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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장점의 귀환…패스트 패션은 싫어, 나만을 위한 옷 원해

양장점의 귀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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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원하는 디자인과 체형에 맞춘 맞춤 옷을 하는 현대판 양장점이 최근 다시 등장하고 있다. 사진은 한남동 ‘테일러블 포 우먼’ 매장. 매장 한쪽에선 가봉을 하고 있고, 다른 한쪽에선 손님의 치수에 맞춰 옷본(패턴)을 만들고 있다.



치수 재고 패턴 뜨고, 완성까지 10여 일
한 땀 한 땀 공들여 오래 간직하는 옷
코트 100만원대, 원피스 80만원대


70·80년대부터 기성복에 밀린 양장점
한국패션 성숙기, 자신만의 취향 찾으면 부활
“오직 하나뿐인 내 옷 생각하면 기분 좋아”



양장점. 지금은 사라진 여성복 전문 맞춤옷 가게의 이름이다. 1950년대부터 70년대 초반까지 여성복을 파는 곳은 양장점이 유일했다. 하지만 80년대 들어 기성복이 대중화되면서 양장점은 자취를 감췄다. 그런데 최근 양장점 형태의 옷가게들이 다시 나타나고 있다. 과거 양장점과 닮은 듯 다른 ‘현대판 양장점’이다.


파리 유학파 부부의 ‘에흐 드 쥬’

제일기획 본사 아래쪽 한남동 골목을 걷다 보니 한 가게의 쇼윈도에 눈에 익은 옷이 보였다. 영화 ‘뷰티 인사이드’에서 배우 한효주가 입고 나온 원피스였다. 가게에 들어가 “저 옷 보여 주세요”라고 하자 “저 옷은 디자인만 참고하시고 구매를 하게 되면 고객님의 신체 사이즈를 직접 재서 몸에 맞춰 만들어 드립니다”라는 답이 돌아왔다. 사이즈별로 옷을 준비해 놓고 파는 보통의 의류 판매장과는 달랐다. 고객의 몸에 딱 맞춰 주는 맞춤 제작 방식이었다.

이곳은 김진화·박지혜 부부가 운영하는 ‘에흐 드 쥬’다. 박지혜씨는 디자인을 담당하는 디자이너, 남편 김진화씨는 아내의 디자인을 옷으로 만들어 주는 모델리스트(패턴사)다. 15평 남짓한 매장의 반은 쇼룸 겸 매장이고, 나머지 반은 김씨가 패턴을 만들고 옷의 수정하는 작업 공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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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이터’란 의미의 불어 ‘에흐 드 쥬’를 운영하고 있는 김진화·박지혜 부부. 박지혜씨는 디자이너, 남편 김진화씨는 아내의 디자인을 옷으로 만들어 주는 패턴사다.



이곳에 걸려있는 옷은 20벌 정도. 모두 박씨가 디자인한 옷들이다. 간결하지만 여성스러운 원피스와 코트, 블라우스 위주다. 에흐 드 쥬를 찾아온 고객은 마음에 드는 디자인을 고른 후 자신의 치수를 잰다. 김진화씨는 고객의 몸에 맞게 다시 패턴을 떠서 옷을 만들어 준다.

한 사람을 위한 패턴을 만드는 데만 꼬박 하루가 걸린다. 옷 만드는 과정 전체를 두 사람이 직접 손으로 하기 때문에 만들 수 있는 옷의 양이 많지 않다. 하지만 부부는 “우리가 옷을 공부하며 배우고 옷에 대해 생각한 것이 바로 이런 것”이라며 자신들의 방식을 고집한다.

두 사람은 국내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함께 파리로 유학을 떠났다. 공부를 마친 후 현지에서 실무 경험을 쌓고 2011년 한국으로 돌아왔다. 박씨는 파리 의상조합, 디자인 스튜디오 베르소, 유명 패션 브랜드 ‘발망’ ‘마틴싯봉’ 등에서 3년간 디자이너로 일했다. 남편 김씨는 파리의 유명 패턴 전문학교 아이쎄페(A.I.C.P)에서 공부했다. 두 사람은 2012년부터 자신들의 작은 작업실 겸 매장을 열어 옷을 만들기 시작했다. “우리가 하고 싶은 옷을 마음껏 하면서 놀 수 있는 공간과 브랜드를 만들고 싶었다”는 부부는 가게 이름도 프랑스어로 ‘놀이터’라는 뜻의 ‘에흐 드 쥬’로 정했다.

이곳을 찾아오는 사람은 거리를 지나다 쇼윈도의 옷을 보고 들어오거나 이들의 온라인 사이트에서 마음에 드는 옷을 보고 매장을 찾아온다. 치수를 재고 나서 옷이 완성되는 데 걸리는 시간은 열흘 정도다. 가격은 원피스가 80만원대, 코트가 170만원대다.


 
원하는 대로 만드는 ‘테일러블 포 우먼’
 
일명 ‘한강진길’이라 불리는 한남동 뒷골목엔 이런 형태의 패션 매장이 곳곳에 있다. 에흐 드 쥬 맞은편에 있는 ‘테일러블 포 우먼’은 손님이 원하는 옷을 그대로 만들어 주는 맞춤옷 전용 가게다. 50~60년대 동네 양장점과 같은 방식이다. 맞춤 수트나 맞춤 코트를 주로 만들며 웨딩용 드레스도 제작한다.

이곳은 골목 반대편 끝에 있는 남성 맞춤 양복점 ‘테일러블 포 맨’의 여성복 버전이다. 테이러블 포 맨의 곽호빈 대표가 지난해 3월 여성복 전용 맞춤복 매장으로 문을 열었다. 남성용 맞춤복을 본 여성들이 자신들의 옷도 만들어 달라고 요구했기 때문이다.

“옷이란 추억을 공유하는 것”이라고 정의하는 곽 대표는 “주문 제작 형식으로 만들어진 옷이 옷의 본질에 더 가깝다”고 생각한다. “패스트 패션 브랜드 옷처럼 한 시즌 입고 버리는, 입고 잊어버리는 옷이 아니라 오랜 시간 간직하면서 기억하는 것이 바로 옷”이라는 게 그의 말이다. 그 자신도 아버지가 물려준 시계를 고쳐 쓰고, 8년 전 맞춘 수트를 아직도 손질해 가며 아껴 입는다.

이곳에 오는 사람들은 둘로 나뉜다. 명품 브랜드 옷이 싫은 사람, 혹은 자신의 마음에 드는 코트나 재킷을 기성복에서 찾지 못한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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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춤 양복점 ‘테일러블 포 맨’과 여성복 맞춤 전문점 ‘테일러블 포 우먼’을 운영하는 곽호빈 대표.

테일러블 포 우먼에 온 손님들은 자신이 원하는 옷을 디자이너와 상담한다. 김슬기 매니저는 “상담은 보통 ‘베이직한 겨울 코트를 맞추고 싶은데 어떻게 할까요’라는 질문으로 시작되지만 이야기하다 보면 손님들 모두 자신이 머릿속에 생각하는 디자인이 있더라”고 말했다. 디자인과 원단을 선택한 후 손님들은 몸의 치수를 잰다. 치수를 재는 부위만도 40여 곳이 넘다 보니 이 과정에도 시간이 꽤 걸린다.

치수대로 옷본(패턴)을 만드는 데 2~3일, 첫 번째 가봉 옷이 나올 때까지 7~10일이 소요된다. 가봉 후 옷이 완성될 때까지 다시 10~14일이 걸린다. 완성된 옷을 찾을 땐 고객이 반드시 가게에 다시 가야 한다. 직접 입어봐야 하기 때문이다. 곽 대표는 “한 벌의 옷을 만들기 위해 많은 수고를 했는데 완벽한 옷이 되려면 마지막 피팅을 꼭 해야 한다”고 말한다. 가격은 수트의 경우 130만~250만원대, 코트는 150만원대다. 고급 원단인 캐시미어를 사용할 경우엔 코트 가격인 300만원대를 넘는다.

 

국내에서 못사는 옷, 만들어주는 ‘부리’

‘부리’의 디자이너 조은혜 실장은 국내에 매장이 없다. 신사동 가로수길 뒤편 주택가 골목 건물 2층에 차린 쇼룸 겸 작업실이 전부다. 조 실장은 이화여대 작곡과를 졸업한 후 옷이 좋아 옷을 만들기 시작한 특이한 경력의 소유자다. 작곡 전공 후 다시 패션 공부를 해서 자신의 브랜드를 낸 그는 서울패션위크 트레이드쇼를 통해 해외 바이어에게 옷을 판매한다.

“매장에 옷을 만들어 걸어놨는데 찾는 사람들이 별로 없었어요. 그래서 서울패션위크에 참가했는데 쇼에서 내 옷을 본 바이어들이 찾아오기 시작하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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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사동 가로수길에 있는 ‘부리’의 쇼룸엔 조은혜 디자이너의 작업 공간과 샘플실이 있다. ‘부리’의 조은혜 디자이너는 해외 바이어를 대상으로 도매를 주로 하면서 자신의 옷이 좋아 찾아오는 사람에겐 맞춤복을 제작해 준다.



처음엔 일반인 대상 옷은 만들지 않았다. 하지만 패션위크에 선보인 옷을 본 연예인 스타일리스트와 패션잡지 기자들이 그의 옷을 알아보기 시작하면서 일반인 손님도 하나둘 늘었다.

20평 남짓한 작업실은 3분의 2가 작업 공간이고 나머지는 바이어와의 상담을 위한 쇼룸 공간이다. 그의 옷을 찾은 사람들은 평범한 옷을 거부하는 이들이다. 손님들은 “아방가르드한 디자인이 독특해서 좋고, 입으면 편하다”고 평가한다.

그는 만들어 둔 옷이 손님의 몸에 맞으면 그걸 그대로 팔고, 맞지 않으면 몸에 맞춰 다시 제작해 준다. 옷을 맞추고 싶을 땐 전화로 예약해야 한다. 가격은 코트의 경우 100만원대 초반, 재킷은 40만~80만원대다. 원피스는 보통 70만원대지만 손이 많이 가는 정교한 작업이 필요한 옷은 130만원까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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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개성의 시대에 내 개성 찾기
 
50~60년대 명동과 이대 앞 거리에는 ‘oo양장점’ ‘xx 패숀’ 이란 이름을 단 양장점들이 즐비했다. 패션 거리로 이름난 곳이 아니어도 동네마다 양장점은 꼭 있었다. 양장점은 여자들이 옷을 해 입는 장소이면서 동시에 차를 마시며 수다를 떠는 사랑방 역할도 했다.

하지만 74년 LF패션의 전신인 ‘반도패션’이 등장하고 뒤이어 ‘논노’ ‘에스에스 패션’ 등 기성복 회사들이 생겨나면서 국내 여성복의 흐름은 바뀌었다. 80년대 중반 이후엔 아시안게임과 서울올림픽을 치르며 해외 기성복 브랜드가 인기를 얻기 시작했다. 명동과 이대 앞 거리의 양장점은 청담동이나 압구정동으로 자리를 옮겼다. 사람들은 양장점 대신 백화점과 대형 쇼핑몰로 발길을 돌렸다.

90년대 후반 외환위기(IMF)는 패션 시장의 양극화를 가져왔다. ‘제일평화’ ‘밀리오레’ ‘두타’ 등 동대문 상가에서 판매하는 저가의 ‘동대문 패션’과 고가의 해외 럭셔리 패션으로 시장이 양분됐다. 2000년대엔 ‘자라’ ‘유니클로’ 같은 해외의 유명 패스트패션(SPA) 브랜드가 상륙했다. 여자들의 옷은 점점 비슷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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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흐 드 쥬’의 옷. 왼쪽은 영화 ‘뷰티 인사이드’에서 한효주가 입었던 원피스, 오른쪽은 지난달 밀라노 패션위크에 출품했던 블라우스와 스커트다.


하지만 최근에는 비슷한 옷을 거부하고 나만의 옷을 원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주부 이서진(42·송파구 잠실동)씨는 “해외 SPA 브랜드에서 옷을 많이 사는데 미용실에 가면 꼭 내가 산 옷과 같은 옷을 입은 사람을 한두 명씩 보게 된다”며 “이제 그런 옷은 안에 이너웨어로만 입고 재킷·외투 같은 아우터는 디자인이 특이한 옷을 찾아 산다”고 했다. 양장점 시대와 기성복 시대를 모두 겪은 서미자(62·서초구 서초동)씨는 “홈쇼핑에서 나오는 옷이 저렴하고 괜찮다고 생각해서 자주 사지만 입고 나갔다가 같은 옷을 입은 사람을 꼭 만나게 되고 그러면 슬그머니 자리를 피하게 된다”며 “과거 양장점에서 옷을 맞춰 입던 여대생 시절엔 비슷한 느낌이라도 똑같은 옷을 입은 사람을 마주치는 일은 없었다”고 말했다.

김동수 동덕여대 모델학과 교수는 ‘양장점 시대’가 그립다고 했다. 고등학교 졸업 후 동네 양장점에 가서 무릎 바로 아래까지 내려오는 꽃무늬 감색 원피스를 맞췄다는 김 교수는 “내가 원하는 디자인으로 나만을 위해 만든 그 옷만 생각하면 아직도 기분이 좋다”며 “그 옷을 좋아해 미국에 이민을 떠날 때도 챙겨 갔다”고 말했다.

이 같은 흐름에 따라 기성복 일색이던 국내 패션가에도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 에흐 드 쥬 같은 현대판 양장점이 등장하고, 이런 곳을 찾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간호섭 홍익대 패션디자인과 교수는 “한국 패션은 성숙기에 접어들었다”며 “우리나라보다 앞선 일본의 경우 도쿄 다이칸야마나 아오야마 뒷골목에 이런 현대판 디자이너 양장점이 자리를 잡고 있는 것처럼 양장점을 찾는 사람들이 늘어날 것”이라고 전망했다. 패션에서도 몰개성의 시대가 가고 개성을 찾는 시대가 됐다고 분석했다.

『라이프 트렌드 2016』의 저자인 트렌드 분석가 김용섭 소장(날카로운상상연구소)은 이를 “나만의 가치와 취향을 찾으려는 움직임”으로 봤다. 해외 유명 패션 브랜드를 소유하면서 느끼던 만족감을 이제는 자신만의 가치가 담긴 물건을 사용할 때 느끼게 됐다는 것이다. 그는 “남들과 다른 자신의 개성을 표현할 수 있는 옷이나 내 몸에 맞춘 흔하지 않은 옷을 찾으면서 자신만의 취향을 만들어 나가는 이들이 늘고 있다”고 말했다.

글=윤경희 기자 annie@joognang.co.kr
사진=김경록 기자 kimkr8486@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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