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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사를 지우고 싶은 영조, 탕평을 제안하다

① 조문명 초상 조문명은 소론 탕평파로서 그의 딸은 영조의 장남 효장세자의 부인이 되었으나 효장세자가 요절하면서 왕비가 되지 못했다.② 영조의 탕평비 성균관대 안에 세워졌다. ‘두루 화친하되 편당하지 않는 것이 군자의 공심이고, 편당하며 두루 화친하지 못하는 것이 소인의 사의이다(周而弗比 乃君子之公心 比而弗周 寔小人之私意)’라는 『예기』의 구절을 새겨놓았다. 사진가 권태균

윤지의 벽서로 시작된 나주벽서사건은 토역경과사건과 맞물리면서 탕평책을 완전히 붕괴시키고 노론 일당 독주 체제를 만들었다. 우승우(한국화가)


 


【총평】


? 탕평(蕩平)은 “서경”에 나오는 말로 임금의 정치가 어느 한쪽을 편들지 않고 사심이 없으며 당을 이루지도 않는 상태에 이르는 것을 의미한다.?


? 숙종은 왕권을 안정시키기 위해 붕당을 자주 교체했다. 숙종은 인사 관리를 통해 붕당 간의 세력 균형을 유지하려는 탕평론을 제시했지만, 실제로는 한 당파에 치우치는 인사 관리를 하면서 붕당 간의 세력 균형이 무너지고 왕권 자체도 불안해지는 결과를 낳았다. 이에 강력한 왕권을 확립하고 국왕이 정치의 중심에 서서 세력 균형을 유지하려는 탕평론이 등장하게 되었다.


? 붕당 간의 세력 다툼이 왕위 계승 문제 및 왕권의 정통성까지 위협하자 영조는 탕평론을 내세우면서 국왕 중심의 정국 운영을 시도했다. 붕당의 폐해를 경험한 영조는 탕평책으로 붕당의 폐해를 극복하려 했다. 영조는 즉위 초 탕평 교서를 발표하고 노론뿐만 아니라 소론 세력도 등용했다. 그는 붕당을 없애자는 입장에 동의하는 탕평파를 중심으로 정국을 운영했다.


? 영조는 각 붕당의 사상적 지주였던 산림의 존재 부정했다. 그는 공론의 주재자로 인식되던 재야 산림을 정치권에서 배제했다. 또한 서원이 분쟁을 유발하는 붕당의 근거지가 되어 정국을 혼란시키는 요인이 된다고 판단하여 170여 곳의 서원을 정리했다. 아울러 붕당의 이익을 대변하던 이조 전랑의 후임자 천거권과 3사 관리 선발 관행을 혁파했다. 1742년 영조는 탕평책으로 왕권이 강화되고, 정국이 안정되자, 탕평비를 건립하여 붕당의 폐해에 대한 경계의 뜻을 분명히 했다. 비의 건립 장소로 성균관을 택하여 미래의 정치 주역에게 탕평책을 지속하겠다는 의지를 강하게 표현했다. 비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원만해 편벽되지 않음은 곧 군자의 공정한 마음이고, 편벽해 원만하지 않음은 바로 소인의 사사로운 마음이다.”

탕평비(서울 종로 성균관대학교) /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왼쪽) 탕평비 전면탁본, 오른쪽) 탕평비 후면탁본 /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영조는 백성의 억울함을 풀어주고자 신문고를 다시 설치하고 궁 밖에 자주 행차했다. 또한 상언?격쟁을 통해 왕이 직접 백성의 의견을 들어 정책에 반영했다.


? 영조는 탕평 정치로 붕당의 폐해를 억제하고, 강화된 왕권을 바탕으로 백성을 위한 정책을 추진할 수 있었다. 그러나 탕평책으로 붕당 자체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또한, 탕평파를 자신의 외척으로 끌어들여 정국 안정을 도모한 탓에 척신 정치의 폐해가 나타나기도 했다.


?정조는 즉위 후 탕평책을 더욱 강화하여 왕권 강화를 시도했다. 정조는 적극적인 탕평책을 추진하여 영조 때의 척신과 환관 등을 제거했고, 권력에서 배제되었던 소론과 남인 계열 인사들을 중용했다. 그러나 정조는 영조의 탕평책이 탕평파를 중심으로 운영되면서 척신 세력을 키우는 폐해를 낳았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정조는 당파를 없애기 보다는 주장하는 의견이 당론이라 해도 그 말이 옳으면 받아들이는 탕평책을 추진했다. 노론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소론과 남인 계열을 중용하여 권력이 특정 붕당에 치우치는 것을 막았다. 또 붕당의 비대화를 막고 자신의 권력과 정책을 뒷받침하기 위해 새로운 인물이나 중.하급 관리 가운데 유능한 인사를 재교육하는 초계문신 제도를 시행했다.


? 탕평 정치는 국가의 이익보다 자기 이익을 앞세우던 붕당을 억누르고 민생을 중시하였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며 개혁적이었다. 특히 영조와 정조 때의 안정과 개혁은 새로운 계층의 성장을 자극하여 사회의 발전을 촉진하였다는 데 역사적 의의가 있다. 그러나 이러한 발전은 정치 체제의 변화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국왕 개인의 능력에 의존한 것이었다. 오히려 이 시기 왕권이 강화되면서 정치 권력이 왕과 소수 정치 집단에 집중되는 현상이 나타났다. 그리하여 유능한 군주가 왕위를 계승하지 못하면 강화된 왕권이 일부 정치 세력의 손에 좌우될 위험성이 잠재되어 있었다. 이는 정조가 죽고 난 후 세도 정치의 출현으로 현실화되었다.


 




【예상 문제】


1. 다음 가상 대화가 있었던 시기의 국왕이 추진한 정책으로 옳은 것은?



① ?국왕의 친위 부대인 장용영을 육성하였다.


② ?민생 안정을 위하여 균역법을 시행하였다.


③ ?금위영을 설치하여 5군영 체제를 갖추었다.


④ ?세도 정치로 실추된 왕권을 회복하고자 하였다.


⑤ ?수령이 군현 단위의 향약을 직접 주관하게 하였다.

* 2011학년도 수능 13번


 


2. (가)에 들어갈 내용으로 옳은 것은?

왕은 붕당의 뿌리를 제거하기 위하여 서원을 대폭 정리하였다. 아울러 새로운 법전을 편찬하여 훈련도감을 비롯한 5군영과 비변사, 선혜청 등 여러 기구에 대한 규정을 체계화하였다. 또한 (가)
① ?척화비를 세우고 통상 거부 정책을 유지하였다.


② ?화성을 세워 정치적, 군사적 기능을 부여하였다.


③ ?수령이 군현 단위의 향약을 직접 주관하게 하였다.


④ ?이조 전랑에게 인정되었던 3사 관리의 선발 관행을 없앴다.


⑤ ?신공을 받을 수 없는 중앙 관청의 노비 수만 명을 해방시켰다.

* 2011학년도 6월 모의평가 5번


 


3.?다음은 어느 관리의 이력이다. (가)~(마)와 관련된 설명으로 적절하지 않은 것은?


영조 47년(1771) 진사시에 합격하다.? (가)


영조 49년(1773) 증광시에 급제하다.


정조 4년(1780) 홍문관 부교리가 되다. (나)


정조 5년(1781) 초계문신으로 발탁되다. (다)


정조 10년(1786) 승정원 좌승지가 되다.


정조 18년(1794) 사헌부 대사헌이 되다. (라)


정조 19년(1795) 공조 판서가 되다. (마)


순조 2년(1802) 영의정이 되다.


① ?(가) - 성균관에 입학할 수 있는 자격을 얻었다.


② ?(나) - 경연에 참가하여 정책을 토론하였다.


③ ?(다) - 왕의 뜻에 따라 규장각에서 재교육을 받았다.


④ ?(라) - 관리의 비리를 적발하여 탄핵하였다.


⑤ ?(마) - 비변사의 구성원이 되어 회의에 참여하였다.

* 2010학년도 수능 6번


 


4.?다음은 조선시대 어떤 왕과의 가상 인터뷰 내용이다. 이 왕이 추진한 정책으로 적절한 것은?



 


① ?붕당과 산림의 근거지인 서원을 대폭 정리하였다.


② ?예법 적용에서 왕실의 특수성을 고려하지 않은 서인을 배격하였다.


③ ?붕당을 없애자는 논리에 동의하는 탕평파를 중심으로 정국을 운영하였다.


④ ?인사 관리를 통해 한 당파를 일거에 내몰고 상대 당파에게 정권을 모두 맡겼다.


⑤ ?각 붕당이 내세우는 주장의 시비를 명백히 가리는 적극적인 탕평책을 실시하였다.

* 2009학년도 9월 모의평가 12번


 


5.?다음 글의 밑줄 친 ‘국왕’과 관련된 사실로 옳은 것은?

국왕은 붕당을 없애자는 논의에 동의하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정국을 운영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조 전랑이 삼사의 관리를 선발할 수 있게 해 주던 관행마저 없애버렸다. 그 결과 사색(四色)이 모두 진출하여 오직 벼슬만 할 뿐, 옛날부터 저마다 지켜 온 의리는 쓸모 없는 물건처럼 되었고, 사문(斯文 :? 유학)을 위한 시비(是非)와 국가에 대한 충역(忠逆)은 모두 과거의 일로 돌려 버렸다.
①? 소수의 세도 가문 출신이 중앙 정치를 주도했다.


②? 균역법을 실시하고 사형수에 대한 삼심제를 시행했다.


③? 『고금도서집성』을 수입하여 학문 정치의 기초를 다졌다.


④? 재정 수입 증대와 상공업 진흥을 위해 자유 상업을 허락했다.


⑤? 초계문신제를 실시하고 규장각을 강력한 정치 기구로 육성했다.

* 2008학년도 9월 모의평가 15번

* 36회 “절반의 성공 ② 영조” 편 문제 8


 


6.?밑줄 친 ‘왕’이 실시한 정책으로 옳은 것은?

왕은 행차 때면 길에 나온 백성들을 불러 직접 의견을 들었다. 또한 척신 세력을 제거하여 정치의 기강을 바로 잡았고, 당색을 가리지 않고 어진 이들을 모아 학문을 장려하였다. 침전에는 ‘탕탕평평실(蕩蕩平平室)’이라는 편액을 달았으며, “하나의 달빛이 땅 위의 모든 강물에 비치지 강물은 세상 사람들이요, 달은 태극이며 그 태극은 바로 나다.”라고 하였다.
① 병권 장악을 위해 금위영을 설치하였다.


② 왕권 강화를 위해 여러 붕당을 번갈아 등용하였다.


③ 능력 있는 신하들을 뽑아 스승의 입장에서 재교육시켰다.


④ 의정부의 권한을 강화하고 현명한 재상에게 정치를 맡겼다.


⑤ 백성이 억울한 사정을 호소할 수 있도록 신문고를 설치하였다.

* 2007학년도 수능 15번


 


7. ?다음 세 조치 모두에서 파악할 수 있는 국왕의 의도로 가장 적절한 것은?

임금이 전교(傳敎)를 쓰라고 명하셨다. …… 산림이 또 하나의 세력을 이루고 있어 만약 근원을 없애지 않으면 그 피해가 매우 심할 것으로 예상하였기 때문이다.임금이 “이미 법으로 정했는데도 조정에 알리지 않고 사사로이 건립한 서원과 사우는 모두 철거하도록 하라.”고 하교하였다.이조 전랑의 선발을 개혁하는 조치가 이루어졌다. 모두 9가지 내용인데, 그 첫째는 이조 전랑이 후임자를 천거하는 관례를 혁파한다는 것이었다.

- 조선왕조실록 -


 


① 훈구 세력의 향촌 사회 장악 시도를 막고자 하였다.


② 향리 세력과 지방 수령의 결탁을 견제하고자 하였다.


③ 지방 사족의 향촌 사회 영향력을 제거하고자 하였다.


④ 붕당 세력의 권력 기반과 결집력을 약화시키고자 하였다.


⑤ 세도 가문과 지방 사족 간의 연계 고리를 끊고자 하였다.

* 2006학년도 6월 모의평가 9번


 


8.?다음 사료에 나타나는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당시 국왕이 취한 정책으로 옳은 것은?


붕당의 폐해가 지금보다 심각한 적이 없었다. 처음에는 예법 문제로 분쟁이 일어나더니, 이제는 한쪽이 다른 쪽을 역적으로 몰아붙이고 있다. … (중략) … 우리나라는 땅이 좁고 인재도 그리 많은 것이 아닌데, 근래에 들어 인재를 등용할 때 같은 붕당의 인사들만 등용하려고 한다. 조정의 대신들이 서로 상대 당을 공격하면서 반역인가 아닌가로 문제를 집중하니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정책이 나오지 못하고, 정책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기 어렵다.

- 영조실록 -


①? 몇몇 세도 가문의 협력을 얻어 정국을 운영하였다.


②? 붕당을 혁파하고 근대적인 의회 정치를 추구하였다.


③ 산림(山林)을 등용하여 붕당 간의 균형을 도모하였다.


④? 비변사의 기능을 강화하여 붕당 간의 갈등을 완화하였다.


⑤? 정치에 적극 개입하여 탕평파를 중심으로 정국을 운영하였다.

* 2005학년도 9월 모의평가 19번

* 36회 “절반의 성공 ② 영조” 편 문제 9


 


【정답 및 해설】

해설 : 정답 ②
자료의 내용은 영조가 추진한 정책에 대한 내용이다.


② 영조는 민생 안정 위해 균역법을 실시했다. 균역법은 1년에 2필 이상 내던 포를 1년에 1필만 내도록 하는 정책이었다. 국가 재정의 부족분 해결을 위해 결작과 선무군관포를 징수하고, 어장세, 염세, 선박세를 부과했다.


<오답풀이>


① 장용영은 정조가 왕권 강화 위해 육성한 친위부대이다.


③ 금위영을 설치한 왕은 숙종이다.


④ 대원군과 관련된 내용이다.


⑤ 정조가 지방 사족의 권한을 약화시키기 위해 추진했던 정책이다.


 

해설 : 정답 ④
제시된 자료는 서원 정리에 대한 내용이다. 서원을 정리하고 비변사를 체계화 한 인물은 영조이다.


④ 영조는 이조 전랑의 권한을 약화시키기 위해 그들이 자신의 후임자를 천거하고, 3사의 관리를 선발할 수 있게 해 주던 관행을 없앴다. 이조 전랑의 후임자 천거권이 완전히 폐지된 것은 정도 때이다.


 

해설 : 정답 ⑤
⑤ 공조의 참판과 판서는 비변사에 참여하지 않았다. 비변사의 구성원은 임진왜란 이후 전.현직 정승, 공조를 제외한 5조 판서와 참판, 각 군영 대장, 강화 유수 등이었다.


 

해설 : 정답 ⑤
제시된 자료는 정조에 대한 내용이다.


⑤ 정조는 영조와 달리 의리와 명분을 강조하는 적극적인 탕평책을 실시했다.


<오답풀이>


① 서원을 대폭 정리한 왕은 영조이다.


② 예송에 대한 내용이며, 이는 현종 때의 일이다.


③ 영조의 탕평에 대한 내용이다.


④ 숙종대에 일어난 환국과 관련된 내용이다.


 

해설 : 정답 ②
제시된 자료에서 이조 전랑이 삼사의 관리를 선발할 수 있는 관행을 폐지한다는 내용을 통해 영조와 관련된 사료임을 알 수 있다. 이조 전랑의 삼사 관리 선발권은 숙종 때 폐지되었다. 여전히 남아 있던 관행을 영조가 폐지한 것이다.


 

해설 : 정답 ③
제시된 자료에서 밑줄 친 왕은 정조이다.


③ 정조는 신하들을 재교육하는 초계문신제를 시행했다.


 

해설 : 정답 ④
제시된 자료는 영조가 실시한 탕평책에 대한 내용이다.


④ 영조는 탕평파를 중심으로 정국을 운영하면서 제시된 자료에서 보이는 조치를 통해 붕당 세력의 권력 기반과 결집력을 약화시키고 모든 정치 권력을 왕에게 집중시켰다.


 

해설 : 정답 ⑤
제시된 자료는 붕당의 폐해가 심각해지면서 일당 전제화가 만연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⑤ 영조는 노론과 소론의 온건파에 해당하는 이들을 탕평파로 육성하여 이들을 중심으로 정국을 운영하여, 탕평책을 실시하고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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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연구원 전력발전연구부ㆍ군비통제센터를 거쳐 1994년 중앙일보에 입사한 국내 첫 군사전문기자다. 국방부를 출입한 뒤 최장수 국방부 대변인(2010~2016년)으로 활동했다. 현재는 군사안보전문기자 겸 논설위원으로 한반도 군사와 안보문제를 깊게 파헤치는 글을 쓰고 있다.

박용한 연구위원 : park.yonghan@joongang.co.kr (02-751-5516)
‘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