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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층연구] 북한·중국의 기묘한 애증사

1956년 김일성 정권 당시 ‘종파사건’으로 중국과 긴장관계 시작… 정상외교로 양국관계 유지해왔지만 베이징 발 대북 영향력의 실효성은 미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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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은 오랫동안 한반도의 안정을 자국의 핵심이익으로 내세워왔다. 때문에 북한이 핵실험으로 국제사회에 도발을 일으켜도 중국은 사실상 무덤덤한 반응이다. 중국은 북한을 보호해야 할 이웃으로 여기는 것일까? / 사진·중앙포토

북한이 지난 1월 6일 핵실험에 이어 2월 7일 장거리 미사일을 발사하면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제재를 추가로 받게 됐다. 문제는 북한이 무역의 90%를 의존하는 중국이 얼마나 안보리 제재에 협력하느냐, 또 북한의 대중 경제의존이 중국의 영향력 증대로 이어질 수 있느냐 여부다. 6·25전쟁의 참전 이래 북한과 혈맹관계를 이어온 중국의 대북 레버리지는 여전히 유효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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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0월 10일 북한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오른쪽)과 중국의 권력 서열 5위인 류윈산 공산당 정치국 상무위원이 북한 노동당 창건 70주년 열병식에서 손을 잡고 인사하고 있다. 김정은은 이 날 25분 간 연설했다. / 사진·중앙포토

중국은 한반도를 순망치한(脣亡齒寒)의 관계로 이해한다. 역사상 중국은 자국에 맞선 세력과 국경을 맞대지 않기 위해 ‘완충지대’ 역할을 한 한반도에 몇 차례 무리한 파병을 시도했다. 명나라는 임진왜란 때, 청나라는 청일 전쟁 때 한반도에 파병했다가 국력이 기울어 망국으로 치달았다. 중화인민공화국이 1950년 북한에 파병을 결정한 것도 비슷한 맥락에서 해석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은 오랫동안 한반도의 안정을 자국의 핵심이익으로 내세워왔다. 그 때문에 북한이 핵실험과 장거리 미사일 발사로 국제사회에 도발을 일으켜도 중국은 북한에 대한 국제사회의 강력한 제재에 반대하리라는 게 학계의 지배적인 분석이었다. 과연 중국은 북한을 보호해야 할 이웃으로 여기는 걸까? 과연 북한은 중국에 여전히 동맹일까, 아니면 ‘부담’일까? 기묘하게 얽힌 북중관계의 역사에 비춰 오늘의 양국관계를 가늠해보았다.

북한 김일성 정권의 뿌리는 1936년 전반기에 세워진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동북항일연군은 중국공산당이 일본의 괴뢰국인 만주국(1931년 3월~1945년 8월) 내에서 조선인과 중국인의 항일 무장조직을 모아 편성한 부대다.

동북항일연군은 1935년 모스크바에서 열렸던 코민테른(국제공산주의 혁명조직) 제7차 대회의 결정에 따라 결성됐다. 제국주의에 대항해 싸우기 위해 공산당 주도로 좌우나 민족을 망라해 다양한 항일조직을 결집, 통일인민전선을 이뤄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중국공산당도 ‘8월 테제’를 발표해 이에 호응하면서 제2차 국공합작을 주창했다.

북중, ‘동북항일연군’으로 공산당 역사 공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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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년 김일성을 만난 덩샤오핑은 “해방전쟁이 20년 이상 계속됐던 인도차이나와 달리 한반도는 정전협정이 발효 중”이라며 김일성의 대결정책에 반대의사를 분명히 했다. / 사진·중앙포토

만주의 중국공산당은 이를 바탕으로 ‘항일반만(抗日反?)’이라는 원칙만 일치한다면 국민당 계열을 포함한 우파 무장 단체와도 손잡고 흡수한다는 방침을 세웠다. 이에 따라 중국공산당 계열의 동북인민혁명군은 부농으로 이뤄진 토착 무장단체나 국민당 계열의 의용군, 지역 마적단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항일 무장단체를 흡수해 동북항일연군을 꾸렸다.

조선인 무장조직들도 여기에 참여했다. 통일전선 원칙에 따라 다양한 성향의 조직이 합쳐지면서 공산당의 색채는 비교적 엷어졌다. 동북항일연군에서 가장 높은 지위였던 조선인은 김일성이 아닌 제2로군 참모장을 맡은 최용건(1900~1976)이었다. 최석천이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졌던 그는 중국 공산당의 초기 혁명 활동에 참여한 인물이다. 최용건과 군관학교 동기였던 저우바우중(周保中, 1902~1964)이 동북항일연군 2로군 총사령 겸 정치위원이었다. 최용건은 황푸군관학교에서 교관으로 근무했다. 이는 중국과 북한의 인적 네트워크 핵심에 해당한다.

정식 명칭이 중국국민당 육군군관학교였던 이 학교의 교장은 장제스(蔣介石, 1887~1975)였으며, 저우언라이(周恩?, 1898~1976)가 정치부 교관이었다. 훗날 중화인민공화국의 건국 10대 원수가 되는 녜룽전(?榮臻, 1899~1992), 예젠잉(葉劍英, 1997~1986)도 교관으로 활동했으며 쉬샹첸(徐向前, 1901~1990) 역시 1기생으로 졸업 뒤 교관을 맡았다.

최용건은 이런 상황에서 이 학교의 교관으로 활약하다 1926년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당시 무정부주의 독립운동 단체인 의열단의 단원 출신으로 모스크바 동방노동자공산주의학교에서 공부했던 오성륜(1898~1947)도 함께 교관으로 활동했다. ‘1국 1공산당 원칙’에 따라 중국의 조선인 공산주의자는 자체 공산당을 창당하지 못하고, 중국공산당에 입당해 그 지시에 따라야 했다. 중국공산당이 중국과 만주의 공산주의 단체를 흡수한 근거이기도 하다.

이렇게 세워진 동북항일연군에서 김일성도 한 자리를 맡았다. 허난(하남)성 출신의 중국공산당원 양정위(楊靖宇, 1905~1940)가 총사령이던 1군의 휘하에서 제2군 제6사단을 김일성이, 제2군 제4사 제1단장을 최현이 각각 맡았다. 최현은 현재 북한의 노동당 비서 최룡해의 아버지다.

이때 오성륜은 제1로군 제2군 정치주임을 맡았다. 북한의 육군사관학교 격인 평양의 강건종합군관학교에 이름을 남긴 강건(1918~1950)은 제1로군 제3사 제9단 정치위원이었다. 동북항일연군 1로군 산하의 최현, 김일성, 박달, 박금철 등은 1937년 ‘보천보 전투’를 벌였다. 이는 당시 한국에서 보도돼 김일성이란 이름을 처음으로 일반인에게 알렸다.

이후 만주에 주둔했던 일본 관동군과 만주국군이 1939년 경부터 대규모 토벌전과 귀순공작을 병행하자 동북항일연군 상당수가 궤멸했다. 활동이 곤란해진 생존자들은 1940년 12월말 얼어붙은 헤이룽강(아무르강)을 건너 소련 극동지역으로 몸을 피했다.

중국 공산당 출신 ‘연안파’, 북한 핵심으로 도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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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한중 수교가 이뤄지자 북한은 “동맹보다 국익을 더 위한다”며 중국을 비난했다. 그동안 중국은 북한을 지정학적으로 중요한 이웃으로 여겨왔지만 북한은 호락호락 중국의 영향권에 머물지 않았다. / 사진·중앙포토

소련군은 1941년 7월 독일군의 침공이 시작되자 일본군의 북진에 대비해 제88독립저격여단을 창설하고 야영지에 머물던 동북항일연군 출신들을 포함시켰다. 여단 병력의 대부분은 중국인으로 조선인은 10%를 넘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 여단은 제2차 세계대전 종전 뒤 만주와 북한의 일본군 무장해제에 동원됐으며 이곳의 조선인은 대부분 북한 정권의 핵심부를 이뤘다. 이처럼 황포군관학교와 동북항일연군, 소련군 88여단에 이르기까지 중국과 북한의 공산주의자는 중국공산혁명 초기와 제2차 세계대전 기간 중 항일전쟁에서 함께 싸웠다.

이에 따라 외부 관측자들은 베이징과 평양 사이에 일종의 공동체 정신이 잔존해왔을 것으로 짐작해왔다. 보이지 않는 정책 공조와 정보 공유를 위한 소통 채널이 있을 것이라는 추정도 나온다.

건국 초기 중국과 북한을 잇는 중요한 인적 채널 중 하나가 북한에서 연안파로 불리는 일련의 인물들이다. 북한에서 연안파는 중국공산당의 고위층과 연결되는 조선인들로 해방 뒤 북한정권 건설에 참여했던 인물을 가리킨다. 그중 방호산(1916~?)은 1939년 연안으로 와서 항일군정대학을 수료하고 중국 공산당 팔로군에 파견됐다. 그는 1945년부터 반국민당 전투에 참가하기도 했다. 중국은 국공내전이 승리로 끝나자 군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조선인 출신으로 이뤄졌던 인민해방군 3개 사단을 북한으로 ‘귀국’시키는 내용의 ‘중조비밀군사협정’에 따라 방호산은 조선계 중국인 1만 명이 주력을 이룬 166사단을 이끌고 귀국했다. 이 사단 병력은 실전 경험이 풍부해 북한 인민군의 주력을 이뤘다. 그 결과 6·25전쟁 때 처음으로 한강을 건너고 호남 지역을 석권한 뒤 마산 부근까지 진출했다. 이때 방호산은 영웅 칭호를 얻었다.

1949년 이후 북한에서 연안파가 크게 부상했다. 자연스레 김일성은 자신의 세력 유지를 고민하게 됐다. 이런 고민은 6·25전쟁계획에서 연안파를 배제한 것으로 나타났다. 1950년 5월 김일성은 베이징에서 마오쩌둥을 만났지만 6·25전쟁 계획을 알리지 않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평양이 중국과 군사정보를 공유하기 시작한 것은 6·25전쟁에 중공군이 참전한 직전인 1950년 9월 28일로 알려졌다. 당시 중국인민지원군 총사령관이던 펑더화이(彭德懷, 1989~1974)가 전쟁을 북중연합 지휘로 수행하면서 북한 인사를 부사령관으로 임명해 상호 연락을 담당하도록 요구했기 때문이다. 이때 연안파인 박일우(1903~1955)가 그 자리를 맡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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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일 국방위원장(왼쪽)이 1989년 11월 중국을 방문하는 김일성 당시 주석의 특별열차에 올라 환송하고 있다. 1980년대 후반 이후 김일성은 외교, 김정일은 내정을 주로 담당했다. / 사진·중앙포토

김일성은 연안파가 자신의 권력에 도전할까 봐 노심초사했다. 그는 결국 박일우를 우편상으로 좌천시키는 수를 쓴다. 이에 박일우는 “마오쩌둥의 허락도 없이 어떻게 나를 삼류 장관 자리로 보내느냐”며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당시 중국은 6·25전쟁 동안 연안파를 북한과의 소통 채널로 삼기 위해 지원했고 연안파는 이를 활용해 북한에서의 권력 장악을 시도하던 차였다. 김일성은 이 시기를 회고하면서 “전쟁 기간 중 사대주의가 극심했고 전후 참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며 노골적으로 불편해 했다. 결국 김일성은 1955년 12월 박일우를 해당행위자로 몰아 출당 조치했다.

북중 간의 균열이 표면으로 드러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1956년 종파사건이었다. 소련의 스탈린 격하운동 등의 영향으로 북한 노동당의 연안파와 소련파가 손잡고 김일성을 당 위원장직에서 끌어내리려고 시도했다.

김일성이 전후 복구자금 마련을 위한 소련 방문으로 자리를 비운 사이 최창익 등 연안파는 박창옥을 주축으로 하는 소련파와 손잡고 세력을 결집했다. 하지만 최용건이 이를 포착해 김일성에게 알리자 그는 급히 귀국했다.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연안파 윤공흠이 “인민들은 헐벗고 굶주리며, 집도 없이 토굴 속에서 병마에 시달리는데 정부는 이런 처참한 현실을 무시하고 군수공업 중심의 중공업 우선정책을 펴고 있다”고 연설했다. 하지만 그는 친 김일성 세력에 의해 단상에서 끌어내려졌고 그 자리에서 출당당했다.

후진타오, 김정일에게 “전략적 대화” 강조

이에 연안파는 중국에 도움을 청했다. 이 소식을 접한 펑더화이 국방부장이 곧바로 평양을 찾은 데 이어 소련도 아나스타스 미코얀(1895~1978) 부총리를 보내 김일성을 압박했다. 김일성은 어쩔 수 없이 출당시킨 인사들을 복당시켰으나 이들이 북한을 떠나자 다시 연안파와 소련파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에 나섰다.

그해 10월 헝가리 민주화혁명이 벌어지면서 소련은 더 이상 북한에 압력을 넣을 형편이 못됐다. 중국도 평양의 정치 상황을 들여다볼 처지가 못 됐다. 이에 따라 김일성은 연안파를 대대적으로 숙청했으며 외국의 내정 간섭을 거부하기 위한 목적으로 중국군을 포함한 모든 외국군을 북한에서 철수시켰다. 이때 중국은 북한에서 핵심소통 채널의 대부분을 잃었다.

당시 중국은 새롭게 조성된 중소 분쟁의 와중에 북한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싶어했다. 이를 위해서는 북한과의 소통 및 정보 채널의 회복이 필요했다. 그러나 한 차례 호된 경험을 한 김일성은 중국을 조심스럽게 대했다.

1949년부터 약 30년간 주중 북한대사 가운데 연안파 관련 인사가 단 한 명도 없었다. 이 자리는 국내파와 만주파가 차지했다. 같은 기간 북한 외상 4명(박훈용·남일·박성철·허담) 중에도 연안파는 전혀 없었다. 이 밖에도 김일성은 친중 인사에게 주요 직책을 맡기지 않았다.

중공군 철수 직전인 1958년 저우언라이는 처음으로 북한을 방문해 양국관계를 돈독하게 하려고 시도했다. 그해 ‘북중 간 지도자 상호방문 협정’이 이뤄졌다. 이로 인해 양국 지도자는 빈번한 상호방문을 통해 핵심 사안을 심도 높게 논의하고 조정할 수 있게 됐다. 북중 정상외교의 시대가 간신히 열리게 된 것이다.

양국 정상외교는 북중관계의 핵심이었다. 중국 입장에선 양국 간 채널 가동을 통해 북한에 관한 정보수집의 기회로 이끌 계기가 됐다. 김일성은 마오쩌둥, 덩샤오핑, 장쩌민, 후진타오 등 중국 역대 주석에 접근할 수 있는 기회를 확보했다. 북한의 1인자는 방중 시 중국의 모든 정치국 상무위원을 만날 수 있는 기회도 얻었다. 이는 양국 관계가 돈독하든 그렇지 않든 간에 1958년의 양국 간 공식 협정에 따른 일상적인 활동이다. 이 협정에 따라 양국 정상은 수시로 만났지만 한편으로 여러 가지 문제를 낳기도 했다.

우선 정상끼리 만나다 보니 중국 외교부와 북한 외무성 등 공식 기관은 공식적인 외교 채널에서 소외될 수밖에 없었다. 북중관계에서 이들은 핵심을 맡지 못하고 의전이나 맡는 기관으로 전락한 것이다. 평양 주재 중국대사관은 타국에서는 기본적으로 하는 정부수집 임무를 전혀 할 수 없는 것은 물론 중국 외교부 고위 관료도 북한의 고위급 인물을 거의 만날 수 없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대신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산하의 대외연락부가 북한 관리에 깊숙이 개입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과 중국은 국가 대 국가가 아닌 당 대(對) 당 관계를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대외연락부는 당의 기관으로서 핵심적인 외교 의사결정을 하는 곳이 아니라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중국 공산당 대외연락부는 2006년 북한의 핵실험 직전 북한이 실험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잘못된 보고를 올리기도 했다. 북한의 조선노동당 대외연락부도 제대로 기능을 하지 못하기는 마찬가지였다.

1958년 설정된 북중 간의 기묘한 외교관계는 21세기에 와서도 별반 변화가 없었다. 2010년 5월 베이징에서 김정일을 만난 후진타오가 “양국 간 전략적 대화가 중요하다”며 전략적인 측면을 강조한 점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중국외교, ‘한반도 평화와 안정’에 주력

최근 중국을 들여다보면 다량의 탈북자 정보를 필요로 하지만 북한으로부터 충분한 정보를 확보하지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는 북중이 오랫동안 정상 수준에서만 교류하다 보니 상세한 정보는 공유되지 못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중국이 북한의 핵과 장거리 미사일에 대한 핵심 동기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것도 마찬가지다.

김일성은 신 중국이 들어선 1949년 이후 중국 및 소련과 동시에 동맹협정을 맺길 원했다. 모든 동맹관계는 기본적으로 세력 균형이 목표다. 중소갈등 상황에서 중국과 북한은 전략적 목표를 달리했다. 중국은 소련을, 북한은 미국을 최대 위협으로 간주했기 때문이다.

1961년 북중 우호조약에 서명될 당시 양국은 동상이몽의 상태였다. 많은 학자가 이를 바탕으로 북한과 중국이 서로 신뢰하는 동맹이 아니라는 주장을 편다. 북중동맹은 시작만 봐도 삐걱거릴 수밖에 없는 관계라는 것이다.

이를 잘 보여주는 사건이 1963년 9월 당시 중국 국가주석이자 군사위원회 주석인 류샤오치(劉少奇, 1898~1969)의 평양 국빈 방문이다. 북한은 중국과 달리 소련의 원조가 절실한 데다 소련으로부터 방공장비를 대규모로 들여오려고 했기 때문에 중국을 냉정하게 대했다. 당시 들여온 소련의 방공장비는 지금도 북한 방공망의 핵심을 이루고 있다. 북한은 중소 갈등 시기에 중국과 소련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며 국익을 극대화하려고 했지만 이런 복잡한 상황은 북중동맹에 ‘신뢰 결핍’이라는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북한은 중국을 벼랑끝으로 몰아가는 위험한 방식으로 자신의 국익을 추구하기도 했다. 이를테면 북한은 중국이 문화 혁명으로 시끄럽던 시기에 북중관계 복원을 시도했다. 방식은 기묘했다. 정상회담이나 고위급 방문이 아닌 모험적인 도발을 이용한 것이다.

북한은 1968년 1월 미국 해군 군함 푸에블로함을 납치했다. 그러면서 중국에 미 제국주의에 대항하는 연합전선에 함께 서겠다는 분명한 입장을 요구했다. 중국은 워싱턴에 대항하는 성명을 발표할 수밖에 없었다. 1969년 4월 북한은 미국의 EC-121 정찰기를 격추시켰다. 중국은 다시 한 번 북한의 편에 설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마오쩌둥은 북한의 이러한 벼랑 끝 정책을 완전히 지지하지는 않았다. 당시 중국은 미국과 비밀리에 수교협상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미국과의 수교는 중소 갈등 상황에서 중국의 현실적인 선택이었다. 따라서 북한의 도발을 지지한다는 중국의 성명은 북한에 대한 최소한의 성의를 보이기 위한 립 서비스에 불과했다.

1970년대에 들어 북한과 중국의 입장 차이가 더욱 벌어지기 시작했다. 중국의 경우 혁명 외교의 중요성이 서서히 감소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 결과 김일성이 마오쩌둥에게 한반도에서 미국을 몰아내고 공산주의 혁명을 이루는 데 중국의 역할을 강조했지만 마오쩌둥은 그의 생각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1975년이 되면서 양국 입장은 결정적인 사건으로 틈새가 벌어졌다. 당시 중국의 도움을 받던 공산단체 크메르루지가 프놈펜을 점령하며 캄보디아를 적화했다. 북베트남군은 사이공 점령을 위한 최후 공세 중이었다. 인도차이나의 적화는 시간문제였다.

베이징을 방문해 마오쩌둥을 만난 김일성은 한껏 고조된 상태였다. 베이징에서 열린 환영만찬장에서 그는 “잃는 것은 군사분계선이요, 얻는 것은 조국 통일”이라는 연설을 했다. 이어 그는 “군사적인 방식으로 통일을 이룰 황금 같은 기회다. 한시 바삐 이 엄청난 기회를 잡아야 한다”라며 마오쩌둥을 설득하려고 했다.

마오쩌둥이 어떤 대답을 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당시 저우언라이 총리와 덩샤오핑 상무부총리는 고개를 저었다. 김일성을 만난 덩샤오핑은 “해방전쟁이 20년 이상 계속됐던 인도차이나와 달리 한반도는 (중국도 서명한) 정전협정이 발효 중”이라며 김일성의 대결정책에 반대를 분명히 했다.

중국은 적절한 정치적 해결책이 나올 때까지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을 유지하는 데 관심을 가졌다.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은 현재까지 중국이 외교정책에서 반드시 언급되는 말이 됐다.

중국은 역사적인 상황을 앞두고 있었다. 1971년 8월 헨리 키신저 미국 국무장관의 베이징 비밀 방문, 1972년 2월 21일 마오 주석과 리처드 닉슨 미 대통령 간의 정상회담 이후 대미 수교(1979년 1월)를 눈앞에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중국엔 역사적인 기회였다.

핵과 미사일 개발, 북한만의 ‘홀로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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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징에 위치한 북한대사관의 모습. ‘주체’만 강조하는 북한의 체제 특성이 최근 중국으로 하여금 대북 지렛대 역할을 하기 어렵게 만든다는 평가가 많다. / 사진·중앙포토

덩샤오핑의 지도로 개혁·개방에 나선 중국은 경제발전을 위해 동북아 평화와 안정이 절실했기에 한반도에서 대결정책을 추구한 북한과 갈등을 벌일 수밖에 없었다.

1980년 1월 중국 외교부장 황화(黃華)는 내부 연설에서 “가까운 장래에 두 한국이 통일되는 것은 어려워 보인다. 우리는 한반도에 미군이 계속 주둔한다는 미국과 일본의 입장을 공유한다. 한반도의 안정이 지역 전체의 안정에 기여할 것”이라는 발언까지 한 것으로 알려졌다.

중국에 중요한 것은 북한이 아니라 미국이었던 것이다. 중국은 대미수교로 통상 대상인 서방과의 관계회복에 급물살을 타고 싶었다. 외교적으로는 미국으로부터 ‘중국을 대표하는 정부는 중화인민공화국’이라는 ‘하나의 중국’ 원칙도 인정받았으니 국익은 물론 명분에서도 이보다 더 좋은 일은 없었던 것이다.

이는 분명히 북한의 대남 혁명전략과 일치하지 않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북한은 홀로서기를 시작했다. 그 핵심은 핵과 장거리 미사일 개발이었다. 북한의 핵과 장거리 미사일 개발을 중국을 믿을 수 없기 때문이라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는 이유다.

1983년 10월 중국의 설득으로 북한은 남북대화에 나서겠다고 했으나 다음날 아웅산 테러 사건을 벌였다. 중국이 북한을 제대로 설득하지 못하고 있다는 게 분명해졌다. 이 밖에도 북한은 중조 우호조약 25주년 기념으로 중국 북해함대의 자국의 항구 방문을 요청했지만, 중국은 이를 거절했다. 중국은 당시 한국과 접촉하면서 북한과의 군사관계를 축소하겠다는 의도를 갖고 있었다.

덩샤오핑은 1987년 5월 만남에서 김일성에게 이렇게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모든 나라는 상황에 따라 나름의 문제가 있다. 모든 이슈에 대해 똑같은 입장을 요구할 순 없다. 우리도 마찬가지로 당신의 통일 계획을 지지한다. 하지만 이는 장기 목표가 돼야 한다.” 이런 와중에 1992년 8월 한중 수교가 이뤄졌다. 북한은 “동맹보다 국익을 더 위한다”며 중국을 비난했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중국은 북한을 역사적으로, 지정학적으로 중요한 이웃으로 여겨왔다. 하지만 북한은 호락호락 중국의 영향권에 머물지 않았다.

최근 북한의 대중국 경제의존도가 높아지고 있는 게 사실이다. 때문에 중국이 외교적으로는 물론 경제적으로도 북한에 영향력이 있을 것이라는 주장이 많이 나왔다. 하지만 북한의 대중 경제의존이 반드시 중국의 영향력 증대로 이어질지는 여전히 미지수다. 북한 경제 자체가 대외 교역에 의존하지 않는 독특한 구조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주체만 강조하는 북한의 체제 특성이 중국이 대북 지렛대 역할을 하기 어렵게 만들고 있다.

- 채인택 논설위원 ciimccp@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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