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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고한 고집으로 빚은 사운드


요즘 전철 안에서 사람들이 서로 눈을 마주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각자의 손에 들린 스마트폰 화면에만 시선을 고정시킨 때문이다. 가끔 차창 밖 풍경을 보는 이들도 있긴 하다. 그들 또한 스마트폰에 이어폰을 꽂고 음악을 듣는 중이다. 서로 약속이나 한 듯 똑같은 속박의 행동은 시대의 풍경으로 자리 잡았다.


스마트피아에선 접속하면 어떤 음악이든 구할 수 있다. 제 스마트폰에 수백 수천 곡이 담겼다는 자랑에 이젠 놀라지 않는다. 늘어난 음악의 양과 종류는 화려한 뷔페식당의 메뉴 마냥 산만하다. 배만 부르고 먹어도 먹은 것 같지 않은 뷔페음식 아니던가. 넘치는 음악도 매한가지다. 들어도 들은 것 같지 않은 소리의 성찬은 요란하기만 하다.


넘치면 외려 모자람만 못하다. 좋은 선택은 어렵고 감동의 깊이는 엷어지지 않던가. 어설픈 음악 취향으로 선택된 잡다한 곡들은 스쳐버리는 거리의 간판 같다. 어느새 감당하지 못할 만큼 불어난 음악의 양은 결정 장애의 당혹감만 키운다. 모아놓은 음악이 자신의 취향이라 말하면 곤란하다.


단순히 좋아서, 아름답기 때문에 선택된 음악의 감동이란 지속되는 법이 없다. 취향이란 아름다움의 선호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진정 좋은 것을 판별해 내는 능력이 제대로 된 취향이다. 좋은 것은 쉽게 다가오는 법이 없다. 돈과 시간, 노력을 들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세계. 반복된 연마의 과정을 통해서만 아름다움의 판별능력이 키워진다. 좋은 것이 아니라면 시간을 허비할 이유가 없다. 들어야 할 음악은 널리고 널렸다. 좋은 음악만으로 일상을 채우기에도 시간은 언제나 모자란다. 진한 울림으로 마음을 흔들지 못하는 음악은 모두 소음이다.


CD나 LP를 사는 이들은 거의 사라졌다. 전 세계 공통으로 벌어지고 있는 일이다. 런던의 재즈 음반 전문점마저 4~5곳만 남고 사라졌을 정도라 한다.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실물 음반은 이제 극소수 음악 매니어들의 전유물로 바뀌었다. 음반이 사라진 일은 새로운 변화의 모습일 수도 있겠다. 더 많은 사람들이 쉽고 편하게 음악을 듣게 되었으니까.


급격한 변화 앞에 저항하는 사람들도 있게 마련이다. 음악을 듣는 태도와 방식을 소중히 여기는 부류다. 이들은 음악 감상이란 음반을 연주하는 행위로 여기고 있다. 팔리지 않는 음반을 만들고 이를 사주는 이들이 여전히 남아있는 이유다. 좋은 음악의 위안과 감동을 소중히 여겨야 옳다. 진지하게 음악을 듣는 이들의 속마음은 하나다. 소음과 쓰레기로 변하지 않을 진정 좋은 것만을 간직하고 싶은 기대다.


ECM의 또다른 이름, ‘만프레드 아이허’ECM은 좋은 음악의 기대를 충족시키는 독특한 음반사다. 47년을 이어온 마이너 레이블로 독일 뮌헨에 근거지를 두고 있다. 사장인 만프레드 아이허를 빼고 ECM을 말할 수 없다. ECM은 곧 ‘만프레드 아이허의 분신’인 덕분이다. 음반 쇠퇴기에 거대 자본에 편입되지 않고 살아남은 저력은 대단하다. 뚝심과 고집으로 좋은 음악만을 고집하는 ECM은 시대의 신화로 우뚝하다.


2013년 우리나라를 찾은 만프레드 아이허를 만난 적이 있다. 강직하고 올곧은 성품의 소유자임을 단박에 알겠다. 평생 음반 만드는 일을 해 온 노신사는 겸손했다. “음악을 좋아하고 다른 사람에게 소개해 주고 싶은 음반을 만드는 일 밖에 할 줄 아는 것이 없다.” 말은 진심이었다. 지나온 시간이 이미 검증했을 테니까.


ECM은 지금까지 1500종이 넘는 음반을 펴냈다. 재즈와 현대음악, 클래식을 넘나드는 무정형의 구색이 특색이다. 하나같이 시대를 뛰어넘는 좋은 음악들로 인정받고 있다. 고집불통의 독재라고 해도 좋을 만프레드 아이허의 운영방식이 만들어낸 성과이기도 하다. 음악의 기교와 시대적 구분은 중요하지 않다. 장르를 뛰어넘는 음악 자체의 힘만이 관심인 것이다. ECM이 들려주는 음악은 곧 현대 음악의 집합이다.


시대에 통용되는 음악이라면 나라와 인종, 형식을 뛰어넘어 수용한다. 세계 음악 판에 제대로 등장한 적 없는 아르메니아?튀니지?리비아?이란…. 낯선 뮤지션들을 친숙하게 다가오게 한 포용력은 ECM 이전엔 없었다. 최근엔 우리나라 음악가들의 작업도 몇 장 추가됐다.


ECM의 음악은 하나같이 투명하고 깔끔하다. 연주 현장의 공기 입자까지 느껴지는 정밀한 음향 효과 덕분이다. 이는 녹음 엔지니어의 역할이 아니다. 같은 사람이 다른 레이블에서 낸 음반에선 전혀 다른 소리로 바뀌는 것에서 알 수 있다. 침묵 다음으로 가장 아름다운 소리를 원했던 만프레드 아이허가 만들어낸 음악 어법이기도 하다.


ECM의 CD를 틀 때 주의할 점이 있다. 처음 4~5초간 아무 소리가 들리지 않아도 당황하지 말 것. 고장이 아니다. 침묵의 시간을 거쳐야만 비로소 음악이 번져 나온다. 차렷! 구령마냥 잠시 숨을 고르고 집중하라는 뜻일 것이다. 멈추어야 비로소 보이는 감흥의 고조 장치는 매력적이다. 과연! 감탄은 나만의 혼잣말이 아니다.


음악을 눈으로 듣게 하는 앨범 표지 디자인독특한 재킷 디자인은 음악보다 더 유명해졌다. 글자만으로 구성하거나 흔들리듯 찍힌 몽환적 사진 아니면 현대회화로 표지를 채웠다. 특정 회사의 자동차는 엠블렘이나 전면 그릴만 봐도 단번에 안다. ECM 또한 복잡하게 섞여있는 음반 더미 속에서도 바로 눈에 띈다. 어느 것 하나 버리기 어려운 높은 작품성은 예술품처럼 기품 있다. 음악을 눈으로 듣는다 할까. ECM의 멋진 표지만 보고 음반을 사게 되었다는 이들은 전 세계에 널렸다.


표지 디자인에 시선을 멈추면 음악의 분위기가 떠오른다. 조심스레 재킷을 열고 CD를 꺼내 플레이어에 집어넣는다. 눈에 스치는 묵직한 톤의 사진과 라이너노트의 글자들이 음악으로 유도된다. 저절로 음악의 기대가 커지는 효과를 낸다. 시각적 연상이 음악의 분위기로 녹아드는 것이다. 음악이 들리면 거꾸로 이미지가 몽롱하게 떠다닌다. 이것은 분명히 환각이다. ECM말고 이런 체험을 하게 해준 레이블은 없다.


세상의 평가는 한 쪽에만 치우치지 않는다. 싫어하는 이들도 많다. 하지만 만프레드 아이허에게 타협의 몸짓은 없다. 더 좋은 음악을 전달하기 위한 선택은 원칙을 고집할 때 빛난다. ECM은 차갑고 묵직하다. 정서의 이완을 위해 듣는 음악마저 긴장하고 들어야 한다. 완고한 형식의 고집 때문일 것이다.


좋아하는 인테리어 디자이너 마영범의 사무실에서 ECM의 ‘닐스 페터 몰베르’를 들었다. 전율이 일었다. 차갑고 선명한 그러나 거대한 파도와 같은 울림이었다. 음악을 진정으로 좋아하는 출판사 대표 정상준의 차 속에선 ‘아르보 페르트’를 들었다. 순도 높은 피아노의 음색이 너무 아름다워 슬픔이 뚝뚝 묻어났다. 건축가 승효상의 이로재에서 들었던 ‘힐리아드 앙상블’은 하늘의 소리가 땅에 퍼지는 듯했다. ECM의 음악을 듣는 이들은 묘한 공통점이 있다. 딴 짓하지 않고 묵묵히 제 갈 길을 가고 있는 모습이다. ●


 


 


윤광준 ?글 쓰는 사진가. 일상의 소소함에서 재미와 가치를 찾고, 좋은 것을 볼 줄 아는안목이 즐거운 삶의 바탕이란 지론을 펼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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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