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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인 잘 못따서 서러운 혼자 사는 여인에게 ‘딱’

문화심리학자 김정운과 함께 현대 디자인의 출발점이라 할 ‘바우하우스’를 공부하고 있다. 모두의 관심일 ‘창조의 시선’을 찾기 위한 노력이다. 몇 년 동안 취재 여행을 이어왔다. 베를린에서 출발해 비엔나, 베른, 파리를 찍고 다시 베를린으로 이어진 숨가쁜 여정이다. 보름여를 쉬지 않고 돌아다니는 일정은 만만치 않았다. 세상 곳곳을 헤집고 다니던 강인한 체력은 예전 같지 않았다.



여행의 고단함은 술로 달래야 제격이다. 하지만 동행은 정확하게 맥주 한 병을 물 대신 마시는 독일식 주법에 익숙했다. 가끔 취하게 마셔보자는 제안은 번번이 묵살당했다. 맥주 한 병으론 어림도 없다. 와인으로 주종을 바꾸어 꼬셔보면 태도가 바뀔지도 모른다. 공부가 취미인 박사의 태도는 단호했다. 술 없이도 멀쩡하게 살 수 있는 남자와 함께 지내야 한다. 은근히 부아가 치밀었다. 같이 마셔주지 않으면 혼자라도 마셔야 술꾼이다.



윤광준의 新 생활명품 -35- BOJ 올빼미 코르크 따개

아는 이 없는 낮선 도시의 밤은 지루하기만 했다. 호텔 건너편에 슈퍼마켓이 보였다. 내친김에 달려가 와인을 찾았다. 웬만한 와인은 2~3유로, 좋아 보이는 것이라도 6유로 내외다. 만원이 채 되지 않는 가격에 와인을 살 수 있다? 그렇다면 국내에서 팔리는 와인은 금테라도 두른 값일까. 세상은 풀리지 않는 의문으로 가득하다. 거저 얻은 기분으로 와인을 사 호텔방으로 돌아왔다.



즐거움은 잠시였다. 아뿔싸! 방안엔 당연히 있어야 할 와인 따개가 없다. 호텔 직원을 부르고 따개를 사러나갈 번거로움이 싫었다. 참기로 했다. 옆방엔 열심히 공부하고 있는 사람이 있지 않은가. 따지 못한 와인은 딱딱하고 차가운 유리병의 감촉 밖에 주는 게 없다. 술도 없고 잠도 오지 않는 처량한 밤은 깊은 푸른빛으로 어두웠다.



바우하우스 철학의 핵심은 ‘본질적 기능의 아름다움’베를린 중심가 티어 가르텐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바우하우스 박물관이 있다. 3년 전 들렀을 때와 달리 내부 단장을 새로 하고 전시 내용이 보완됐다. 독일 내에서도 바우하우스의 관심이 커졌음을 실감한다. 통일 이후 가치의 재평가다. 박물관은 사람들로 북적인다. 다시 둘러본 내용은 복습효과를 보았다. 건성으로 지나쳤던 진열물들의 의미가 비로소 선명하게 들어왔으니까.



디자인은 과거의 경험을 딛고 맥락을 바꾸어 다시 태어난다. 디자인의 대상이 되는 물건이란 새로울 게 없다. 이미 있던 것을 조합시키고 바꾸어보는 방식의 변화가 바로 새로움이다. 네발 달린 의자가 두 발로 바뀐 것이 그랬다. 나무라는 재료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철제 파이프의 등장에 건축가이자 가구 디자이너인 마르셀 브로이어가 반응했다. 앉을 수 있는 의자의 본질만을 남기고 형태를 바꾸면 되는 것이다! 없앨 수 없다고 여겼던 의자의 네 발은 쇠 파이프를 휘어 비로소 두 발이 되었다. 의자의 발 두 개를 줄이는 데 1만년도 더 걸렸다는 사실을 우린 잊고 살았다. 모든 물건엔 이야기가 담겼다. 물건은 사람이 만드는 까닭이다. 유심히 들여다보고 물어보지 않으면 이야기는 입 다물고 사라져버린다.



현재 우리가 보고 있는 온갖 물건들의 디자인은 바우하우스에서 출발했다. 본질적 기능이 곧 아름다움이란 바탕의 철학은 여전히 유효하다. “바우하우스 이후의 디자인은 없다”라고 단언했던 이 가운데 스티브 잡스가 있다. 고집쟁이 천재가 유일하게 따르고 싶었던 것은 바로 바우하우스의 디자인 전통이다.



100년 전에 세워졌던 학교의 생명력은 지금도 이어진다. 바우하우스 신봉자들과 영향을 받은 디자이너들의 활약은 멈춘 적 없다. 생활에 필요한 다양한 물건들까지 DNA가 공유된 덕분이다. 바우하우스 박물관 아트 숍에 그 증거물들이 있다. 세계 여러 나라에서 만든 디자인 상품들은 한눈에 공통의 인자가 드러난다. 장식을 없앤 간결함과 재질의 느낌을 그대로 살린 올곧음이 돋보인다. 안목 높은 재단의 관계자가 엄선한 물건들이다. 이미 보았거나 쓰고 있거나 갖고 싶은 물건들의 관심은 각별하다.



처음 보는 와인 따개가 눈길을 끌었다. 코르크를 따지 못한 채 호텔 방에서 뒹구는 와인 때문일 것이다. 올빼미를 닮은 형상이 신선했다. 1905년부터 와인 따개를 전문으로 만들던 스페인의 BOJ사가 만들었다. 찬찬히 보니 범상치 않은 구조와 견고함을 지녔다. 그 자리에서 바로 산 것은 당연하다.



코르크 따개가 뭐 대단한 것이 있을까. 아니다. 써 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비밀이 많다. 거꾸로 만드는 이의 입장에서 보자면 해결해야 할 일이 많은 물건이다. 코르크 따개의 방식은 다양하다. 어떤 것이던 힘점과 작용점, 받침점이 있어야 한다. 간단한 코르크 따개는 작용점만 있으면 된다. 스크류 철사를 박아 손의 힘으로 빼면 된다. 단순하지만 불편하다. 손이나 양다리 사이의 허벅지가 받침점 역할을 해야 하는 탓이다.



개량형은 작용점과 한 개의 받침점을 지닌 형태가 된다. 따개의 일부를 병에 걸쳐 받침점인 허벅지가 필요 없게 된다. 그래도 손의 할 일이 남는다. 병을 잡아 고정시켜야 하므로. 더 나아가면 작용점과 병 끝 주변에 받침점을 얹은 형태가 된다. 이제 병을 잡기 위한 손은 필요 없다. 두 손 모두 코르크를 끌어올릴 힘점에 집중시키면 그만이다.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은 쉬워 보이는 문제를 비범하게 마무리하는 능력이다. 코르크 따개가 그렇다. 각 방식의 장단점은 알아서 파악할 부분이다. 물리적 기능이야 조악한 중국산이라고 다를 게 없다. 세부를 들여다보면 그 격차가 벌어지기 시작한다. 제일 중요한 부분은 코르크에 박히는 스크류다. 성근 코일 형태가 일반적이다. 생각보다 코르크에 잘 박히지 않는다. 정밀도의 문제 때문이다.



빗면 나사 방식으로 돌리면 쉽게 쑥 들어가BOJ의 올빼미 코르크 따개는 빗면 나사 방식을 쓴다. 코르크에 대고 병을 돌리기만 하면 수월하게 박힌다. 이 부분만으로 큰 점수를 줄 만하다. 오랜 전통을 지닌 회사의 경험이 그대로 녹아있다. 커다란 톱니바퀴가 각형 밀대를 끌어올리는 ‘랙 앤 피니언’ 구조는 힘들이지 않고 코르크를 빼주는 비밀이다.



양 톱니바퀴를 감싸는 견고한 철판과 금속 광채의 흰색 리벳은 올빼미 얼굴로 바뀐다. 양팔의 힘점은 날개가 되어 각도에 따라 살아있는 올빼미의 움직임을 연상시킨다. 와인 코르크를 따는 일조차 즐거움으로 바꾸는 센스는 남달랐다. 치마 입은 여인의 팔짓으로 유명한 이탈리아 디자이너 알렉산드로 멘디니의 ‘안나 G’도 여기서 영향을 받았다는 생각이 든다. BOJ의 올빼미 코르크 따개는 유럽의 오래된 와인 생산국 스페인에서 훨씬 이전부터 만들어졌으니까.



혼자 사는 여자들이 울컥하는 순간은 와인 코르크를 따줄 남자가 없을 때란다. 생각처럼 쉽게 따지지 않는 와인 병을 부둥켜안고 난감해 할 여자들은 이 물건을 주목해 볼 일이다. 올빼미 코르크 따개로 딴 와인은 결국 호텔방에서 동행과 함께 마셨다. 비마저 부슬거리는 베를린의 을씨년스러운 날씨는 두 아저씨의 슬픈 그림을 만들었다. 와인 코르크를 따지 못해 울컥하는 여인네가 옆방에 있기를 진심으로 바랬다. 필요한 순간에 어긋나는 쌍곡선의 비애가 사람 사는 일이다. 비애가 본질이면 그마저 아름다움으로 바꾸려는 자세가 필요하지 않을까. 바우하우스 연구를 통해 얻은 결론은 이럴 때 적용하는 것이다. ●



 



 



윤광준 ?글 쓰는 사진가. 일상의 소소함에서 재미와 가치를 찾고, 좋은 것을 볼 줄 아는?안목이 즐거운 삶의 바탕이란 지론을 펼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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