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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호의 현문우답] 예수를 만나다 ⑪ 당신은 예수의 제자인가

이스라엘로 가는 비행기 안이었다. 옆자리에는 30대 중반의 유대인 남성이 앉았다. 그는 비빔밥에 고추장을 듬뿍 풀었다. 말을 걸었다.

“한국 음식을 좋아하느냐?”
“매콤해서 좋다.”
“유대인은 음식을 먹을 때도 지켜야 할 율법이 많지 않나?”
“나는 정통파 유대교인은 아니다. 성경보다는 과학을 더 의지한다. 유대 율법에는 소고기와 소에서 나오는 우유나 치즈를 함께 먹지 말라고 한다. 가령 소고기를 먹었으면 6시간이 지난 후에야 우유나 치즈를 먹을 수 있다.”

자신은 그걸 지키지 않는다고 했다. 대신 소고기와 치즈를 동시에 먹지는 않는다고 했다.

“그럼 기내식에서 소고기와 치즈가 같이 나온다면 어떡하느냐?”
“소고기를 먼저 다 먹어서 끝내고, 그 다음에 치즈를 먹는다. 소고기를 끝내기 전에는 치즈를 먹지 않는다.”

스스로 과학을 더 중시한다는 유대인에게도 생활 속에 녹아 있는 율법의 영향력은 아주 컸다.

이유가 있다. 유대교는 ‘율법의 종교’다. 구약의 모세는 시나이산에서 하느님에게서 율법을 받았다. 율법은 신과의 언약이다. 유대인은 율법을 지키고, 하느님은 구원을 약속한다. 모세가 자신의 아들에게 할례(생식기의 포피를 잘라내는 일)를 행하지 않자 구약의 하느님은 모세를 죽이려 했을 정도다. 유대인들이 율법을 목숨처럼 여기는 배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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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교는 ‘율법의 종교’다. 예루살렘 통곡의 벽 앞에서 유대인들이 기도를 하고 있다.

2000년 전에도 그랬다. 예수는 자신의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이스라엘의 많은 장벽과 싸워야 했다. 그 중 하나가 ‘유대 율법’이었다. 예수가 설교를 할 때 많은 율법학자가 찾아와 공격했다. 우리의 율법은 이러한데, 당신은 왜 그렇게 가르치느냐? 그렇게 묻고 따졌다. 예수는 이에 대해 정면으로 반박했다. 복음서에는 이렇게 기록돼 있다.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마태복음 5장17절)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마태복음 5장20절)

예수는 분명히 못박았다. 자신은 ‘폐지’가 아니라 ‘완성’을 위해 왔다고 말이다. 또 사람들에게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들보다 의롭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갈 수가 없다”고 선언했다. 당시로서는 굉장히 파격적인 말이었다. 예수의 말을 뒤집으면 이렇다. “지금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 그들보다 의로운 이들만 하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 온유하게만 들리지만 예수의 말은 유대 율법사회를 향한 ‘선전포고’나 마찬가지였다. 그들의 방식에는 구원이 없다고 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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렘브란트의 ‘예수의 설교’.

예수는 각별한 물음을 던졌다. 그건 당시 유대 사회가 묻지 않는 물음이었다. 예수는 ‘어떡해야 율법을 철저히 지킬 수 있나’가 아니라 ‘왜 율법을 지키는가’를 되물었다. 유대인들이 조상 대대로 내려오던 옷의 단추(율법)를 꿰느라 정신이 없을 때, 예수는 “무엇을 위해 단추를 꿰는가?”라고 물은 셈이었다. 그건 유대인들이 망각하고 있던 ‘첫 단추’였다.

율법은 일종의 고속도로다. 서울에서 부산으로 가는 빠른 길이다. 예수도 율법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았다.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 나라에서 큰사람이라고 불릴 것”(마태복음 5장19절)이라고 했다. 율법의 목적지는 부산이다. 부산에 도착해야 한다. 그걸 위해 율법을 지키며 고속도로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애를 쓴다. 그래서 사람들은 율법을 중시한다. 세월이 흐른다. 1년, 2년이 아니라 100년, 200년이 흐르고 1000년, 2000년이 흐른다.

그 와중에 주객(主客)이 바뀐다. 목적과 수단이 뒤바뀐다. 율법을 중시하던 사람들은 갈수록 엄격해진다. 율법을 어기는 이들에게 가혹해진다. 어느새 율법 자체가 ‘눈 앞의 목적’이 돼버린다. 사람들은 이제 ‘부산’을 잊고 만다. 내가 어디로 가고 있었는가를 잊어버린다. 고속도로 위를 달리지도 않는다. 얼마나 세게 율법을 지키고 있는가. 오직 그것만을 따진다.

예수 당시에도 그랬다. 유대인들은 ‘부산’을 망각했다. 부산을 향해 나아가지도 않았다. 그들은 고속도로의 가드레일만 붙들고 있었다. 그게 율법이었다. 예수는 그들에게 되물었다. “당신은 어디에 서 있는가?”“어디로 가고자 함인가?”“당신이 붙들고 있는 가드레일이 목적지인가, 아니면 부산이 목적지인가?” 예수는 설교를 통해 그렇게 묻고, 또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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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교 회당에서 설교하는 예수.

비단 율법만 그럴까. 종교도 마찬가지다. 종교도 하나의 고속도로다. 부산에 닿기 위한 길이지, 종교 자체가 목적지는 아니다. 그럼 물어야 하지 않을까. “나의 목적지는 어디인가. 나는 어디로 가고 있나. 부산인가, 아니면 고속도로 자체인가.” 사람들은 종종 착각한다. 주일을 지키고, 십일조를 내고, 교회를 섬기는 자체를 ‘부산’이라 여긴다. 거기가 목적지라 생각한다. 그건 고속도로일 뿐이다. 그걸 통해 우리는 ‘부산’으로 가야 한다. 고속도로 자체가 종점은 아니다.

2000년 전의 유대인들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을까. 고속도로의 가드레일만 붙들고 있으면 저절로 부산으로 간다고 믿지 않았을까. 그러니 예수의 지적이 지독하게 부담스러웠을 터이다. “우리가 옳아. 우리는 부산으로 가고 있어”라고 철석같이 믿는 이들에게 예수는 “거기는 부산이 아니야. 너희는 도로 위에 가만히 서 있을 뿐이야”라고 말했으니 말이다.

최근에 개봉한 영화 ‘부활’을 봤다. 거기서도 예수는 유대 율법사회를 위협하는 ‘위험 인물 1순위’로 나온다. 영화에서 유대의 제사장과 사제들은 빌라도 총독에게 십자가에서 숨을 거둔 예수의 주검까지 철저히 감시해 달라며 두려움에 떨었다. 그만큼 예수의 메시지가 그들의 세계에는 위협이었다. 그렇지 않다면 굳이 예수의 십자가형을 주장하지도 않았을 터이다. 당시 예수의 가르침은 박제가 돼 굳어가는 유대 율법의 심장을 찔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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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릴리에 사는 유대인들에게 호숫가는 가족 소풍을 위한 장소이기도 하다.

티베리아스에서 남쪽 방향 갈릴리 호숫가로 갔다. 그 구간은 산책로도 있고, 호수 주변에 공원도 있었다. 주차장에 차를 세운 사람들이 가족 단위로 와서 바비큐를 즐기고 있었다. 호숫가에는 부드러운 모래밭이 있었다. 자세히 보니 알갱이가 모래는 아니었다. 모두가 자잘하게 부서진 조개 껍데기였다. 유대인들은 조개를 먹지 않는다. 비늘이 없는 해산물은 입에 대지 않는다. 율법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호숫가에는 오랜 세월 부서지고 부서진 조개 껍데기가 지천이었다. 궁금했다. 처음부터 그랬을까. 유대 율법은 시작부터 격식에 불과한 것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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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릴리 호숫가의 ‘모래사장’은 모래가 아니라 부서진 조개껍데기로 돼 있다.

모세가 시나이산에서 하느님으로부터 율법을 받았다고 구약에 기록돼 있다. 율법에는 하느님에게 올리는 제사와 성막의 설치, 제사장의 직무와 유대인의 생활방식 등 아주 구체적인 항목까지 기록돼 있다. 특히 눈에 띄는 건 제사다. 유대인들은 소나 양, 염소 등을 잡아 반으로 갈랐다. 그걸 제단 위에 올려놓고 태웠다. 단순히 소나 양을 하늘에 바치는 의미가 아니었다. 죄를 지은 자신이 누워야 할 자리에 소나 양을 대신 눕히는 제사였다. 그렇게 유대인들은 불타는 양을 보며 자신의 죄를 참회했을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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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무렵의 갠지스 강가.

인도에 간 적이 있다. 인도를 다녀온 사람들은 한결같이 “바라나시의 갠지스강이 가장 좋았다”고 했다. 인도의 여러 지역을 돌다가 드디어 바라나시에 도착했다. 나는 한껏 기대에 부풀었다. 시장통처럼 어수선한 길을 헤치고 갠지스강으로 갔다. 강가에서는 꽤 큰 규모의 종교 행사가 벌어지고 있었다. 이마에 붉은 점을 찍은 힌두교인들이 많았다. 불빛이 반짝이고 음악이 울려퍼졌다. 대단히 이국적인 분위기였다. 그래도 알 수는 없었다. 왜 갠지스강이 특별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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힌두교의 종교 행사가 갠지스 강가에서 열렸다. 복장과 음악, 염송 등이 이국적이었다.

작은 나룻배를 탔다. 갠지스강을 건넜다. 힌두교인들은 하늘에 있던 갠지스강이 시바신(힌두교의 신)의 몸을 타고 땅으로 흘러내렸다고 믿는다. 그래서 죽은 뒤 이 강에 뿌려지길 바란다. 갠지스강이 신의 나라로 흐른다고 철석같이 믿기 때문이다. 실제 주변의 강들은 모두 같은 방향으로 흐르는데, 갠지스강만 반대 방향으로 흐른다. ‘천국으로 흐르는 강.’ 하류 쪽으로 해가 떨어지고 있었다. ‘그럼 저 너머에 천국이 있는 걸까.’ 노을이 지는 갠지스강. 사람들은 “아름답다”고 했다. 갠지스의 석양은 매혹적이었다. 그래도 찾을 수는 없었다. 왜 갠지스강이 그토록 특별한 장소인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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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를 타고 갠지스강을 건너가서 바라본 야경.

해는 떨어지고 어둠이 내렸다. 배는 좀 더 상류로 올라갔다. 사람들이 강가에 불을 피우고 뭔가를 태우고 있었다. 그쪽으로 배를 댔다. 내려서 보니 화장터였다. 말이 화장터이지, 아무런 건물도 없고, 아무런 칸막이도 없었다. 그냥 강가에서 장작을 얼기설기 쌓아두고 시신을 태우고 있었다. 관(棺)도 없었다. 그저 얇은 천으로만 시신을 동여맸을 뿐이었다. 그 와중에도 들것에 실린 시신 몇 구가 강가로 옮겨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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갠지스강 상류의 화장터. 배에서 내리면 사진을 찍을 수가 없다. 배가 흔들려서 사진도 흔들렸다.

불과 3m 앞이었다. 그토록 신랄한 화장 광경을 본 적이 없었다. ‘투둑 투둑’하는 소리와 함께 물이 뚝뚝 떨어지고 연기가 피어올랐다. 적나라한 광경이 눈 앞에서 펼쳐졌다. 그 순간, 커다란 해머로 뒤통수를 ‘꽝!’하고 맞는 느낌이었다. ‘저게 바로 나구나!’싶었다. ‘인생이 순간이구나. 잠시 후면 내가 저 위에 눕겠구나. 장작 위에서 타고 있는 저게 바로 나구나!’

그 순간을 잊을 수가 없다. 어떠한 사유나 논리나 설명도 필요 없었다. 그냥 ‘꽝 !’하고 쳤을 뿐이다. 폭풍처럼 후려치는 강고한 펀치였다. 드는 생각은 딱 하나였다. “인간의 삶이 정말 순간이구나. 그럼 뭘 해야 하지?” 잠시 후 답이 올라왔다. “내가 삶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 바쁘다는 이유로 차일피일 미뤘던 것. 그걸 하자. 언제? 지금 당장!” 그런 뒤에야 고개가 끄덕여졌다. 왜 갠지스를 특별하다고 하는지 말이다.

모세 당시의 유대인들은 어땠을까. 장작더미 위에서 불타고 있는 양, 그건 사실 ‘자기 자신’이었다. 유대인들이 그 광경을 아무런 감정 없이 쳐다봤을까. 장작더미에 불이 붙고, 연기가 치솟고, 붉게 드러난 양의 살이 불에 닿고, 바람이 불고, 불길이 더 거세지고, 그 속에 누운 양의 몸뚱이가 타들어가는 광경을 지켜보며 유대인들은 눈물을 흘리지 않았을까. 가슴을 치지 않았을까. 양의 죽음을 통해 자신의 죽음을 체험하지 않았을까. 그걸 통해 죄를 씻어내리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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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셉 앤톤 코프의 1803년작 ‘노아의 번제’. 대홍수가 끝나고 노아가 배에서 내린 뒤 가장 먼저 한 일도 제단을 쌓고 정결한 짐승을 잡아서 제사(번제)를 드리는 것이었다.

그렇게 세월이 흘렀다. 500년, 1000년, 2000년, 3000년이 흘렀다. 그 와중에 ‘제사’는 형식이 되고 격식이 됐다. “양을 잡아서 제사만 올리면 나의 죄가 소멸된다”는 ‘제사=죄사함’의 자동 등식이 생겨났을 터이다. 물론 모세 당시에도 ‘자동 죄사함’을 믿는 사람들이 있지 않았을까. 불에 타는 양을 보며 모두가 자신의 가슴을 치지는 않았을 테니 말이다.

예수의 십자가 죽음에는 유대의 ‘제사 코드’가 녹아 있다. 2000년 전 이스라엘은 로마의 식민지였다. 메시아가 나타나 로마의 압제에서 해방시켜 줄 것이란 열망이 유대인에게는 있었다. 그들은 예수가 사람들을 끌어 모아 창과 칼을 들고 로마의 군대에 맞서 ‘식민지 해방’을 일굴 것을 기대했다. 예수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골고다 언덕의 십자가에서 무기력하게 죽음을 맞이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예수의 죽음’. 유대인들은 어떻게 봤을까.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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렘브란트의 ‘세 개의 십자가’.

모세 당시 하늘에 올렸던 제사들 중에 ‘화목제(和睦祭)’가 있었다. 하느님과 사람 사이를 화목하게 하기 위한 제사다. 소나 양 등을 잡아서 피를 제단에 뿌리고, 내장과 콩팥ㆍ간 등은 제단에서 불살랐다. 유대인들은 ‘예수의 죽음’도 일종의 화목제로 봤다. 하느님과 사람 사이를 화목하게 하기 위해 가축이 아니라 예수 자신이 몸소 제물이 된 것이다. 예수가 사람들의 죄를 대신해 제물이 됐기에 예수를 믿는 사람은 죄사함을 받는다고 봤다.

이 대목에서 물음을 던지는 이들도 많다. “이걸 믿고 싶은데, 아무리 노력해도 믿어지지 않는다.” 2000년 전 예수의 죽음과 나의 죄, 그 사이의 연결고리를 찾을 수가 없다고 한다. “예수님의 죽음으로 인해 왜 나의 죄가 사해지는가. 더구나 믿기만 하면 죄사함을 받는다니, 그건 또 무슨 마케팅인가. 그게 ‘예수 천국, 불신 지옥’과 무엇이 다른가. 그냥 믿기만 하면 ‘죄사함’은 자동으로 주어지는 건가. 그건 도무지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그렇게 하소연하는 그리스도교인들도 여럿 만났다.

반면 ‘죄사함’을 기계적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도 있다. “나는 교회를 다니고, 주일을 지키고, 십일조도 꼬박꼬박 하고, 예수님도 믿는다.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나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돌아가셨다. 그러니 나는 이미 죄사함을 받았다. 나는 예수님을 믿으니까.” 대개 이런 사람들은 큰 고민이 없다. ‘천국행 티켓’을 이미 거머쥐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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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릴리 호숫가의 산책길. 뒤편에 노랗게 겨자꽃이 피어 있다. 언뜻 보면 유채꽃처럼 보인다.

호숫가 오솔길을 걸었다. 겨자꽃이 노랗게 피어 있었다. 누구일까. 둘 중 누구의 눈이 ‘예수의 눈’에 더 가까울까. 나는 앞사람의 이야기에서도, 뒷사람의 이야기에서도 ‘예수의 눈’을 찾지 못했다. 왜 그럴까. 두 사람의 이야기에는 ‘나의 십자가’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호숫가 풀밭에 앉았다. 눈을 감았다. 무엇이었을까. 인도의 화장터에서 커다란 망치가 뒤통수를 때렸던 이유는 뭘까. 그저 ‘놀라운 풍경’에 그칠 수도 있었는데 말이다.

그건 불타는 시신에 나를 대입했기 때문이 아닐까. 그렇게 장작 위에 올라가 누웠기 때문이 아닐까. 모세 당시의 화목제도 그렇다. ‘제물 따로, 나 따로’에도 씻어내림이 작용했을까. 그렇지 않다. ‘강 건너 불구경’하는 이의 가슴에는 불이 붙지 않는다. 장작 위에서 불타는 양을 보며 에고의 마음도 타야 한다. 그래야 신의 속성이 드러난다.

중국의 마조(馬祖ㆍ709∼788) 스님이 좌선을 하고 있었다. 이를 본 회양(懷讓ㆍ677∼744) 선사가 물었다. “좌선을 해서 무얼 하려고 하는가?” 마조가 답했다. “부처가 되고자 합니다.” 이 말을 들은 회양 선사는 저만치 가서 벽돌을 하나 들고 왔다. 그리고 ‘쓱싹, 쓱싹’ 갈기 시작했다. 그걸 본 마조가 물었다.

“벽돌을 갈아서 무엇에 쓰려고요?”
“거울을 만들려고 한다.”
“벽돌을 갈아서 어떻게 거울을 만듭니까?”
“그럼 좌선을 한다고 어떻게 부처가 되겠는가.”
“그럼 어찌해야 합니까?”

이 말에 회양 선사가 답을 했다. “수레가 가지 않을 때 수레를 때려야 옳은가, 아니면 소를 때려야 옳은가.”

이 일화는 불교의 가슴만 찌르지 않는다. 그리스도교의 가슴도 찌른다.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기 위한 길에서 나는 무엇을 때리고 있나. 수레인가, 아니면 소인가.’ 마조는 훗날 대선사(大禪師)가 돼서 유명한 선구(禪句)를 남겼다. “평상심이 도(道)다! (平常心是道).”그는 왜 평상심을 도라고 했을까. 우리의 마음은 날마다 지지고 볶는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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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릴리 호숫가에서 묵상했다. 저 바위와 풀들, 호수과 산들. 그 모두는 무엇을 통하여 생겨난 걸까.

요한복음은 이 물음에 답을 한다. ‘모든 것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고, 그분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요한복음 1장3절) 행복한 마음도, 지지고 볶는 마음도 진정 누구를 통해 생겨나는 걸까. 나를 통해서일까, 아니면 그분을 통해서일까. 성서에는 ‘그분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고 했다. 그러니 세상 어디에도 ‘내 것’은 없다. 여기에 답을 할 때 평상심이 도가 된다. 사도 바울은 그걸 아는 순간, 이렇게 말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의 그리스도가 산다.”(갈라디아서 2장20절)

영화 ‘부활’에서는 십자가 처형의 고통이 적나라하게 묘사된다. 커다란 대못이 나의 손을 뚫고, 나의 발을 뚫고 들어와 나무에 박힌다. 그 다음에 땅에 눕혀져 있던 십자가가 세워진다. 그럼 자신의 몸무게로 인해 몸이 아래로 축 처진다. 그때 손과 발을 뚫은 대못이 주위의 뼈를 짓누른다. 몸무게로 인해 손과 발의 뼈가 바스러지기도 한다. 고통은 극한에 달한다. 너무 고통스러워 “죽여달라”고 애원한다. 그래도 죽을 수가 없다. 십자가형에는 이런 고통까지 포함됐기 때문이다. 사형수는 고통에 겨워서 정신을 잃을 수도 있다. 그럼 사형 집행인이 솜에 신포도주를 적셔서 코에다 대고 깨운다. 죄수가 다시 고통을 느끼도록 말이다. 그렇게 매달린 채 죽지 않고 며칠씩 가기도 한다. 그럼 몽둥이로 다리뼈를 부러뜨린다. 그게 십자가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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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 그레코의 ‘예수의 처형’.

그런 ‘십자가 죽음’을 어떻게 봐야 할까.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는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 정말 그처럼 간단한 걸까. 그렇다면 역사 속의 성인과 수도자들은 왜 그토록 몸부림치며 에고와 싸웠을까. 그저 믿기만 하면 됐을 텐데 말이다. 그렇다면 뭘까. ‘예수를 믿는다’고 할 때 ‘믿는다’의 의미는 과연 뭘까.

그리스어로는 ‘피스티스(Pistis)’다. ‘신뢰하다’는 뜻이다. 미국의 저명한 기독교 미래학자 레너드 스윗 박사에게 이 물음을 던진 적이 있다.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할 때 ‘믿는다’는 서로가 서로를 아는 걸 뜻한다. 남편이 아내를 알고, 아내가 남편을 알듯이 말이다. 그건 아주 ‘관계적’인 의미다. 그런데 많은 교회가 그걸 믿어야 하는 신앙의 원리로 바꾸어 버렸다. 사람들은 기독교 교리만 믿으면서 ‘믿는 사람(信者)’이라고 말한다. 예수를 믿는다의 뜻은 그런 게 아니다.”

그걸 예수는 어떻게 표현했을까. “내가 너희 안에 거하듯 너희가 내 안에 거하라” 예수는 그렇게 말했다. 그럴 때 비로소 속성이 통한다. ‘신의 속성’이 통할 때 나와 하느님의 관계가 화목해진다. 그럼 어찌해야 할까. 남편이 아내를 알듯이, 아내가 남편을 알듯이, 우리도 예수를 알려면 어찌해야 할까. 그렇게 예수 안에 거하려면 어찌해야 할까. 예수는 복음서에서 이렇게 답을 던졌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마태복음 10장38절)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누가복음 14장27절)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갈라디아서 2장19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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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 그레코의 ‘십자가를 짊어진 예수’.

예수가 내놓은 답은 ‘자기 십자가’다. “자기 십자가를 짊어지고 따라오는 사람이라야 나에게 ‘합당’하다”고 했다. 예수는 왜 ‘합당하다’는 표현을 썼을까. 그리스어로는 ‘악시오스(axios)’다. ‘값어치가 있다(worthy)’는 의미도 있지만 ‘만나다(meet)’는 뜻도 있다. 무엇과 무엇이 만나는 걸까. 나의 속성과 신의 속성이 만난다. 그렇게 만날 때 ‘거함’이 이루어진다. “내가 너희 안에 거하듯 너희가 내 안에 거하라”고 할 때의 ‘거함’이다. 그런 거함의 열쇠가 ‘자기 십자가’다.
 
▶ ‘백성호의 현문우답’ 더 읽기
① 예수는 어떻게 물을 포도주로 바꾸었나
② 갸롯 유다는 왜 소금통을 쏟았을까?
③ 예수, “천국은 네 안에 있다.


그러니 ‘예수의 십자가’를 바라만 보면 어찌 될까. 그게 고속도로 위에서 가드레일만 붙들고 있는 것과 무엇이 다를까. ‘부산(하느님 나라)’으로 가려면 발을 떼야 하지 않을까. 바퀴를 굴려야 하지 않을까. 그 엔진이 ‘자기 십자가’다. 예수는 각자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오는 이들을 이렇게 불렀다. “나의 제자야!”그러니 다시 묻게 된다.

나는 예수의 제자인가,
당신은 예수의 제자인가.

<12회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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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호 기자 vangogh@joongang.o.kr
<페이스북 주소 : www.facebook.com/baiksung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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