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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 초록의 향연 꿈엔들 잊힐리야

l  봄 완연한 남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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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 가천 다랭이마을 비탈에 올랐다. 포근한 바닷바람을 온몸으로 받으며 논두렁길을 걸었다. 파릇한 마늘·파·유채 등이 올라온 다랑논 뒤로 은빛 남해 바다가 포개졌다. 남해는 이미 봄이었다.


말하자면 봄은 하나의 기운이다. ‘가을기운’이란 말은 없어도 ‘봄기운’이란 말은 있는 까닭이다. 환히 피어오른 꽃에만 봄이 있는 게 아니다. 언 몸 녹여 축 늘어진 붉은 흙에, 발뒤꿈치에 딸려오는 검은 흙에도 봄은 있다.

서울에서 꼬박 5시간을 달려 경남 남해로 내려갔다. 이맘때 남해는 실패할 걱정 없는 봄 마중 여행의 안전지대가 된다. 진즉 따뜻한 바람이 불어온 덕분에 남해에는 이미 봄이 내려와 있었다. 길가에 매화꽃과 동백꽃이 피어 있었고, 다랑논에 마늘·파 등의 푸른 채소가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하늘도 푸르렀고, 들판도 푸르렀다. 도다리를 비롯한 봄 생선으로 가득 채운 고깃배도 부지런히 항구를 들락거렸다. 이렇듯이 봄은, 남해에서 여러 풍경이 합치고 포개져 제 모습을 드러냈다.

알고 보면 섬에서 저절로 되는 일은 거의 없다. 봄도 마찬가지다. 섬 사람의 고단한 노동 없이 봄 혼자서는 뭐 하나 제대로 부리지 못한다. 남해 다랑논의 수채화 같은 초록빛 풍경에는 사실 섬의 절박한 삶이 녹아 있다. 산비탈에 겨우 기대어 사는 사람이 어떻게든 먹고 살려고 억지로 땅을 깎고 석축을 쌓아 일군 몇 뙈기 안 되는 농토가 다랑논이다.

남해 다랑논은 이른바 ‘삿갓논’이라 불리는 논배미가 허다하다. 삿갓에 가려질 만큼 논이 작아서 삿갓논이다. 턱없이 작은 삿갓논에는 자투리 땅도 버릴 수 없었던 섬 사람의 비루한 사정이 포개져 있다. 삿갓논에는 농기계를 들이는 일도 쉽지 않다. 요즘도 농부가 손수 씨를 뿌리고 일일이 김매는 땅이 많다. 이맘때 다랑논에 푸릇푸릇하게 올라온 시금치와 마늘의 초록 빛깔은 가을부터 농부가 흘린 땀의 흔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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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 유구마을 시금치 밭. 이른 봄 첫 수확 풍경이다.


남해에서 만난 농부 대부분은 연세 지긋한 어르신이었다. 남해군 인구 가운데 65세 이상 노인이 전체의 30%가 넘는다고 했다. 내막을 알고 나니 층층이 연둣빛으로 물결치는 다랑논의 풍광은 더 이상 아름답지 않았다. 격한 곡선을 그리는 다랑논의 두렁에 어르신의 굽은 등이 겹쳐졌다.

바다도 사정이 다르지 않다. 뱃사람에게는 계절이 따로 없다. 남해의 어부는 한겨울에는 물메기·대구 등을 낚느라, 봄에는 도다리·털게 등을 건져올리느라 쉴 틈이 없다. 봄이 오면 바다가 순해져 뱃일이 수월해지는 것이 그나마 위안거리다. 남해 단항포구에서 만난 어부의 말이다.

“뱃사람한테 계절이 어딨어예. 추워도 물고기만 많이 잡히면 마음은 봄이재. 그래도 봄이 오긴 했나봐예. 살 오른 도다리가 부쩍 올라와예.”

그래도 남해에서 만난 어르신은 하나같이 표정이 밝았다. 그물을 건져 올리는 그들의 힘찬 몸짓에서도 봄이 느껴졌다. 남해의 봄 소식을 전한다. 들판의 푸릇푸릇한 생명력으로, 밭일하는 할매의 분주한 몸짓으로, 봄 생선의 싱그러움으로, 그렇게 봄은 다양한 표정을 짓고 인사를 건네왔다.


글=백종현 기자 jam1979@joongang.co.kr
사진=임현동 기자 hyundong30@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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