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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의 유산] 서울대 나온다고 행복할까, 자녀에게 자유를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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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지원 변호사(오른쪽), 김영란 전 대법관



강지원 변호사와 김영란 전 대법관 부부

난 후회해요, 뭘 좋아하는지 고민 못한 걸
사회적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보수 적어도
자기 적성에 맞는 일을 하는 게 진짜 성공


첫째딸 수능 포기하고 둘째는 영화과 진학
자유도 책임도 아이 몫…둘 다 적성 찾아가
부모는 큰 방향만 잡아주고 참고 기다려야 



엘리트 코스를 밟고 모두가 선망하는 위치에 오른 부부가 있다. 강지원 변호사와 김영란 서강대 법학전문대학원 석좌교수다. 과장이 아니다. 두 사람은 누가 봐도 부러워할 만한 인생을 걸어 왔다. 강 변호사는 경기중·고를 졸업하고 서울대 정치학과에 진학해 제12회 행정고시 합격, 제18회 사법고시에 수석 합격했고, 김 교수는 경기여고를 거쳐 서울대 법학과에 진학해 제20회 사법고시에 통과하면서 법조계에 발을 들여놨다. 이후 각각 검사·변호사와 판사로 30년 넘게 일했고, 김 교수는 2004년 48세에 한국 최초 여성 대법관에 올랐다. 이들의 인생을 “실패했다”고 평할 사람은 대한민국에는 아마 없을 거다. 하지만 정작 본인들은 “성공한 삶이 아니다”고 말한다. 특히 강 변호사는 자신의 인생에 대해 “후회한다”고 잘라 말했다. 성공한 사람의 배부른 투정처럼 들리는 이 말의 의미는 뭘까. 답은 두 사람의 자녀교육법에서 찾을 수 있었다. 


우린 한 번도 공부하란 말 안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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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분당의 초등학교에서 찍은 사진. 첫째 딸이 5학년, 둘째 딸이 1학년 재학 당시.


“두 딸의 소속이나 이름은 밝히지 않기를 바랍니다.” 강지원(67) 변호사가 인터뷰에 응하면서 내놓은 조건이었다. 처음에는 난감했다. 자녀교육에 대한 인터뷰인데 자녀에 대해 밝히지 않으면 ‘속 빈 강정’이나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어지는 설명을 들으니 어느 정도 이해가 됐다. “두 딸이 부모의 지위나 유명세에 의존하지 않고 독립적으로 살기를 바란다”는 게 이유였다. 김영란(60) 교수는 남편보다 더했다. 기자가 보낸 질문서에 강 변호사가 답변을 단 것을 확인한 후, 혹시라도 아이들의 직업이나 학교와 관련해 조금이라도 실마리를 제공하는 내용이 있으면 과감히 삭제할 것을 요청했단다.

 두 딸은 부모와 생각이 다르지 않을까. 온 국민이 알 만한 유명한 부모를 뒀으면 여기저기 자랑하고 싶은 게 보통 사람의 심리일 테니 말이다. 하지만 두 딸도 부모와 닮았다. 2014년에 첫째 딸은 자신이 주최한 행사장에도 부모님이 방문하지 말 것을 정중히 부탁했다고 한다. 사람들이 알게 되면 자신에 대해 선입견을 갖게 될까 우려해서다. 자녀의 취업을 위해 부정 인사청탁을 서슴지 않는 유명 인사들의 소식이 심심치 않게 들려오는 요즘 참 보기 드문 가족이다.

 부부는 아이들을 자유롭게 키웠다. ‘자유’는 두 사람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다. 아이들에게 한 번도 ‘공부해라’ ‘서울대에 가라’ ‘법대에 진학하라’고 한 적이 없다. 두 딸이 그런 인생을 살기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엘리트 코스를 밟아 법조인이 됐지만, 그런 인생이 행복한지에 대해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되물었다. 결론은 ‘노’(No)였다. 사회적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보수가 적어도 자신의 적성에 맞는 일을 찾는 게 진정한 성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경기고-서울대-행정·사법고시 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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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지원 변호사가 생후 5개월 때 전남 완도 군수 관사 앞에서 찍은 가족사진. 강 변호사는 아버지가 초대 완도 군수로 부임한지 3개월 만에 태어났다.


‘자유롭게 자라야 한다’는 건 강 변호사가 부모님에게 물려받은 교육 철학이기도 하다. 그의 부모도 어린 시절부터 아이 스스로 고민하고 판단하게 했다. 하지만 딱 한 가지 예외가 있었는데, 바로 공부였다. 이는 집안 내력과 연관 있다. 강 변호사와 그의 형제들은 조선 전기 문인이자 세종대왕의 이질(아내의 자매 자녀)인 강희맹의 17대손이고, 조선 중기 학자이자 의병장인 강항의 12대손이었다. 아버지는 보성전문학교(현 고려대)를 졸업한 후 여러 지역에서 군수 등 공직을 맡았고, 어머니는 경성사범학교(현 서울대 사범대)를 졸업하고 젊은 시절 교편을 잡은 재원이었다.
 
 교육열이 높을 수밖에 없었다. 1949년 전남 완도에서 7남매 중 넷째이자, 삼남으로 태어난 그의 머릿속은 어려서부터 ‘학생의 본분은 공부’라는 인식이 박혀있었다. 넘치는 교육열만큼 학습에 대한 지원도 아낌없었다. 7남매 중 그를 포함해 5명이 서울대에 합격하고, 2명이 각각 이화여대와 숙명여대에 진학한 건 모두 부모의 남다른 교육열 덕분이었다.
 
  하지만 공부를 제외하고는 자녀들의 뜻을 최대한 존중했다. 강 변호사가 부모의 바람대로 법학과나 경영학과가 아니라 정치학과를 선택했을 때는 물론, 행정고시 합격 후 세관에 근무하면서 사법고시를 준비했을 때도 최종 선택은 강 변호사가 하게 도왔다. 그는 “남자들은 판사·의사·검사처럼 ‘사’ 자로 끝나는 직업을 가져야 출세한다고 인정받던 시절이었다”며 “형제들도 자연스레 고시공부를 시작했고, 적성에 대해 고민할 기회도 없이 뛰어들었다”고 말했다. 대학교 4학년 때 행정고시, 2년 후 사법고시에 합격한 이후 탄탄대로를 걸을 일만 남아 있었다. 모두가 원하는 그 길이 자신의 길이 아니라는 걸 알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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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 강 변호사의 서울대 입학식 모습. 부모님과 함께 대학 교정에서 기념 촬영을 했다.


중2병, 대학 중심 사회 때문에 생겨
 
그가 자신의 적성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한 건 1978년 초임검사 시절 비행 청소년 업무를 담당하면서부터다. 청소년들이 비행을 저지르는 가장 큰 이유가 하고 싶은 일을 못 하게 하고,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시키는 데서 비롯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 그와 대화를 나눈 청소년 중에는 “자신의 얘기를 끝까지 들어주는 사람은 처음”이라거나 “부모는 무조건 혼내기만 한다”는 학생들이 많았다. 어른들은 자기 생각을 아이들에게 강요하고, 마음대로 휘두르려고만 했다. 1989년에 서울보호관찰소 소장이 되면서 청소년 문제에 깊이 빠져들었다.

 이 과정에서 ‘적성 찾기’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적성은 어떤 일을 하기에 알맞은 소질이나 성격, 적응 능력 등을 말한다. 쉽게 말하면 자신이 하고 싶고, 잘하는 일이 적성에 맞는 일이다. 그는 검사로 일하는 내내 자신에게 맞는 일이 아니라고 느꼈고, 실제로 사법연수원에서 학생들을 가르칠 때도 “적성에 맞지도 않는데 남들이 우러러봐서, 돈을 많이 벌어서 이 직업을 선택한 사람은 나가라. 나 같은 사람이 되지 마라”는 말을 서슴없이 했다. 그는 내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때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을 거라 믿었다. 명문대에 합격하는 것은 물론, 돈·권력·명예·인기를 좇는 것보다 적성을 찾는 게 훨씬 더 의미 있는 일이라는 생각을 했다.

 -적성을 찾는 게 왜 중요한가.

 “대한민국에서 중·고등학교를 다니는 대부분 학생이 자신이 어떤 일을 하고 싶은지, 뭘 잘하는지 모른 채 대입만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99%가 대학 진학을 희망하고 실제로 70% 이상이 대학에 들어간다. 하지만 사람들은 행복하지 않다. 세계 1위 자살률이 이를 잘 보여준다. 경쟁 위주의 교육부터 바뀌어야 한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게 돕는 게 필요하다. 장래 희망이 축구선수·요리사·미용사·가수인 사람이 굳이 대학에 갈 필요가 있을까. 가수 ‘아이유’처럼 자신의 적성을 일찍 찾으면 굳이 대학에 가지 않더라도 본인의 역할을 해내는 게 충분히 가능하다. 축구선수가 되고 싶은 학생에게 ‘대학부터 가라’고 하면 엉덩이 붙이고 앉아서 공부가 되겠나. 하기 싫은 걸 억지로 시키니 탈이 날 수밖에 없다. 대부분의 청소년 문제나 중2병 등이 대학 중심의 사회 때문에 발생한다. 우리나라보다 선진국으로 알려진 독일이나 영국의 대학 진학률은 30~40%밖에 안 된다.”

 -자신에게 맞는 적성을 찾는 방법은.

 “사람에게 맞는 적성은 한 가지가 아니라 여러 가지다. 예컨대 자신이 좋아하는 분야에 대해 객관적으로 판단할 방법이 필요하다. 축구를 예로 들면 드리블, 경기 분석, 경기 운영, 기록 등의 목록을 만든 후 좋아하는 정도와 잘하는 정도에 대해 점수를 매겨 보는 식이다. 높은 점수가 겹치는 부분이 흥미를 갖고 재능을 발휘할 수 있는 분야다. 드리블보다 경기 분석 점수가 높으면 선수보다 감독에 더 적합하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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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서소문 법원, 검찰청사가 서초동으로 이전하기전에 두 딸과 함께 기념촬영을 했다. 당시 강지원 변호사는 검사로, 김영란 교수는 판사로 재직 중이었다.


적성 찾는 법 간단해, 강요하지 않으면 돼
 
두 딸을 키울 때도 이를 중요하게 여겼다. 그는 “부모가 자녀의 적성을 찾게 돕는 일을 간단하다”며 “‘공부하라’ ‘대학가라’고 강요하지 말고 자유를 주면 된다”고 말했다. 이는 아이들 스스로 독창적이고 발랄하고 신선한 아이디어를 샘솟게 한다. 부모의 역할은 아이들이 자신의 길을 발견할 때까지 믿고 기다려 주는 일뿐이다.

 이를 위해 두 사람은 아이들을 대안학교에 보냈다. 획일화된 입시 위주의 교육보다 자유롭게 생활하는 게 아이들의 미래에 도움이 될 거라 여겼다. 첫째 딸이 고등학교 입학 후 학생회가 학생 자율성 없이 운영되는 데 대한 불만이 컸던 게 계기가 됐다. 보통 부모라면 “학생회가 뭐 별거냐”며 “3년만 참고 다니면 된다”고 자녀를 설득했을 거다. 하지만 두 사람은 달랐다. 아이를 좀 더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교육하자는 데 합의했고, 전남의 한 대안학교로 전학시켰다.

 하지만 큰딸의 방황은 이게 끝이 아니었다. 기숙사 생활을 하면서 농사를 짓고, 지리산 등산 다니면서 즐겁게 학교생활을 하던 아이는 고3 때 느닷없이 “수능 시험을 포기하고 대학에 가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이후 서울에 올라와 청소년단체활동에 참여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정말 대학에 안 갔나.

 “고3 때는 수능 시험도 안 봤다. 대학을 포기하라고 대안학교에 보낸 건 아니었는데, 당시 충격이 컸다.”

 -어떻게 대처했나.

 “가장 먼저 아이의 뜻을 존중해줬다. ‘대학에 안 가도 좋다’고 했다. 대신에 앞으로 계획을 물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3~4장짜리 계획서를 들고 오더라. 1월에는 아르바이트를 해서 돈을 모으고, 2월에는 그 돈으로 해외여행을 하고 싶다고 했다. 이후 일은 그때 정한다더라.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내버려 뒀다. 한 달간의 호주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아이는 대뜸 ‘미국으로 유학 가겠다’고 했다. 이후 3~4개월 동안 영어 공부하다가 미국으로 떠났다. ‘영어도 잘 못하지 않느냐’고 했더니 ‘한국보다 미국에서 영어 공부하는 게 낫다’고 하더라. 그해 여름 미국 대학에 진학해 심리학을 공부하고, 졸업 후 일본으로 건너가 미디어아트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에는 일본에서 광고회사도 다녔고, 현재 문화기획자·미디어아티스트로 활동 중이다.”

 -둘째는 어땠나.

 “크게 다르지 않다. 전혀 새로운 분야에 관심을 갖는 것까지 비슷하다. 둘째도 대안학교에 보냈다. 입시 위주의 교육이 이뤄지지 않는 게 일반 학교보다 마음에 들었다. 둘째 때는 실무자들과 함께 학교 설립을 위해 직접 발로 뛰었다. 경기도에 있는 한 대안학교다. 둘째도 학교에서 수박 키우고 도보 여행하면서 즐거운 학교생활을 하더니 졸업하고 ‘영화과에 진학하겠다’고 하더라. 처음에는 놀랐지만 아이 뜻대로 지원을 해줬다. 재수까지 하면서 영화과에 들어갔고, 현재는 철학으로 박사과정을 밟고 있다.”

   -부모와는 전혀 다른 진로를 선택했다.

 “처음에는 신기했다. 우리 부부는 정치학과 법학을 전공하고 법조계에 30년 넘게 몸담았는데 아이들의 진로는 하나부터 열까지 예측불허였다. 아이들이 스스로 하고 싶은 일을 고민하고 적성을 찾을 수 있게 도운 덕분이다. 물론 아이들에게 ‘명문대에 가야 한다’고 강요하고, 온갖 사교육을 시켰으면 서울대에 합격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서울대 졸업장이 아이들의 인생을 행복하게 만드는 보증수표가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 부부는 너무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우리 역할은 여기까지다. 지금까지 경험을 토대로 앞으로 그림을 그려 나가는 것도, 책임을 지는 것도 아이들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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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이효임 여사의 88세 생일을 맞아 열린 미수연에 온 가족이 모였다.


 -가훈이 ‘화락당’(和樂堂)이다.

 “중용에 보면 ‘희로애락지미발 위지중 발이개중절 위지화’(喜怒哀樂之未發謂之中 發而皆中節 謂之和)란 말이 있다. ‘희로애락이 나타나기 전의 상태를 중(中)이라 하고, 희로애락이 나타나서 모든 상황에 알맞게 되는 것을 화(和)라 한다’는 뜻이다. 화(和)는 말 그대로 희로애락의 감정을 초월한 상태다. 부부와 형제는 물론, 부모·자녀 사이가 화락(和樂)하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을 거다. 비행 청소년 문제를 연구하다 가족의 소중함을 깨달은 후 스스로 실천하기 위해 가훈으로 정했다. 지금은 서른이 넘은 딸들이 초등학교 때 일이다. 이후 각자의 개성을 존중하고 이해하고 공감하려고 꾸준히 노력했다.”

 -부모의 역할에 대한 조언은.

 “아이들이 자연 그대로 성장하게 도와야 한다. 부모는 아주 가끔씩 정원사가 돼 곁가지를 자르는 역할만 하면 된다. 큰 방향만 잡아주라는 얘기다. 그래야 아이 스스로 뭘 좋아하는지 고민하고 자신의 인생을 설계해 나갈 힘을 기를 수 있다. 평생 자녀 옆에서 매니저 역할 할 거 아니지 않은가. 하지만 우리 부부가 아무리 ‘대학 간판보다 적성을 찾는 게 중요하다’고 소리 높여 말해도 귀 기울여 듣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나. 지금과 같은 경쟁 위주의 사회에서 아이가 혼자 힘으로 답을 찾을 때까지 기다려주는 부모는 없을 거다. 부모와 자녀 모두에게 큰 불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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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란 교수
1956년 부산 출생
   75년 서울 경기여고 졸업
   79년 서울대 법학과 졸업
   78년 제 20회 사법고시 합격
   81~87년 서울민사, 가정법원, 동부지원 판사
   87~91년 부산,수원,서울 남부지원 판사
   91~93년 서울고등법원 판사
   93~98년 대법원 재판연구관
   98~2000년 수원, 서울가정법원 부장판사
2000~2001년 사법연수원 교수
2001~2003년 서울지방법원 부장판사
2003~2004년 대전고등법원 부장판사
2004~2011년 대법원 대법관
2011~2012년 국민권익위원회 위원장
2012년~현재 서강대 법학전문대학원 석좌교수


강지원 변호사
1949년 전남 완도군 출생
   67년 서울 경기중·고등학교 졸업
   72년 서울대 정치학과 졸업. 제12회 행정고시 합격
   76년 제18회 사법고시 수석합격
   78~89년 전주·서울지방검찰청, 법무부 검사
   89~95년 서울보호관찰소, 법무연수원,법무부과장
   95~97년 사법연수원 교수
   97~2000년 청소년보호위원회 초대 위원장
2000~2002년 서울고등검찰청 검사
2002~2010년 변호사
2005~2007년 정보통신윤리위원 위원장
2006~2012년 한국매니페스토실천본부 상임대표
2008~2010년 자살예방대책추진위원회 위원장
2005년~현재 푸르메재단 대표
2015년~현재 노르딕워킹 I.K 총재

○ 인생의 롤모델: 없다. 존경할 만한 인물은 있지만, 공과가 있어서 모델로 삼지 않는다.
○ 내 인생을 바꾼 책: 간디 자서전(마하트마 간디), 서머힐(A.S. 닐)
○ 좌우명: 신독(愼獨, 혼자 있을 때 스스로 삼간다)

글=전민희 기자 jeon.minhee@joongang.co.kr
사진=김경록 기자 kimkr8486@joongang.co.kr 


[최고의 유산]
▶분명한 목적의식을 가져라, 그래야 아침 일찍 눈도 떠져
▶아이가 뛰는 인생, 부모가 대신 뛰겠다 나서지 마라
▶보아 엄마, 하지 마라 잔소리 대신 "맘껏 해라"

눈 먼 아버지가 도전할 때마다…아들은 한 걸음의 힘을 배웠다
▶아이는 칭찬을 먹고 산다…입장 바꿔 생각하고 잔소리는 삼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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