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Load Image preLoad Image
검색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주요 기사 바로가기
다른 기사, 광고영역 바로가기
중앙일보 사이트맵 바로가기

목소리 큰 사람에게도 냉정한 판결이 필요하다

판사의 역할이 휘슬만 부는 심판 정도로 위축되는 현실… 소신판결 지지해줄 제도적인 장치가 아쉽다

[도진기 판사의 ‘작가주의’ 법정칼럼] 법정도 ‘성격놀음’에 휘둘린다?

중립적인 판사조차 강한 쪽의 주장에 알게 모르게 이끌리는 경향이 있다. 증거가 부족한 청구라 할지라도 일방이 집요하고 거세게 밀어붙이면 판사는 그 주장을 쉬이 배척하는 데에 부담을 느낀다
기사 이미지

원고와 피고 중 양보 없이, 강하게 주장을 밀어붙이는 쪽이 좀 더 많은 것을 가져가는 경향을 막기 위한 사법적 노력이 필요하다.

재판이 재판 외적인 이유로 왜곡되고 있다고들 말한다. 비판도 많다. ‘유전무죄 무전유죄’ 같은 말은 이젠 거의 법정에 대고 ‘좋은 하루 보내세요’ 하고 말하는 거나 다름없는 수준의 클리쉐가 되었다. 하지만 법정 밖의 시선처럼 돈이나 사회적인 지위로 재판에서 차별을 받는지 어떤지는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 개인적으로는 굉장히 사회적 지위가 높은 사람이나 재벌회장 같은 사람을 두고 재판한 경험이 별로 없다. 그런 종류의 차별을 감지하지도 못했다. 법원 안에 있으면서도 내게는 바깥에서 들려오는 풍문 같은 이야기다(무의식적인 편향이 있을지 모르지만 의도적으로 달리 대접할 생각 같은 건 추호도 없다. 나하고 무관한 사람들이다. 그럴 이유가 없다.). 그래서 재판에서 그런 차별적인 기제가 존재한다고 목소리를 높여봐야 내 입장에선 다중을 상대로 한 인기성 발언이 되기 십상이거나 위선으로 떨어지게 된다. 부동명왕이 눈을 부릅뜰 것 같은 그런 커다란 이야기 대신 법정에서 느낀 조금 다른 종류의 편차랄까 오류 같은 것에 관한 조그마한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성숙한 사회는 팔자의 문제도 해결한다
기사 이미지

문제적 작품 <광장>의 작가 최인훈의 1994년 모습. <광장>에는 성격에 따라 상반된 사회적 평가를 받는 주인공들이 등장한다.

최인훈의 소설 <광장>은 남한과 북한 모두에 적응하지 못하고 갈 곳을 잃은 한 남자의 선택에 관한 이야기다. 주인공 이명준은 남한의 부패한 ‘밀실’에 실망해 월북하지만 그곳에는 공허한 ‘광장’만이 있었다. 이명준은 모두에게 등을 돌린 채 제3국행을 택하고, 결국 남중국해에 뛰어들어 자살한다. 내가 대학에 들어왔을 때는 재야의 필독서 중 하나였는데, 지금은 교과서에도 실려 있으니 어느새 불멸의 생명력을 얻었다고 해야겠다.

이데올로기와 인간, 사회와 실존에 관해 많은 생각을 해보게 하는 소설이지만, 그중에 좀 엉뚱하게 기억에 남은 부분이 있었다. 이명준은 약삭빠른 이들이 승승장구하는 남한 사회에서 성격적인 약점이 점점 커져 월북한다. 하지만 그는 북한 사회에도 여전히 적응하지 못한다. 신문사 편집부에서 깨지고는 이런 얘기를 하고 있다. ‘더 게으르고 얼렁뚱땅하는 다른 사원은 그 까다로운 편집장 동무와 제법 사이 좋게 지내고 있었다. 자기 경우는 사상적인 일뿐만 아니라, 성격에서 오는 손해도 보는 것이리라 싶었다. 이런 사회에도 그 놀음은 피할 수 없는 일이던가. 대인관계에서 순전히 공적인 관계가 없는 성격 같은 것이 아직도 그 사람의 사회적 생활을 쉽게도 만들고 어렵게도 만드는 것이라면, 거기도 또한 북조선 사회의 반혁명성이 있었다.’

이명준의 독백처럼, 어떤 사회든 ‘성격놀음’이란 게 있다. 대개는 적극적이고 외향적이고 집요한 성품 쪽이 유리할 것이다. 반면에 소극적이고 내향적이고 온순한 성품은 상대적으로 불리하다. 기껏해야 사람 좋다는 허망한 평이나 들을 뿐이다. 자기주장이 약하면 양보를 강요당하기 일쑤다. 누명을 뒤집어쓰고서 해명할 기회를 갖지 못하고 속병을 앓기도 한다. 사람들은 대체로 자기 팔자며, 피할 수 없다고 여기는 것 같다. ‘성격 약자’까지 배려하는 디테일한 문화를 쌓기보다는 자신을 담금질해 스스로 강자가 되기를 지향한다. 물론 개인의 선택이고, 문화일 수 있다.

이 성격놀음이란 것에 관해서는 조그만 의문을 품고 있다. 일상에서의 보이지 않는 역할을 넘어 권리까지 야금야금 갉아먹는다면? 사람이 인정받는 것이 재능 순서가 아니라 성격 순서라면? 거기까지 가버린다면 잘못된 것 같다. 형평성뿐 아니라 사회의 효율 면에서도 그렇다(조금 다른 이야기지만, 오랜 세월 남성중심 문화 아래에서 온순하게 묻혀 살았던 여성의 재능이 해방되면서 사회는 얼마나 많은 인재를 새로 얻었던가). 성격이든 육체든 강한 자가 더 많이 차지하는 곳은 원시의 정글에 가깝다. 그 반대쪽이 진화의 길일 것이다. 성격 놀음에서 열위에 있는 사람들을 새로운 약자로 인정한다면, 약자에의 배려란 것이 이런 데까지 지평을 넓혀갈 수도 있지 않을까. 사회가 성숙되면 팔자의 문제도 해결될 수 있는 건 아닐까. 기술이 이만큼이나 발전했는데, 인문도 이 정도 수준까지는 도달해야 하지 않을까. 그런 진화가 가능하지 않을까. 이명준 같은 친구도 어쨌든 살 수 있어야 하지 않나.

이런 의문은 의문에서 그치는 걸로 하고, 여기서는 객관적이고 무색무취해야 할 법정에서조차 존재하는 ‘성격놀음’에 관해서 몇 가지 증언해보기로 한다. “법률은 모든 이에게 평등하다. 그러니 성격놀음 따윈 있을 수 없고 마음이 여린 사람이라고 해서 불리하지 않다. 재판은 사실과 증거를 집어넣으면 자로 잰 듯한 권리가 튀어나오는 ‘권리자판기’다.” 이렇게 말하고는 싶다. 하지만 이 안에서 많은 사례를 보아온 경험이 나를 주저하게 한다.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긴다고 하는데, 안타깝게도 재판에서도 어느 정도는 그렇다. 오해는 마시라. 법정에서 고함을 치거나 과격하게 행동하는 편이 유리하다는 말이 아니다(다른 대부분의 상황에서와 마찬가지로 흥분은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다). 양보 없이, 강하게 주장을 밀어붙이는 쪽이 좀 더 많은 것을 가져가는 경향이 있다는 의미다.

사적자치(私的自治)의 원리가 지배하는 민사에서 특히 그렇다. 민사소송에는 ‘당사자주의’ 혹은 ‘변론주의’, ‘처분권주의’ 원칙이 있다. 소송을 할 것인지 말 것인지, 어느 부분을 소송 범위에 넣을 것인지, 소송을 끝낼 것인지, 끝낸다면 언제 끝낼 것인지까지 전부 당사자의 뜻에 맡겨져 있다. 법원은 당사자가 주장하는 범위 안에서만 인정하고 판단해야 한다. 사실관계와 권리를 검토한 결과 원고가 1000만원 받을 게 있어도 원고가 100만원을 받겠다고 하면 그렇게 판결해야 한다. 1000만원의 권리가 있으니 피고더러 1000만원을 주라고 할 수 없다. 피고 쪽도 마찬가지다. 이를테면 당사자의 개성과 성격, 인생관이 반영될 여지가 많은 구조다. 이런 요소는 다양한 경로의 인과관계를 거쳐 결론에도 영향을 미친다.

중립적인 판사조차 강한 쪽의 주장에 알게 모르게 이끌리는 경향이 있다. 증거가 부족한 청구라 할지라도 일방이 집요하고 거세게 밀어붙이면 판사는 그 주장을 쉬이 배척하는 데에 부담을 느낀다. 한쪽의 강한 확신이 전염된다는 심리적인 이유뿐만은 아니다. 소심한 판사라면, 이 공격적인 성향을 가진 인물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았다가는 자칫 일이 시끄러워질지 모른다는 내밀한 두려움에 지고 마는 경우도 있다. 누군가 판사를 상대로 클레임을 걸었을 때 사실여부를 불문하고 여론은 절대 법원에 우호적이지 않다.

무서운 쪽의 손을 슬그머니 들어줘버린 B부장판사
기사 이미지

대법원의 조형물 ‘정의의 여신상’. 정의는 때때로 규정하기 어려운 ‘성격 놀음’에 의해 왜곡될 가능성이 있다.

판사는 그것이 사실로 확인되었을 때 타격을 입는 게 아니라 문제가 제기된 때에 이미 타격을 입는다. 그리고 법원 조직은 해당 판사를 그 이유만으로 좋아하지 않게 된다. 법원은 ‘평온’을 대단히 중시하는 조직이다. 옳은 일을 하다가 시끄러워지느니 적당히 달래서 조용히 넘어가는 쪽을 더 선호한다. ‘포청천’보다는 ‘황희 정승’이, ‘저지 드레드’보다 ‘네고시에이터’가 살아남는다. 하긴 법원뿐 아니라 모든 조직이, 특히 공조직이 그렇긴 하다. 하지만 법원에서 ‘단단한 놈’이 사라져가는 걸 아쉬워하는 사람들도 분명 있을 것이다.

지금은 변호사 개업을 한, 소심한 B부장판사의 사례. 그 당시 법원에 유명한 여성 민원인이 있었다. 남을 상대로 소송하는 일에 평생을 바쳐온 사람이었다.(고소왕이라는 강모 변호사도 이 사람에 비하면 아득한 말석에 불과하다.) 이 사람을 ‘고소황’이라고 일단 부르자. 한 인생에 평생 소송할 거리가 있을 리 만무하니, 대부분 근거가 약해 패소했다. 그중에는 다른 여성을 상대로 10년 넘게 소송을 반복해온 사건이 있었다. 법정에 나온 피고를 보니 하도 시달려 피골이 상접했고 우울증으로 마치 넋이 나간 사람처럼 보였다. 나는 증거법칙에 따라 단호하게 고소황을 패소시켰고, 그의 반발로 조금 시끄러워졌다. 이어진 소송에서 B부장판사는 질질 끌려 다니다가 결국 고소황의 청구를 받아주었다. B부장판사는 ‘그래도 주장을 따져봐야지…’ 하며 사석에서 변명했지만 판결문에 법리적 근거는 없었다.

무서운 쪽의 손을 슬그머니 들어줘버린 B부장판사는 조용히 넘어갔지만 피고는 연장된 고통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울었으리라. ‘무리 없는 사건처리’를 한 B부장판사는 온건한 판사 이미지를 유지하며 그 후로도 법원에서 좋은 보직을 받았던 걸로 기억한다(개업한 뒤로는 유명한 사건에 변호사로 이름을 올리고 있다). 처세술만은 매끄럽기 그지없다고 해야 할지 모르지만 그가 좋은 판사였는지는 의문이다. ‘집요한 사람’이 이익을 보고 ‘얌전한 사람’은 손해를 보는 사회 속 흔한 장면이 재판에서도 그대로 반복된 경우다. 하긴 재판도 애당초 사회 속 현상에 불과한 것이니 다를 턱이 없다. 하지만 그것이 ‘재판’이기 때문에 조금은 더 씁쓸하다.

똑같은 손해를 입었더라도 받아내는 배상 액수에서 차이가 나기도 한다. 공격적이고 과감한 주장을 하는 쪽이 더 많이 가져간다. 학리적으로는 체계적 오류를 낳는 인지적 착각의 하나인 앵커(ankor) 효과란 것으로 설명해볼 수 있다. 이건 심리학에서는 보편적인 착각의 한 유형이지만, 판사들이 특히 빠지기 쉬운 심리적 맹점이다. 앵커 효과란, 기본으로 혹은 처음 단계에서 제시되는 양을 사회적으로 바람직한 평균치로 해석하는 경향을 말한다. 애당초 ‘베팅’을 세게 하면 그 값에 정박(ankor)한 후 관련 요소들을 고려해서 최종 값을 조정하게 된다는 얘기다.

이런 편향은 시장에서의 가격흥정 과정 같은 데서도 흔히 일어난다. 중동의 시장에 가본 일이 있는지? 상인이 100을 불렀다면 손님은 얼마를 불러야 할까? 80? 50? 마음 약한 사람은 어떻게 절반이나 깎느냐 싶어 차마 50까지 부르지는 못할 것이다. 하지만 손님이 50을 부른다고 해도 상인은 뒤돌아 쾌재를 부른다. 실은 10이나 20 정도를 불러야 제대로 된 흥정이 시작되는 경우가 많다. 적절한 가격이 얼마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랍 상인들은 그 선보다 아득히 높은 금액을 먼저 부르고 나온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손님은 마음에서부터 그 가격에 닻을 내리고(ankor) 시작하게 되니 웬만큼 담대하지 않고서는 흥정에서 밀리거나 손해를 볼 수밖에 없다. 조금은 극단적인 예를 들었지만, 그 외에 우리의 실생활에서도 얼마든지 있으니 굳이 더 설명을 요하지는 않으리라 본다.

범행 부인하는 ‘사자 같은 심장’의 피고
기사 이미지

법과 재판에서 가장 싫어하는 것은 억울한 죄인을 만드는 일이다. 그러나 바로 이 대목에서도 성격에 의한 판결의 왜곡이 일어날 수 있다.

인간이라면 갖는 보편적인 인지적 오류인 만큼 트레이닝을 받은 전문 법관이 주관하는 소송에서도 벗어나기 힘들다. 이를테면 원고의 청구금액이 높을수록 실제적인 손해배상 액 또는 위자료가 많아지는 경향이 있다(미국에서의 연구결과이니 우리만의 고유한 문제는 아니다). 이 점은 재판실무를 하는 내 입장에서도 솔직히 그렇다고 토로하지 않을 수 없다. 위자료가 100만원 정도 인정되면 적당할 사건이라도, 원고가 길길이 뛰면서 1억원은 받아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해오면, ‘그래도 1억원을 달라는데 100만원으로 깎아버리는 건 너무한 거 아닐까’하는 우려감을 나도 모르게 갖게 된다. 이런 착시를 마음속에서 지우려는 의식적인 노력이 없다면 무심결에 원고의 주장 금액에 경도되게 된다. 앵커 효과는, 자칫하면 받게 될 수도 있는 것이 아니라 받지 않는 것이 오히려 어렵다고 해야 한다. 결국, 배짱이 좋은 사람은 애당초 금액을 높게 청구할 것이고, 그 값이 정당하다며 강하게 주장할 것이고, 그것이 판사의 마음속의 기준을 높여놓게 되니, 만약 인용이 된다면 손해배상 액수건 위자료 액수건 간에 유리한 금액을 결정받게 될 가능성이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형사소송 절차에서는 검사의 구형이 높을수록 앵커 효과로 선고형도 올라가는 경향이 있는데, 여기서는 더 언급하지 않기로 한다).

이런 경향은 조정절차에서 특히 두드러진다. 원고와 피고가 법정이 아닌 별도의 테이블에 모여 판사의 주재 아래 협상과 화해를 시도하는 것이 조정절차다. 조정이 성립되면 감정적 대립이라는 후유증이 판결보다 적고, 시간과 비용 면에서도 낫다. 그래서 대법원이 통계를 따로 잡을 만큼 권장하고 있고, 외국에서도 각광받는 절차다. 개인적으로도 지인들에게 말한다. 소송은 외과수술과 같아서 웬만하면 하지 않는 게 좋다고. 재판보다는 조정을 통한 해결이 바람직하다고 나도 믿고 있다. 그런데, 이런 명분과는 별개로, 뒷전에서 판사들은 탄식한다. 결국 모진 쪽만 이득을 보는 거 아니냐. 조정 실무를 해본 판사라면 전적으로 부정하긴 힘들다. 대개는 조정이 판결보다 낫지만, 그런 모순적인 경우가 없지 않다. 조정은 어떤 면에서 증거나 사실관계가 무용지물이다. 당사자가 합의에 도달하면 그게 해결이며, 정의가 된다. 그 과정에서 강한 쪽의 욕망이 더 많이 반영됨은 재판으로서의 성격보다는 사회 내의 통상적인 협상 성격이 짙은 조정절차의 특성상 당연한지도 모른다.

돈을 받아야 할 원고는 어수룩하고 ‘물렁한 쪽’, 돈을 갚아야 할 피고는 불굴의 의지를 지닌 ‘단단한 쪽’이라고 가정하자. 우선 당사자가 내놓은 협상안에 있어서도 일단 단단한 쪽이 유리할 거라고 예상된다. 더구나 당사자 간의 속사정을 알지 못하는 판사로서는 조정의 ‘어쨌든 성공’에 더 관심이 높을 수밖에 없고, 그래서 약한 쪽을 공략하게 된다. 손톱도 안 들어가는 단단한 쪽은 아예 포기하고, 물렁한 쪽을 보며 말한다. 양보하시죠, 더, 더…. 앵커 효과는 여기서도 여지없이, 아니 더 선명하게 발휘된다. 주어야 할 돈이 실제로는 1000만원이다. 하지만 단단한 쪽은 100만 원밖에 줄 게 없다고 밀어붙인다. 물렁한 쪽은 양보해서 500만원만 받겠다고 한다. 판사는 내막을 모르니 일단 산술적인 평균 안을 제시해본다. 딱 중간. 300만 원 어떻습니까? 단단한 쪽은 그래도 길길이 날뛴다. 말도 안 됩니다! 물렁한 쪽은 지친 나머지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서 나온 결론은, 물렁한 쪽으로 조금 더 불리하게 에누리해서 200만원. 단단한 쪽은 만족할 것이고, 물렁한 쪽은 분통 터지고 억울하지만 지긋지긋한 소송을 끝냈다는 것만으로 조그만 위안을 삼고 돌아간다. 물론 가상이지만 심한 경우에는 이렇게 되기도 한다.

당사자의 주장과 무관하게 실체적인 진실을 추구하는 형사소송에서는 개인의 기질에 따른 불균형은 원칙적으로 없어야 한다. 하지만, 이런 곳까지 성격놀음은 유령처럼 슬며시 끼어들어 있다. 이를테면 피고인이 범행을 부인하는 ‘사자같은 심장’을 가졌다면 어떨까.

‘피고인이 반성 없이 범행을 부인하고 있는 점’은 형사판결문에서 높은 형을 선고할 때 쓰는 정형화된 문구다. 이런 걸 보면 사자의 심장이고 뭐고 뻔뻔하게 범죄를 부인하며 뻗대다간 패가망신하겠구나 생각할 수 있겠다. 약간은 그렇다. 하지만 또 다른 약간은 다르다. 무슨 말인가 하면, 범죄의 명백한 증거가 있는 경우에만 그렇단 얘기다. 증거물, 증인이 넘치도록 있어 피고인의 범행이 틀림없는데도 안 했다고 우기고 있으면 인상이 대단히 나빠진다. 자기 죄를 발뺌하는 건 인지상정인지 모르지만, 그 모습이 판단자의 감성을 건드려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심지어는 이 사람이 나(판단자)를 바보로 아나, 하는 생각에 자존심까지 상한다. 그래서 ‘악랄한 부인(否認)’을 하는 경우 형을 높이면서 관행적으로 저런 문구를 부기한다.

하지만 증거가 조금 부족하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법과 재판에서 가장, 끔찍이도 싫어하는 일이 억울한 죄인을 만드는 것이다. 그 이유로 ‘무죄추정’, ‘의심스러울 때는 피고인의 이익으로’, ‘합리적 의심 없는 증명’ 같은 법원칙이 촘촘한 그물망처럼 펼쳐져 있다. 이런 통제는 살인, 강도, 강간 같이 높은 형이 예상되는 중급 이상의 범죄일수록 더하다. 그러니, 증거가 어설퍼 보이는데 피고인이 극력 부인하고 있으면, 판사는 여전히 애써 냉엄한 표정을 짓지만 뒤로 마음이 흔들릴 수밖에 없다. 이거 억울한 죄인을 만드는 거 아닐까. 자신 있게 유죄로 하기 힘들어지고, 가령 유죄로 한다고 해도 (손을 떨고 마음을 졸이면서) 형을 어중간하게 잡거나, 집행유예 같은 적당한 형을 선고해 타격을 최소화한 채 상급심에서 회복될 수 있는 길을 마련해두기도 한다.
기사 이미지

국민참여재판의 배심원 석. 피고인이 뻔뻔하게 범행을 부인할 때 배심원 역시 그런 주장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없다.

정말 억울한 경우도 물론 있지만, 대체로 기질이 강하고 배짱 좋은 피고인일수록 당당하고 집요하게 부인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뻔뻔한 범죄인이 엉뚱하게 증거부족으로 무죄 방면되거나 받으나마나 한 형을 받고 끝나버리는 경우가 없다고는 할 수 없게 된다. 반면에 순진하고 마음 약한 피고인은 증거가 다소 애매한 상황에서 선뜻 자기가 했다고, 모든 걸 인정하겠다고 나와 고민하고 있던 판사를 반색하게 만드는 일이 종종 있다. 반성한다는 이유로 감형 사유가 되기도 하지만 확실한 유죄판결이 예약되는 셈이고, 판사는 명백한 유죄라는 안전판을 얻고 형을 정하는 데 홀가분해진다는 점을 부정하기 힘들다.

‘자백 감형’과 ‘부인 가중’은 동전의 양면
미국의 경우는 플리 바기닝(plea bargaining) 제도로 인해 90% 이상의 형사 사건이 검찰과의 양형 협상으로 사실상 법정공방을 피해 끝나버린다. 유죄를 인정하는 대신에 가벼운 죄목을 적용해주거나 기준보다 적은 형을 구형하겠다고 약속하는 검찰의 제안에 피고인이 동의하는 경우다. 반면, 끝까지 해보고자 하는 피고인은 재판에서 정식으로 공방을 펼치게 된다. 그 결과 무죄를 받을 수도 있지만, 만약 유죄로 인정될 경우에는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형을 언도받게 된다(미국발 뉴스에 나오는 ‘엄청나게 센 판결’은 주로 이런 경우이다. 엄한 양형기준과 무제한의 경합범가중이 결합한 결과이기도 하다). 그런 리스크를 감수하고서 부인하는 것이다.

우리 재판 실무에서는 범행을 부인하다가 유죄가 인정될 경우 가중처벌의 정도가 그리 높지 않다. 양형기준을 타성적으로 적용해 거의 동일한 형을 받는 경우가 더 많고, 심지어는 위에서 말한 이유로 처음부터 순둥이처럼 범행을 인정하는 사람보다 더 유리한 처우를 받기도 한다. 이론적으로는 피고인의 방어권을 보장해야 한다는 근거를 든다. 범행을 부인한다고 형을 대폭 높이면 피고인이 겁나서 다툴 수 있겠는가 하는 우려다. 더 나아가, 범행을 부인하였다고 하여 형을 가중하는 게 과연 타당한지 근본적 이의를 제기하기도 한다. 이 논리의 바탕에는 서양의 합리성보다는 동양 특유의 관용적 정서가 깔려 있다. 그리고 다른 편에는 피고인의 성격 놀음에서 기인한 소송전략의 선택이 자리하고 있다.

하지만 형평성 측면에서는 치명적이다. 범행을 저지른 건 잘못이지만 그나마 법정에서 모든 걸 인정하고 받아들이려는 비교적 선량한(?) 피고인에게 면죄부를 줄 순 없다 하더라도 조금은 선처를 해주는 게 상식적이다. 이런 관점에서는, 반대로 범죄를 교활하게 부인하는 피고인에게 아무런 형의 가중을 하지 않는 건 오히려 형평에 맞지 않다고 해야 한다. ‘피고인의 방어권 보장’이 ‘거짓말권 보장’을 포함하는 건 아니지 않은가? 그래도 ‘범행을 부인했다고 하여 형을 가중하는 게 타당하지 않다’고 한다면, 이런 명제는 어떨까. ‘범행을 순순히 자백하였다고 하여 형을 감경해주는 건 타당하지 않다.’ 동의하지 않을 것 같다. 하지만 ‘자백 감형’과 ‘부인 가중’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 두 명제는 뒤집어보면 실질은 같다. 물론 정책적인 측면에서도 문제다. 무제한적인 포용, 용서는 듣기 좋은 말이지만 범행 부인을 부추기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한다.

법정의 성격놀음은 수치화할 수도 없고 비교한다고 해서 차이가 드러나지도 않는다. 다른 종류의 차별들과 다르게 표가 나지도 않는다. 어쨌든 당사자가 수긍했으니 그것으로 되지 않았느냐고 할 수도 있다. 비록 마음 여린 사람을 희생시킨 겉만의 평화라 할지라도 어쨌든 평화는 분쟁과 무관한 많은 사람의 마음에 안식을 준다. 이명준의 말처럼, 체제 불문하고 사람이 사는 곳이라면 이런 성격놀음은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하지만 사람들은 적어도 재판에서는 그런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아 한다. ‘만인에게 평등하다’는 게 법이니까. 성격의 개인차에서 비롯하는 결과의 왜곡을 최소화하려는 의식적인 노력이 있으면 좋겠지만 판사 개인의 의지에만 맡기기는 어렵다. 적극적으로 개입했다가는 트러블이 생기기 쉬운 구조다. 사람들은 포청천을 아쉬워하지만 정작 포청천이 우리나라 판사라면 공격받아 쓰러지는 건 시간문제다. 판사의 역할은 휘슬만 부는 심판 정도로 점점 오그라들고 있다.

도진기 - 서울대 법과대학 및 동대학원 졸업. 현 인천지방법원 부장 판사. 2010년 <선택>으로 추리작가협회 신인상, 2013년 <성냥팔이 소녀는 누가 죽였을까> 문광부 선정 올해의 청소년 도서, 2014년 <유다의 별> 한국추리문학 대상, 2015년 <가족의 탄생> 세종나눔도서 선정. 4개의 작품이 중국어로 번역됐고, <유다의 별>과 <백수탐정 진구> 시리즈는 영화와 드라마로 제작 중이다.
기사 이미지
AD
온라인 구독신청 지면 구독신청

PHOTO & VIDEO

shpping&life

댓글 많은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