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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에서] 꼭 ‘황동 수도꼭지’냐…50년 규제 돌린 30년 건설맨

50년 이상 썩은 규제는 국가 발전을 위해서라도 좀 풀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30년 간 대형 건설회사에서 설계 업무를 맡아오다 건설 자재를 납품하는 중소업체로 직장을 옮긴 이진호(61) 켐텍 상무는 2015년 정부 부처 문을 두드렸다. 이 상무는 “규제로 묶어 놓으니 국내 경쟁력이 약화돼 고가 제품은 대부분 수입되는 상황을 그대로 볼 수 없었다. 나라도 총대를 메고 밀고 나가야 했다”고 말했다.

8개 업체가 3000억 시장 80% 장악
규제 발목에 고가품은 외국사 몫


2년 전부터 한 기업인이 규제를 풀어달라고 요구했던 제품은 전 국민이 하루에도 수 차례씩 만지는 수도꼭지다. 1963년 제정된 국가표준(KS)은 수도꼭지의 몸통 소재를 구리나 구리 합금인 황동으로만 하도록 규정해놓았다. 한국토지주택공사(LH) 등 대규모 아파트 단지를 발주하는 공기업은 KS 인증을 받은 제품만 쓰도록 하고 있다. 정부가 집계한 수도꼭지 국내 시장 규모는 지난해 기준으로 3000억원. 8개 업체가 이중 80%인 2500원 규모 시장을 장악하고 있다.

이 상무의 예상대로 정부 관계자는 “기존 업계 입김이 세서 개정이 쉽지는 않을 거다”는 반응을 보였다. 관련 법에 따라 산업통상자원부 산하 국가기술표준원(국표원)은 KS 개정 요청이 들어오면 기술적으로 타당한지 검토하는 전문위원회를 열고, 관련 업계 의견을 듣는 절차를 마련해야 한다. 1년 반에 걸쳐 두 차례 열린 공청회는 “플라스틱은 온도에 약하다”는 업계 측 반대 주장 때문에 중단됐다. 고성이 오가기도 했다.

그런데 기술 타당성을 검토한 전문위원회가 이 상무의 손을 들어줬다. 전문위원인 안성우 한국기계전기전자시험연구원(KTC) 선임은 “기존 구리 합금 재료는 가공성을 좋게 하기 위해 인체에 유해한 납과 아연을 섞을 수 있다”며 “여러 실험으로 인체에 무해한 것으로 밝혀진 스테인리스와 같은 소재도 허용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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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여년간 규제에 묶였던 한국 제품과 달리 디자인이 다양해진 외국산 수도꼭지. [켐텍]


국표원 자체 검토 결과에서도 플라스틱이나 스테인리스를 사용한 수도꼭지는 녹이 슬지 않는데다 제작 단가도 내려가고, 디자인도 다양화할 수 있는 장점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최근 항공기 소재로도 활용되는 플라스틱은 열과 압력에도 잘 견디도록 진화했다. 관련 규제는 미국·캐나다·유럽·일본 등 선진국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서기원 대림대 건축설비소방과 교수는 “KS는 일본의 국가표준 JIS를 토대로 제정됐지만 일본은 이미 수도꼭지에 대한 규제를 없앤 지 오래”라고 말했다.

국내 시장에서 50년 이상 낡은 규제가 발목을 잡는 사이 고급 주택의 수도꼭지는 독일의 그로헤(Grohe)나 일본의 토토(Toto)와 같은 외국 회사가 차지했다. 해외 업체는 유리와 탄소섬유 등 다양한 소재를 써서 물이 흘러내리는 모양에도 신경을 쓴다. 발광다이오드(LED) 조명을 활용해 찬물과 더운물의 색깔도 다르게 하고, 손목을 수도꼭지에 살짝 대는 것만으로도 물을 끌 수 있는 장치도 나왔다. 반면 국내 상위 8개 수도꼭지 제작 업체의 지난해 수출액은 7억원에 불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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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상
경제부문 기자

국표원은 22일 플라스틱이나 스테인레스, 탄소섬유로 만든 수도꼭지도 가정 욕실이나 주방에서 쓸 수 있도록 KS를 개정하겠다고 발표했다. 이 상무가 처음 문제를 제기한 지 1년 반 만의 일이다. 그나마 30년 간 경력을 쌓으면서 알고 지낸 학계와 업계 전문가를 끌어 들여 정부를 설득한 끝에 가능한 일이었다. 수출 하락으로 한국 경제가 몸살을 앓고 있다. 새로운 수출 동력은 이런 손톱 밑 가시부터 찾아보는 데서 나오지 않을까.

김민상 경제부문 기자 kim.minsa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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