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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아, 이 사나운 곳아 … ”

금동 김동인(1900~1951), 팔봉 김기진(1903~1985), 소파 방정환(1899~1931), 늘봄 전영택(1894~1968).



우리나라 현대 문학의 여명기를 수놓은 큰 별들이다. 국어교과서도 이들의 이름을 빼고는 만들 수 없다. 김동인은 근대 최초의 문예동인지 ‘창조’ 멤버로 자연주의와 유미주의를 넘나들며 많은 걸작을 남겼다. 평론가 김기진은 초기 사회주의자로 조선프롤레타리아 예술가동맹(KAPF)의 실질적 지도자였다. 색동회를 창립한 방정환은 독립운동가이자 사회운동가·아동권리 운동가였고 ‘어린이’라는 말을 처음 만든 선각자였다. ‘화수분’의 전영택은 소설가 겸 목사였다. 하나같이 근대 최고의 지식인들이었다.



공감 共感

이 기라성 같은 남성들이 가혹하게 몰매를 가한 한 여성이 있다. 그 여성도 근대문학의 선구자였다. 수식어를 달자면, ‘근대 최초의 여성작가’‘최초의 현상 문예작품공모 당선 작가’‘창작집을 발간한 최초의 여성작가’‘에드거 앨런 포를 국내에 처음 소개한 작가’ 등이다. 그의 이름은 김명순(1896~?)이다. 1950년대에 일본의 한 정신병원에서 비참하게 생을 마쳤다고 추측될 뿐 정확한 사망 시기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최초’로 이어지는 선구자적 업적들이 국어교과서는 물론 한국문학사에서도 오랫동안 거의 언급조차 되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1915년 벌어진 한 사건이 발단이다. 서울에서 진명여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유학 가 도쿄의 국정여학교에 다니던 김명순이 같은 조선인이던 이응준(1891~1985)에게 ‘데이트 폭력’을 당했다고 한다.



연구자에 따라서는 이응준이 데이트 도중 김명순을 강간했다고 못박기도 한다(김경애 논문 ‘성폭력 피해자:생존자로서의 근대 최초 여성작가 김명순’, 이준식 논문 ‘일제강점기 치정사건의 사회사’ 등). 이응준은 당시 일본육군 소위였고, 일본군 대좌(대령)를 거쳐 해방 후에는 대한민국 초대 육군참모총장, 체신부 장관 등을 역임했다.



만 19세 앳된 여성이 바다 건너에서 당한 봉변은 곧 조선 땅에 유입돼 요즘에도 흔한 2차 폭력으로 이어진다. 매일신보는 ‘동경에 유학하는 여학생의 은적(隱跡·종적을 감춤) 어찌한 까닭인가’라는 제목으로 1915년 7월 30일자 기사를 시작으로 세 차례에 걸쳐 이 사건을 보도했다.



기사를 통해 김명순은 고향(평양)과 부친 이름, 자신의 아명(김기정) 등이 낱낱이 공개되는 치욕을 당했고, 자살을 시도하기까지 한다. 남성 위주의 가부장제 사회에서 군중의 맞춤 먹잇감으로 내던져진 것이다.



익명성 뒤에 숨은 대중의 질 낮은 관음증이야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라 치고, 당대 조선의 1급 지식인들이 김명순 매도에 팔을 걷어붙이고 나선 것은 왜일까. 김명순의 생애를 더듬으면서 새삼 드는 의문이자 안타까움이다. 여기에는 좌파와 우파, 민족주의자·사회주의자·독립운동가의 구분이 없었다. 단 한가지 ‘남성’이라는 공통점만 있었다. 피해자인 김명순은 이들로부터 음탕한 탓에 강간당한 여자, 원래 피가 더러운 여자, 아기 어머니가 됐어도 아기 성을 무엇으로 할 지 헷갈리는 여자로 묘사되었다.



김기진은 잡지 ‘신여성’에 기고한 ‘김명순에 대한 공개장’에서 김명순이 처녀 때 남성에게 정벌을 받았으며, 외가 쪽의 불결한 혈액을 받고 태어났다는 식으로 공격했다. 방정환은 ‘혼인 날 신랑이 세넷씩 달겨들까봐 독신생활을 하게 된 독신주의자’라 했다. 김명순은 나름대로 반론을 시도하고 고소도 했으나 역부족이었다.



작품 창작에 몰두함으로써 버텨보려던 김명순에게 가해진 결정타는 1939년 김동인이 ‘문장’지에 발표한 ‘김연실전’이었다. 김동인은 김연실의 이름을 빌어 김명순을 천하의 탕녀로 만들어버렸다. 더구나 김동인은 김명순과 동향이자 오빠의 친구였다. 결국 김명순은 조선을 떠나 일본으로 가고 만다.



김명순이 남긴 작품은 시·소설·희곡·수필·번역시 등 170여 편이나 된다. 2009년 ?김명순 전집 시·희곡?을 펴낸 맹문재 안양대(국문학) 교수는 “나혜석·김일엽 등 동시대에 활동한 여성 문인들 중 작품 양이 가장 많을 뿐더러 질적으로도 가장 우수하다”고 평가한다. 그러나 학계의 본격적인 연구는 1990년대 후반부터로 이제 시작이라 한다. “아무래도 한국 문학사가 남성 위주로 쓰여져 왔기 때문”이라고 맹 교수는 말했다. 올해로 탄생 120주년인데도 별다른 행사 하나 계획돼 있지 않다.



김명순은 자신을 짓밟은 남성들에 대해 작품을 빌어 “일일이 저들의 악행을 적는다 해도 황무지에 잡초 하나를 뽑는 것밖에 안될 것”이라고 절규했다. 시 ‘유언’에서는 ‘조선아… 이 다음에 나같은 사람이 나더라도 할 수만 있는대로 또 학대해 보아라… 이 사나운 곳아 사나운 곳아’라고 읊는다. ‘조선아, 이 사나운 곳아’라는 부르짖음을 ‘대한민국아, 이 사나운 곳아’라고 바꾸어도 아주 크게 어긋나지는 않을 것이라는 느낌은 과연 나만의 시대착오일까.



 



노재현중앙일보플러스?단행본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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