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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당 23세 최연소 정치국원 자리에 오른 런비스

2 장정 도중 허룽(왼쪽 첫 번째), 관샹잉(關向應·오른쪽 두 번째) 왕쩐(王震·앉은 사람) 등과 함께 한 런비스(맨 오른쪽). 1935년 8월, 후난(湖南)성 펑( )현. [사진 김명호]


한 독자의 부탁을 소개한다. “런비스(任弼時·임필시)는 너무 생소한 이름이다. 복잡하더라도 배경 설명이 있었으면 좋겠다.”


1925년 7월 1일, 쑨원(孫文·손문) 사망 4개월 후 국민정부가 정식으로 출범했다. 왕징웨이(汪精衛·왕정위)는 자타가 인정하는 쑨원의 후계자였다. 상무위원회 주석과 군사위원회 주석, 선전부장까지 독차지했다. 다음날 열린 경축행사에서 북벌(北伐)을 선언했다. “쑨원 총리의 유지는 신성하다. 우리의 첫 번째 임무는 북벌이다. 중국의 통일이다.”


왕징웨이는 공맹(孔孟) 사상의 추종자였다. 공손하고 관대했지만, 심약하고, 서생 기질이 농후했다. 살벌한 시대의 지도자 감은 못됐다. 당을 장악하자 군의 실력자 장제스(蔣介石·장개석)와 각을 세웠다.


2개월 후, 장제스가 혁명 근거지 광저우(廣州)의 해군을 탈취했다. 이어서, 국민당 제1군에 소속된 공산당원들을 숙청했다. 국민당 최정예 1군을 장악한 장제스는 공산당과 결별했다. 왕징웨이는 쑨원의 정책을 견지했다. “소련과 연합해 공산당과 손잡고, 노동자와 함께한다.”


군을 움켜쥔 장제스는 왕징웨이를 압박했다. 왕징웨이는 맞설 자신이 없었다. 프랑스로 떠났다. “정치 지도자라는 사람이, 하루 이틀도 아니고, 외국에만 머물려 한다”는 비난이 일자 귀국을 서둘렀다. 열차 편으로 소련을 경유했다. 스탈린은 국민당 좌파의 영수를 환대했다. 접견은 물론, 같이 밥 먹고, 술 마시고, 춤추고 노래했다.


스탈린의 지지를 확신한 왕징웨이는 27년 4월 2일, 귀국과 동시에 우한(武漢)의 국민정부 주석에 취임했다. “국·공연합을 성사시킨 쑨원의 유지를 배신했다”며 장제스에게 도전했다. 공산당 대표 천두슈(陳獨秀·진독수)와 연합을 선언해 버렸다.


“무산계급 독재는 각국 공산당의 가장 중요한 강령이다. 러시아는 실현했지만, 식민지나 반 식민지는 아직도 요원하다. 국민혁명의 추세로 볼 때 현재는 말할 것도 없고, 앞으로도 발생 가능성이 전무하다.”

1 항일전쟁 시절의 마오쩌둥(왼쪽 여섯 번째)과 런비스(왼쪽 다섯 번째). 1941년 1월, 옌안 비행장.


장제스는 분노했다. 4월 12일, 상하이에서 정변을 일으켰다. 공산당원과 노동운동 지도자들의 목이 낙엽처럼 떨어졌다. 공산당은 장제스가 혁명 민중을 도살했다는 성명(蔣介石屠殺革命民衆宣言)을 냈다. 농민혁명과 국민혁명은 불가분의 관계라는 비장감 넘치는 내용이었다.


“중국인구 100명 중 80명이 농민이다. 농민혁명을 가볍게 여기면 혁명적 민주주의 정권의 건립은 불가능하다. 그간 국민혁명군이 가는 곳마다, 산발적이나마 농민운동의 불길이 타올랐다. 국민정부는 수천 년간 고통 받은 농민들의 처지를 근본적으로 해결해야 한다. 그러지 못하면 누구도 앞날을 보장 못한다.”


이때 마오쩌둥(毛澤東·모택동)은 고향에서 농민들을 규합해 무장폭동을 준비 중이었다. 선언문을 보자 두 눈이 번쩍했다. 평소 자신의 생각과 별 차이가 없었다.


공산당은 우한의 왕징웨이에게 기대를 걸었다. 각지에 지도원을 파견해 무장 투쟁을 준비하며 왕징웨이를 부추겼다. 상하이에서 청년 운동을 지도하던 런비스도 천충잉(陳琮英·진종영)과 함께 우한으로 거처를 옮겼다. 지기(知己) 허룽(賀龍·하룡)을 내세워 왕징웨이와 접촉했다.


난징(南京)에 국민정부를 수립한 장제스는 국민당 원로 후한민(胡漢民·호한민)에게 주석 직을 제의했다. 후한민은 소문난 반공주의자였다. 거절할 리가 없었다. 난징과 우한에 두 개의 국민당 정부가 들어선 꼴이 됐지만 장제스는 동요하지 않았다. 중앙군사위원회 주석과 국민혁명군 총사령관을 겸했다. 국민당 좌파와 공산당원 193명에게 수배령을 내렸다.


이 와중에 우한에 온 런비스는 중국 공산당 5차 대회에 참석했다. 이어서 공산주의청년단(공청) 4차대회가 열렸다. 중앙 총서기는 런비스에 필적할 만한 사람이 없었다.


왕징웨이는 오래가지 못했다. 광둥(廣東)·저장(浙江)·안후이(安徽)·푸젠(福建)이 공산당에게 무력을 행사하고 장시(江西)성마저 동요하자 기세가 꺾였다. 장제스가 내민 손을 거절하지 않았다. 공산당과 선을 그었다. 장제스 못지않게 공산당원과 노조 지도자를 도살했다.


권력의 세계에서 연합이나 합작처럼 허망한 것도 없다. 장제스와 왕징웨이의 합작도 오래가지 못했다. 사사건건 충돌했다. 두 사람 모두 하야하는 것 외에는 해결할 방법이 없었다. 장제스와 후한민이 하야하자 왕징웨이도 은퇴를 선언했다. 호화 여객선을 타고 프랑스로 향했다. 장제스는 왕징웨이와 달랐다. 햐야는 했지만, 중국을 떠나지 않았다. 군권을 틀어쥐고, 눈만 뜨면 쑹메이링(宋美齡·송미령) 뒤만 따라다녔다.


공산당은 당황했다. 8월 7일, 한커우(漢口·현재의 우한)에서 긴급 회의를 열었다. 런비스는 마오쩌둥의 농민폭동을 지지하고 7년간 당을 이끌어 온 천두슈의 제명을 제안했다. 8·7회의는 중공의 방향을 수정한 회의였다. 마지막 날 런비스는 정치국에 진입했다. 23세, 중공 역사상 최연소 정치국원이었다. 회의를 마친 런비스는 폭동 상황을 둘러보기 위해 고향 후난(湖南)으로 향했다. <계속>


 


김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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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연구원 전력발전연구부ㆍ군비통제센터를 거쳐 1994년 중앙일보에 입사한 국내 첫 군사전문기자다. 국방부를 출입한 뒤 최장수 국방부 대변인(2010~2016년)으로 활동했다. 현재는 군사안보전문기자 겸 논설위원으로 한반도 군사와 안보문제를 깊게 파헤치는 글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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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