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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륙·해양 문명의 경계, 수백 개 섬 엉킨 ‘풍요의 땅’

1 세계 선박들의 무덤인 방글라데시 치타공 해안. 크루즈·벌크선·여객선·군함·항공모함들이 이곳에서 해체된다.

2 방글라데시 델타 삼각주 지역은 거미줄 같은 수로로 연결돼 있다. 다카의 사다르하트 보트 터미널의 모습.

3 무굴제국이 1677년 건설을 시작한 다카의 최대 성채인 랄바그 요새. [사진 주강현]


북쪽 대륙의 남하 압력과 남쪽 해양의 북상 압력을 막아내는 완충지대라고 할까. 문명사적으로 벵골만은 대륙문명과 해양문명이 충돌하는 경계선이다. 역사적으로 고대와 중세까지는 북방 대륙문명, 15세기 이후에는 바다로 들어온 해양문명의 압력이 이 지역에 작용했다.


벵골사가(史家) 센구프타(Sengupta)는 벵골 지역을 ‘두 강의 땅’으로 압축 묘사했다(펭귄북, 2011). 두 강은 갠지스를 뜻하는 강가(Ganga)와 브라마푸트라를 뜻한다. 히말라야에서 발원한 갠지스강에는 힌두교뿐 아니라 자이나교·불교·시크교 등의 성지가 즐비하다. 티베트에서 시작해 갠지스와 합류한 뒤 벵골만으로 흘러드는 브라마푸트라강도 ‘신(神)의 자식’으로 불린다. 강이 바다와 만나 비옥한 삼각주를 만들고, 마침내 벵골만은 ‘고대문명의 종착역’이 되었다.


인도 콜카타에서 방글라데시 다카행 비행기표를 끊었다. 한 시간 비행의 짧은 거리지만 육로는 도로 사정과 국경 통과 절차가 생각보다 복잡해 시간이 많이 걸리기 때문이다. 여객기 안에 모기가 날아다녔다. 긴급 요청하니 스튜어디스는 무심하게 모기약을 들고 와 발 밑에 뿌려준다. 국제선에 모기라! 이후 가는 곳마다 겪은 일이다. 어디에 가나 모기가 들끓었고 모기와 공생하는 지하철도 경험했다. 방글라데시 해양실크로드 탐사는 이처럼 모기와 함께 시작됐다.


세계 최대 맹그로브 숲, 살아 있는 곡창지대 다른 한편으로 생각하면 모기가 많다는 것은 그만큼 이 땅이 건강하다는 증거가 아닐까. 비행기 아래로 내려다보니 벵골만 삼각주가 장엄하게 펼쳐진다. 인도 서벵골주와 방글라데시에 걸쳐 있는 순다르반스는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인 세계 최대 맹그로브 숲. 순다르반스는 ‘아름다운 광대한 숲’을 뜻한다. 벵골만은 수백 개의 섬과 수많은 수로가 실타래처럼 엉켜 있다. 저습지다. 모기가 들끓는 이유가 쉽게 이해된다. 열대우림의 섬과 섬을 헤엄치며 옮겨 다니는 벵골호랑이도 야생이 살아 있다는 증거다.


국제선 기내식이 빵 하나에 작은 물병 하나. 나라가 가난하니 모든 물자가 빈곤한 탓이다. 오늘날 ‘빈국’과 ‘가난’의 대명사처럼 불리는 방글라데시는 역사 지리적으로는 황금의 땅이었다. 14세기의 위대한 여행가 이븐 바투타는 ‘풍요의 땅’으로, 16세기에 이곳을 찾은 네덜란드 상인 판 린돌란(Van Lindolan)은 ‘동방의 곡창지대’라고 했다. 문명의 젖줄이 바다로 내려가는 문명의 요람이자, 엄청난 인구가 몰려 있는 삼각주는 인류의 도가니였다. 곡창지대인 만큼 지금도 방글라데시 인구밀도는 세계 최고다.


다카 시내 사다르트(Sadargt) 포트로 나갔다. 큰 정기 여객선이 즐비하다. 수로를 통해 각 지역으로 가는 배들이다. 터미널 버스처럼 행선지를 표시하고 늘어서 있다. 선실에는 보료를 깔고 누울 태세를 갖춘 가족이 곳곳에 눈에 띈다. 여행을 숱하게 다닌 처지지만 물속에서 머리만 내놓은 사람들을 보는 순간 놀라 자빠진다. 물개인지 인간인지 물속에서 살아가는 인간들이 숨 쉬는 사다르트 포트.

치타공의 강변에 형성된 거대한 수산시장. [사진 주강현]


다카의 주요 교통수단이 선박이며 뱃길이야말로 생명줄임을 알게 한다. 고대와 중세에도 사정은 같았을 것이다. 이처럼 벵골은 강과 바다로 연결돼 문명의 동맥을 이어갔다. 7240㎞에 이르는 수로에는 도시와 도시를 연결하는 여객선과 화물선이 정기적으로 다닌다. 동부의 치타공, 서쪽의 차루나가 크고 주요한 항구이고 다카와 바리살, 나라양간지 등에는 큰 하항(河港)이 있다. 이들 항구는 수로로 연결돼 있다.


강과 바다는 끊어질 수 없는 ‘불이(不二)’다. 강은 끊임없이 범람하며 물줄기를 바꾸었고, 그에 따라 왕국과 도시 그리고 역사가 바뀌었다. 맹그로브 홍수림이 존재함으로써 인간 영역과 자연 영역이 구분됐고 뭍과 바다의 완충지가 확보됐다. 인간은 강뿐 아니라 좁은 수로를 이용해 열대우림 깊숙이까지 문명의 씨앗을 뿌렸다. 따라서 물에 의존해 살아온 벵골만의 장엄한 ‘액체의 역사’를 이방인이 손쉽게 재단할 수도, 재단해서도 안 될 것이다.


이곳 역시 초기 문명은 불교 혹은 힌두교 영향권이다. 8세기 중엽 북방에서 내려온 팔라 왕조가 세워졌고 불교가 번영했다. 투르크족 침략으로 가우르(Gaur) 왕조가 설립되었고 이후 이슬람이 확산했다. 벵골만의 힌두와 불교 왕국은 마침내 이슬람으로 바뀌어 오늘에 이른다.


힌두교·불교·이슬람·기독교 번갈아 지배 방글라데시는 무슬림의 나라로만 알려져 있으나 실상은 그렇지도 않다. 이곳 역시 힌두와 불교의 땅이었다. 다카 시내의 그냥 ‘다카 사원’(1888년 창건)이라고 이름 붙인 사찰을 찾아갔다.


“이 사원 건너편, 길 건너의 산이 온통 불교 사적이지요. 다카 시내 곳곳도 대부분 불교 사원 터로 보면 틀림없어요. 자주 탄압을 받곤 하지요. 수년 전에도 무슬림이 들이닥쳐 불상을 부수었지요.”


이슬람에 의한 불교 탄압이다. 이는 치타공에서 최초의 포르투갈 포교지인 플라시드(Placid) 성당이 훼손되는 것과 같다. 아하, 이곳에서는 불교와 기독교가 모두 탄압받는구나. 세계사적으로는 이슬람이 기독교에 의해 탄압받는 경우도 많은데 탄압과 종교전쟁의 역사는 역사적·지리적 조건에 따라 이처럼 복합적·중층적인 것.


다카에는 국가 사원으로 지정된 천년을 뛰어넘는 다케스와리(Dhakeswari) 힌두사원, 벵골의 실력자였던 후세인 사(1493~1519)와 연결되는 후세인 달란 이슬람사원(1642년 건립) 등이 병렬로 존재한다. 무굴제국에서 세운 랄바그 요새(1677년 건립 시작)를 찾아가니 박물관에는 이슬람 도자기와 타일, 중국 도자기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었다.


벵골만은 오늘날처럼 인도·방글라데시 등으로 갈라진 국민국가 영역이 아니라 ‘하나’의 문명권이다. 벵골인에게 벵골(bengal) 혹은 방글라데시(bangladesh), 방가데시(bangadesh)는 역사적으로 자신들의 고향을 일컫는 같은 표현일 뿐이다. 벵골은 고전 서사시 ‘마하바라타’에 등장할 정도로 오랜 명칭. 유엔 통계에 따르면 벵골 모어권은 영어·스페인어·힌두어·러시아어·중국어 다음으로 세계 6위다. 무려 2억5000만 명이 벵골어를 쓰며 이들은 주로 방글라데시와 서벵골주·아삼주 등 인도 여러 곳에 거주한다. 2억5000만 인구가 강과 수로와 바다로 얽혀져 하나의 거대 문명으로 존속해온 것. 적어도 분리 독립의 불씨가 마련된 1911년, 국제정치적으로는 완전 독립이 이뤄진 1947년까지는 ‘하나’였을 뿐이다.


다카에서 치타공까지도 비행기를 타고 이동했다. 육상 통로는 가깝지만 이 지역 또한 도로 사정이 호락호락하지 않아서다. 시간만 충분하다면야 수로를 통해 연락선으로 오갈 수 있다. 치타공은 일명 힐이라 부르는 구릉과 산이 길게 연결되는 해안으로 이어진다. 치타공은 벵골만에서 카르나풀리강을 약간 거슬러 올라간 곳에 있는 항만 도시. 중국이 산맥을 넘어와 바다로 나가는 ‘일대일로(一帶一路)’의 한 출구이기도 하다. 예전부터 아랍·포르투갈의 선박이 기항한 벵골만의 양항이다.


벵골만의 양항 치타공선 마구잡이 어획 먼저 어선들이 하역하는 카르나풀리 강변으로 갔다. 바다와 만나는 하구에서 중선들이 줄지어 정박해 있고 맨발의 어부들이 그물을 다듬거나 고기를 퍼낸다. 작은 씨알까지 모조리 잡아들인다. 벵골만은 해양생물의 요람이기도 한데 어떠한 통제도 없는 가운데 이렇게 마구잡이 어획이 횡행하고 있다.


벵골만에서 잡아들인 것들은 수레에 실려 2㎞ 정도 떨어진 수산시장으로 옮겨진다. 완벽하게 사람의 힘으로 해결한다. 자동차 이동은 인력이 남아도는 이 동네에서는 필요치 않다. 배마다 젊은 인력이 가득 차 있다. 떨어진 고기를 줍는 꼬마들의 손길이 분주하다. 당연히 맨발이다. 점심이나 먹었을까. 애처롭게 보이지만 눈망울은 초롱초롱하다. 어린 물고기와 소년노동이 요동치는 바다에서 조금 떨어진 공장에서는 아이들이 국제축구연맹(FIFA) 축구공을 꿰매고 명품 브랜드를 달고 나가는 주문생산품을 만들고 있을 것이다.


포르투갈이 인도 고아에 당도한 1510년, 그곳 말고도 몇 개의 항구 거점을 설정했다. 치타공도 그때부터(1517년) 서구 세계를 향해 문을 열었다. 1534년 고아 총독은 배 5척, 200여 명의 군대를 보내어 치타공을 거점으로 벵골과의 무역을 도모했다. 그때 최초로 정착촌이 만들어진다. 당연히 향료 중에서도 후추 무역이 돈벌이가 됐다. 포르투갈 이후에는 네덜란드·영국이 들어왔다. 네덜란드는 17세기 말까지 포르투갈을 대체했다. 그러나 1623년 인도네시아 말루쿠 암본에서 네덜란드 동인도회사(VOC)에 의한 영국 무역상인 살해사건이 벌어지자 영국은 말루쿠에서 철수한다. 그 대신 네덜란드는 벵골에서 손을 뗐다. 이로써 벵골만은 ‘대영제국의 바다’가 된다. 고대 이래로 북방 대륙세력이 지배하던 치타공은 1299년부터 무슬림의 지배를 받았으며 16세기에는 남쪽에서 치고 올라온 해양세력의 판도로 넘어갔다.


플라시드 성당을 찾았다. 철문이 굳게 닫혀 있다. 이슬람의 습격이 몇 번 있었기에 신분 확인을 하고 들여보낸다. 제국의 전령으로 다가왔던 성당이 이제는 이슬람에 포위된 형국이다. 방글라데시는 인도네시아·파키스탄·인도에 이어 무슬림 인구 세계 4위다. 치타공의 복잡하고 매연 가득한 시내를 조금만 벗어나면 일명 힐이라 부르는 구릉과 산이 연이어진다. 힐에 깊숙이 들어가면 다양한 소수민족이 살고 있다. 치타공에 민족학박물관을 만든 것도 그만큼 소수민족 문제가 복잡하다는 증거. 10여 개의 소수민족이 살아온 치타공 구릉지대는 정치적 긴장이 계속되고 있다. 소수민족인 줌마족의 경우 박해를 받고 있어 한국에도 이들 일부 줌마족 출신 이주노동자가 저항운동을 펼치는 중이다. 치타공 남쪽으로는 미얀마의 박해받는 무슬림 로힝야족 난민이 다수 유입되고 있다. 그런데 같은 무슬림 중에서도 자국의 소수민족 무슬림 차별이 존재한다.


값싼 노동력으로 항공모함도 해체 정작 방글라데시 자체는 엄청난 차별과 비극을 겪은 나라다. 독립을 쟁취하기 위한 동벵골인의 고난과 비극을 다룬 영화 ‘칠드런 오브 워(Children of war)’가 얼마 전 한국에 소개됐다. 1970년 총선에서 파키스탄 집권당은 동파키스탄 벵골인 중심의 아와미당에 참패하지만 정권이양을 거부한다. 이듬해 동파키스탄은 독립을 선언하고 서파키스탄 무장병력은 무자비한 학살을 자행한다. 수용소 여성들은 집단강간과 살해를 당한다. 9개월여의 끔찍한 학살의 기억이 영화에 펼쳐진다. 치타공 국립박물관에는 그날의 학살과 고통에 대한 역사적 전시물이 차고 넘친다. 수많은 무슬림이 벵골로 넘어왔고 힌두교도가 인도로 넘어갔다. 종족과 종교 문제로 차별과 시련을 겪은 나라에서 정작 탄압을 가하는 이중적 역할도 하고 있다. 온갖 문명을 녹여내던 지난 ‘용광로’의 역사를 다시 이어갈 전망은 없을까.


치타공을 떠나기 전 선박해체장을 찾았다. 경비원들의 철통경비. 갯벌 위에 배들이 떠 있다. 크루즈·벌크선·여객선·군함, 심지어 항공모함까지 이곳에서 해체된다. ‘배들의 무덤’이다. 값싼 노동력이 없다면 선박 해체는 꿈도 못 꾼다. 엄청난 공해 발생을 감당할 수 있는 나라도 거의 없다. 세계는 이처럼 방글라데시를 이용하고 차별한다. 그러면서도 방글라데시 자신도 이용과 차별에 몰두한다. 인류문명은 이처럼 복잡하고 고단한 것이다. 이로써 ‘양곤-라카윈-콜카타-다카-치타공’에 이르는 벵골만 탐사를 ‘배들의 무덤’에서 마무리한다. 이제 스파이스 루트, 곧 ‘향료의 길’을 찾아 떠날 시간이다.


다음 회에는 스파이스 루트(향료의 길)-上-수마트라·자바·발리, -下-술라웨시·말루쿠 편이 게재됩니다.


 


 


주강현 아시아퍼시픽해양문화연구원장?asiabada@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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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연구원 전력발전연구부ㆍ군비통제센터를 거쳐 1994년 중앙일보에 입사한 국내 첫 군사전문기자다. 국방부를 출입한 뒤 최장수 국방부 대변인(2010~2016년)으로 활동했다. 현재는 군사안보전문기자 겸 논설위원으로 한반도 군사와 안보문제를 깊게 파헤치는 글을 쓰고 있다.

박용한 연구위원 : park.yonghan@joongang.co.kr (02-751-5516)
‘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