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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타지 연재소설] 판게아 - 롱고롱고의 노래[32] 그림의 방과 비난의 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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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의 눈동자에 수리가 담긴 순간, 그림이 그려졌다

폴리페서는 더욱 놀라운 일을 준비해놓았다. 그의 큰 덩치 뒤에 숨어있다가 슬며시 나타난 소녀는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웠다. 수리와 마루는 눈만 크게 뜬 채 어벙한 상태였고 모나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쯧쯧 남자들이란 하여간… 침 좀 닦아라. 이 남자들아.”

골리 쌤은 버럭 화를 내며 곁눈질로 소녀를 슬쩍슬쩍 훔쳐보았다.

“예쁘긴 하네.”

순간 수리·마루·모나가 골리 쌤을 동시에 째려봤다.

“알았어. 알았어. 기절할 정도로 예쁘네. 그나저나 사비야. 강력한 너의 라이벌이 나타난 것 같다.”

사비도 슬쩍 보더니 새초롬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뭐, 안 예쁘다고 할 순 없겠지만, 얼굴만 예쁘다고 여자인가요? 지성·인성… 이런 것들이 훨씬 더 중요한 거 아닐까요? 아마 수리도 그런 여자를 원할 거예요.”

골리 쌤은 수리와 사비를 번갈아 보며 쭈뼛거렸다.

“아닌 것 같은데…. 남자한테 여자는 그냥 예쁘면 게임 끝이야. 마치 썸에게 나의 존재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야. 썸은 나를 처음 보자마자 나의 미모에 말문이 막혔다고 했거든. 정신이 혼미해졌대.”

“이 아이는, 부모들로부터 버림받은 아이들만 사는 고독한 왕국의 화가다.”

폴리페서의 이상한 말에 아이들이 웅성거렸다. 화가라는 말을 믿을 수 없었다.

“태어날 때부터 그림을 잘 그렸지.”

“우리더러 그림이나 배우라는 얘기야?”

시선을 여전히 소녀를 향한 채 수리가 물었다.

“보통 그림이 아니지. 이 아이는 먼저 네가 본 숫자들을 그릴 거다.”

모나는 어리둥절해 했고 마루는 큭큭 웃었다.

“숫자들을 그려서 뭐하겠다는 거야? 1, 2, 3, 4 뭐 어쩐다는 거야?”

“숫자들은 바로 신비한 암호로 바뀔 것이고… 그 암호로 어떤 지도가 만들어지겠지? 설마 암호를 그냥 멍청한 암호라고 생각한 건 아니겠지? 수리?”

폴리페서는 자꾸 헛웃음을 지었다. 사비가 작은 소리로 말했다.

“롱고롱고가 이미 신비한 암호잖아? 그런데 그 암호가 어떻게 지도가 된다는 거야? 저 사람 좀 돈 것 같아.”

“그만!”

폴리페서가 고함을 질렀다.

“내가 눈은 안 보여도 귀는 꽤 잘 들리지. 그렇게 작은 소리로 웅웅거리지 말라고. 날 기만하는 거니까… 당장 죽일 수도 있으니까.”

폴리페서는 진짜 죽일 것처럼 으르렁거렸다.

“자, 시작해볼까?”

폴리페서의 말이 끝나자 뒤쪽에 일사불란하게 늘어서있던 누이들이 득달같이 달려와 사비와 마루, 모나를 결박했다. 모나는 빠르게 수리의 귓속에 아주 모기만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우리 전사는 아직 밖에 있다.”

다행히 이 소리는 폴리페서가 듣지 못한 듯했다.

“데려가라. 비난의 방으로.”

모두 수리를 쳐다보며 질질 끌려갔다. 홀로 남겨진 수리는 막중한 책임감을 느꼈다. 친구들의 생명이 자신에게 달려있었기 때문이다.

“자아…잘 봐둬라.”

폴리페서는 썸과 볼트, 리키니우스가 갇힌 작은 유리병을 다시 보여주었다.

“이들은 바다에 갇혀있지. 보이지? 이 험난한 파도? 이들을 꺼낼 방법은? 우하하하.”

폴리페서의 비열한 웃음은 끝날 줄 몰랐다.

수리는 폴리페서가 지능 높은 연쇄살인범일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타인에 대한 가학적인 집착과 폭력을 통해 즐거움을 획득하는 점은 먹잇감을 단박에 죽이는 동물들에게서는 찾아볼 수는 없으니까.

수리는 순간 폴더를 찾았다. 그제야 그 생각이 났다.

“폴더는?”

수리가 소리쳤다. 그러나 폴리페서는 답이 없었다.

“대단하지 않아? 이 피라미드를 보라고, 느껴봐. 이 피라미드의 비밀을 알아내려면 넌 아마 몇백만 년은 더 살아야 될 것이다.”

수리는 폴리페서를 노려보았다. 폴리페서는 폴더의 행방에 대답이 없었다.

“수리와 이 아이를 그림의 방으로 데려가라.”


보랏빛 눈을 가진 소녀 39호, 아메티스트

수리는 소녀와 둘이 마주 앉아 있었다. 수리는 소녀를 감히 쳐다보기도 힘들었다. 그 정도로 예뻤다. 믿기지 않을 정도로 예뻤다.

“날 쳐다보지 않으면, 난 그림을 그릴 수가 없어.”

수리는 비로소 소녀를 쳐다보았다. 소녀의 눈동자는 짙은 보랏빛으로 흔하지 않은 색깔이었다.

“너는 아무 말 할 필요 없어. 내 눈동자만 똑바로 쳐다보면 돼.”

그러나 수리는 소녀의 눈동자를 피했다.

“왜? 내가 무서워?”

소녀는 물었다. 수리는 보지 않은 채 대답했다.

“아니. 내가 너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면 다시는 너의 눈을 외면할 자신이 없고 그렇게 되면 나의 친구들이 죽임을 당할까 봐. 또 그렇게 되면 나의 아빠를 못 만나게 될까 봐.”

소녀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넌 내가 마치 마녀라도 되는 듯이 얘기하는구나.”

“마녀를 알아? 그건 책에나 나오는….”

“우리에게 마치 금서(禁書·금지된 책)처럼 몰래 전해져 내려오는 책이 있었어. ‘깊은 우물에 묻어둔 노래’라는 책이었지만 어느 날 사라지고 말았지.”

수리는 너무 놀라서 말을 잇지 못했다.

“그 책에 마녀의 이야기가 나와. 하지만 이 책은 우리처럼 버려진 아이들만 읽는 책이었어.”

“너희는 왜 버려진 거야?”

수리는 매우 조심스러웠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차츰 소녀의 보랏빛 눈동자로 시선을 옮기고 있었다.

“우리는 잘못 태어난 기계였거든.”

“기계라고?”

소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잘못 만들어진 기계라고 했어. 그래서 폐기처분된 거야. 그런데….”

수리는 침을 꿀꺽 삼켰다. 목이 탔다.

“우리들 중 비상한 재능을 가진 애들이 있었거든. 나처럼 그림을 그린다거나… 후후.”

“왜 웃어?”

수리는 머쓱했다.

“우리 꼭 친구 같아.”

수리는 잠시 말이 없었다. 그리고 곧 입을 열었다.

“친구 하면 되잖아?”

소녀는 큰 눈을 깜빡거리기만 했다. 소녀의 눈은 깜빡거릴 때마다 보랏빛 보석이라도 떨어질 듯 쿵 했다.

“그래. 아메티스트. 너의 눈동자를 닮은 보석의 이름이 생각났어. 아메티스트야.”

소녀는 웃는 얼굴이었지만 이내 시무룩해졌다.

“내 이름은 39호야.”

“39호? 그건 너무 삭막한데?”

수리가 너털웃음을 웃었다.

“아메티스트, 예쁘다.”

“난 너를 아메티스트라고 부를게. 귀족을 상징하는 귀한 보석이지.”

소녀는 환하게 웃었다.

“아메티스트.”

그때 갑자기 그림의 방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금속으로 만들어졌음이 분명했던 벽면은 어느새 우주가 보이는 투명한 창으로 바뀌어졌다.

“이제 그림을 그려야 해.”

“누가 감시라도 하는 거야? 혹시 폴리페서?”

소녀가 손가락으로 저 먼 우주를 가리켰다. 수리는 자세히 보고 또 보았다.

“말디아코르.”

“말디아코르?”

수리는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수많은 은하에 둘러싸인 은하의 찌를 듯한 눈을 보았기 때문이다.

“거역하면 우리는 저곳으로 보내져.”

“누가 사는데?”

“몰라. 다만….”

“빨리 말해봐.”

“우리의 몸이 그저 물체가 된다고 들었어. 이런 벽이 되고 저런 피라미드가 되고…그 이상은 나도 몰라.”

“무서워?”

“응… 나는 물체가 되기 싫어. 그냥 내가 되고 싶어.”

“자아. 아메티스트, 시작하자. 내가 본 것이 모두 다는 아니야. 하지만 어떤 그림이라도 나오겠지.”

수리와 아메티스트는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아메티스트는 수리의 얼굴로 바짝 다가왔다. 두 사람은 입술이 닿을 듯 가까웠다. 아메티스트의 눈동자는 드디어 수리의 눈동자와 부딪쳤다. 맞닿았다.

순간 수리는 아메티스트의 보랏빛 눈동자로 빨려들어갔다. 그 느낌은 편안했다. 영혼의 교류 같은 걸 느꼈다. 진정한 소통을 느꼈다.

소녀 아메티스트는 허공에 손을 휘저으며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소녀의 손짓에 따라 투명한 창으로 그림이 그려지기 시작했다.


비난의 방에 갇힌 친구들

사비와 마루, 모나는 고통에 몸부림치고 있었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온갖 비난의 소리를 듣고 있었다.

“거짓말쟁이.”

“사기꾼 같은 놈.”

“넌 태어나지 말았어야 해.”

“뚱뚱한 놈. 돼지 같은 놈.”

“넌 죽어야 해. 살 가치가 없어.”

“머리통이 텅텅 빈 놈. 앞으로 뭘 하려고?”

“이기적인 놈. 너밖에 모르니?”

“게임, 게임, 게임… 버러지.”

“버르장머리 없는 놈.”

“공부도 못하는 놈이 밥은 왜 먹어?”

“아빠를 내쫓은 사악한 것들.”

“친구를 죽음에 빠트린 놈.”

“자신의 전사들을 내팽개치고 혼자 도망친 놈.”

사비는 견딜 수가 없었다. 흑흑 흐느껴 울었다. 마루도 콧물을 훌쩍거렸다. 모나는 눈을 꾸욱 감고 있었다. 그의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때였다. 어디선가 노래가 들렸다. 가는 음성이었다. 하지만 너무나 아름다운 음성이었다. 사비는 스스로 무릎을 꿇었다. 작은 죄라도 회개하고 싶게 만드는 노래였다.

“잘못했어요, 잘못했어요….”

사비는 더욱더 흐느꼈다. 모나는 벌떡 일어났다.

“나비야. 나비라고…나비가 노래를 시작했어.”

모나는 무척 감격하고 있었다. 마루도 모나를 따라 벌떡 일어났다.

“나비가 노래를 시작했다면? 수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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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윤은 시인·소설가.
판게아 시리즈 1권 「시발바를 찾아서」,
2권 「마추픽추의 비밀」,
3권 「플래닛 아틀란티스」 를 썼다.

소년중앙에 연재하는 ‘롱고롱고의 노래’는
판게아 4번째 시리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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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한 연구위원 : park.yonghan@joongang.co.kr (02-751-5516)
‘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