중심도시의 시민으로 자부심이 가득했지만, 지난 20여 년간은 자존심에 상처를 많이 입었다. 역사 속 대구와 현실의 대구 사이에 괴리가 크다. 좌절감을 느끼는 사람도 적지 않다. ‘대구는 안 된다. 떠나고 싶다…’ 이런 식이다. 이제 변화가 시작되고 있다. 시민들 머릿속에 ‘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시민 속에서 같이 호흡하면서 변화와 창조의 희망을 심어 주는 게 중요하다.”



수치상으로 대구의 현실이 심각한 것은 사실이다. 지난해 말 기준 대구시의 인구는 249만 명으로, 250만 명 선이 무너졌다. 2003년 253만 명을 정점으로 계속 하락하는 추세다. 감소의 양보다 질이 더 나쁘다. 순유출 인구 중 20~34세 청년층이 64%를 차지한다. 미래를 책임질 청년이 떠나는 도시라는 얘기다. 이유는 명쾌하다. 마땅한 일자리가 없기 때문이다. 대구의 GRDP에서 제조업이 차지하는 비중이 90년에는 37.4%였지만 2013년에는 22.9%로 14.5%포인트 줄어들었다. 같은 기간 전국 평균이 4.2%포인트 늘어난 점과 대비된다.



-어떻게 20여 년간 전국 꼴찌를 벗어나지 못했나. “8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대구 경제는 괜찮았다. 섬유산업과 기계부품ㆍ소재산업이 튼튼했다. 생산과 소비·문화 수준이 다 높았다. 그런데 우리나라가 산업사회에서 지식산업사회로 옮겨 오는 과정에서 대구가 새로운 변화를 이끌어 내는 데 실패했다. 250만 시민에 비해 생산기반이 취약하다. 93년 이후 국가위천공단 도입 실패, 삼성상용차 파산 등이 이어졌다. 기존 공단은 해가 갈수록 노후화했다. 기업구조 면에서도 대기업 하나 없이 중소·중견기업만 있어 제대로 된 일자리가 부족했다. PK(부산ㆍ경남)가 정권을 잡으면서 말만 “우리가 남이가~ ”라고 해놓고, 실제로는 제대로 해준 게 없었다. 그게 결국 표로 나타났다.”



권 시장은 대구 경제 20년 불황의 시작을 PK 정권으로 불린 김영삼 정부 출범으로 봤다. PK세력이 집권한 후 TK를 홀대했다는 얘기다. 실제로 95년 4월 15대 총선에서 대구 13개 선거구 가운데 자민련 후보가 8곳, 무소속 후보가 3곳에서 당선됐다. 반면 여당인 신한국당 후보는 2곳에서 승리하는 데 그쳤다.



-하지만 김대중 정부 때부터 ‘밀라노 프로젝트’로 7000억원에 가까운 돈이 투자되지 않았나. “방향이 잘못됐다. 섬유산업이 IT(정보기술)·BT(생명공학)·NT(나노공학)와 연결됐으면 새로운 신성장동력이 됐을 것이다. 그때 첨단 섬유 개발과 고급 브랜드화 작업을 해야 했지만 실제론 기존 염직과 제직산업 중심으로 투자가 이뤄졌다. 대구의 섬유체질을 바꾸는 데 실패한 것이다. 제대로 된 브랜드 하나 못 만들고 염직ㆍ제직 중심으로만 애를 쓰다 국제 경쟁력을 잃어 대구 경제의 침체가 계속될 수밖에 없었다. 그때 정말 대구를 살리려는 의지를 가지고 밀라노 프로젝트를 했는지 의문이다. 물론 대구 내부적으로도 혁신이 없었다. 정치적 수사(修辭) 속에 7000억원이란 돈이 오랫동안 섬유산업을 하시던 분들 속으로 녹아 없어졌다.”



밀라노 프로젝트는 김대중 정부 2년차인 99년 시작돼 2008년까지 총 6800억원이 투자된 국책사업이었다. 국회 국정감사에서는 “대표적 예산낭비 사업”이라고 지적했고, 감사원에서는 “돈만 쓰고 실효성이 없는 실패한 프로젝트”라고 냉혹한 평가를 내렸다.



-대구 미래비전 2030의 핵심을 물과 의료·에너지로 꼽았다. 이유가 뭔가. “대구가 섬유 중심의 전통산업을 가지고는 미래를 열어 가기가 어렵다. 대부분의 지방 도시들이 그때 그때 숙제를 풀기 위해 허겁지겁 따라 하기에 바쁘다. 밀라노 프로젝트의 실패도 그런 것이었다. 나는 ‘2030년쯤에는 대구를 어떤 도시로 만들어야 할까. 시민과 함께 미래비전을 만들고 시가 이를 선도해 나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지금 산업을 버리고 가자는 얘기가 아니다. 기존 산업은 체질 개선을 하는 동시에 미래형 친환경 첨단산업 도시로 가자는 거다. 예를 들어 기존 자동차 부품 산업도 내연기관에 머물지 말고 전기차와 같은 미래형 자동차로 빨리 바꿔 나가야 한다. 물·의료·에너지 산업은 대구의 축적된 역량을 바탕으로 선택한 전략이다. 제조업만으로는 일자리를 만드는 데 한계가 있다. 의료관광 산업 육성은 그런 차원에서 서비스 산업을 키우자는 전략이다.”



-아무리 좋은 전략도 정책의 지속성이 없으면 안 된다. 시장이 바뀌면 2030 비전을 현실화할 수 있겠나. “국회의원으로 돌아갈 생각은 없다. 나는 아직 젊다. 4년 임기만 보고 대구비전을 그리지는 않는다. 시장을 두 번 할지, 세 번 할지는 대구시민이 결정해줄 문제다. 하지만 의원직을 버리고 대구시장에 나섰을 때는 뜻한 바가 있어서다. 국회의원보다 훨씬 더 소중한 게 대구시장의 일이다. 300명 중 한 명인 국회의원직엔 한계가 있다. 대구를 바탕으로 대한민국을 바꿔 나가고 싶다. 대구의 꿈은 대구시장의 꿈과 함께 클 것이다. 꿈이 없는 시장은 대구를 바꿔 나갈 수 없다.”



권 시장은 대학생(고려대 영문과) 시절 사회주의 혁명으로 세상을 바꿔 놓겠다고 생각한 소위 386 운동권이었다. 학부 시절 지하 이념서클 활동을 하면서 민중민주(PD) 계열 학생운동을 했다. 대학원(정치학)에 간 것도 대학 4학년 2학기 어느 날 나타난 상부 점조직의 지시에 의한 것이었다. 대학원에 가서 학생운동을 주도하라는 명령이었다고 한다. 그렇게 대학원에서 처음으로 총학생회를 조직하고 학생회장이 됐다. 하지만 회의가 밀려왔다. 당시 운동권의 독선적이고, 권위적인 행태를 수긍할 수 없었다. 때마침 89년 그가 이상향으로 생각했던 소련과 동구권 공산주의가 몰락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사회주의자에서 자유민주주의자로 돌아섰다. 대학원 석사 시절 학위논문 ‘한국전쟁 당시 북한의 남한 점령지역 정책에 관한 연구’는 그의 고민을 마무리 짓는 작업이었다. 통일부가 소장한 6·25 당시 북한 노획문서를 뒤지고 해방과 전쟁 기간 중 좌익활동을 했던 사람들을 무수히 만나면서 6·25는 해방전쟁이 아니라 북한 정권의 남한 점령 정책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몸으로 확인했다고 한다. 그는 인터뷰 중 만난 한 전향한 사회주의 원로가 “이념으로 세상을 보지 마라. 그 시절 좌익으로 몰린 사람의 90%는 삶을 위해 이념을 선택한 것”이라고 한 말을 듣고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그는 “그때 사회주의가 아닌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가 인류가 가지고 있는 보편적 인간관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다”고 회상했다. 권 시장은 2000년 정치에 입문, 18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최준호 기자 joonh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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