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 단어로 정의할 수 없는 미묘함

“관객이 ‘이렇게 진지한 장면에서 웃어도 되나’ 눈치 보며 피식피식할 때 배우로서 정말 기분 좋아요. 코미디영화에서 배우가 아예 대놓고 코미디 연기를 하면 오히려 웃음이 잘 안 터져요. 누군가 나를 웃기려 한다는 의도가 먼저 읽히면 안 웃기거든요. 의도는 그게 아닌데 상황이나 정서가 거기서 살짝 삐끗하면, 관객이 그 삐끗함에 공감하면 웃죠. 연극 무대에 설 때 그런 걸 많이 느꼈어요. 전 그런 미묘함을 연기하는 게 좋아요.”
여기서 최근 그가 출연한 영화의 숫자를 헤아려 보자. 2013년에 ‘집으로 가는 길’(방은진 감독) 등 네 편, 2014년에 ‘몬스터’(황인호 감독) ‘인간중독’(김대우 감독) 등 여덟 편, 지난해에는 ‘베테랑’(류승완 감독) ‘오피스’ ‘내부자들’(우민호 감독) 등 일곱 편에 달한다.
이렇게 많은 영화에서 줄기차게 보아왔는데도 그의 연기가 쉽게 질리지 않는 건 그가 추구하는 연기의 미묘함 덕분인지 모른다. 그렇다면 여기서 그 미묘함을 이렇게 표현해 보는 건 어떨까. ‘의뭉스럽다.’ 겉으로 보이는 게 다가 아니라 속으로 뭔가 다른 꿍꿍이를 숨기고 있는 느낌? 그래서 어디로 튈지 모르며, 무엇이든 가능하고, 눈을 뗄 수 없는 캐릭터. ‘집으로 가는 길’의 프랑스 주재 한국 대사관 추 과장. 이역만리 프랑스에서 마약 운반범으로 붙잡힌 평범한 주부 정연(전도연)을 도와주겠다는 건지, 아니라는 건지 꼬집어 말할 수 없는 그 묘한 태도를 떠올려 보라. 그가 무표정한 얼굴로 망치를 들고 있는 모습에서 영화를 시작해, 직장 동료들의 기억 속에 사람 좋고 성실하지만 무능한 인물로 등장하는 ‘오피스’의 김 과장은 또 어떠한가. 죽어라 도망치다 숨이 턱에 차오르자 ‘에라, 모르겠다’는 식으로 형사 차에 올라타는 ‘베테랑’의 중고차 매장 업주도 빼놓을 수 없다.
-서스펜스를 타고난 배우
의뭉스러운 연기를 한다는 이야기를 건네자 “으흐흐흐” 그가 웃는다. “맞아요. 그 인물을 입체적으로 그려 내고 싶은 욕심, 하나의 이미지가 아니라 살아 숨 쉬는 사람으로 보여주고 싶은 바람이 있으니까요.” 그 의뭉스러움을 그는 ‘서스펜스’라 부른다. “연극 할 때 ‘배우는 한마디 한마디에 서스펜스가 있어야 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어요. 코미디든 멜로든 공포든 ‘저 인물이 다음에 어쩌려고 저러지’ 하는 불안을 느껴야 관객이 그 인물에 계속 몰입한다는 거죠. 그래야 웃겨도 진짜 웃기고 슬퍼도 진짜 슬퍼요.” 그가 ‘서스펜스 연기’의 대가로 꼽는 이가 바로 송강호다. “아주 담백하면서도 다음에 뭘 할지 예측이 잘 안 되는 연기를 하잖아요. 그러다 뜻밖의 순간에 뭔가 툭 나오니까 그게 그렇게 웃기고 또 짠하게 다가오는 것 같아요. 송강호 선배의 팬이에요.”
어쩌면 그야말로 서스펜스를 타고난 배우인지도 모른다. 인터뷰하는 내내 마주 본 그의 표정부터가 그렇다. 커다란 입은 서글서글하게 웃고 있는데 날카롭게 반짝이는 눈초리가 매섭다. 일찍이 충무로에 그의 인장을 새긴 것도 바로 오묘한 표정이었다. 대사 한마디 없이 꿈에 나올까 무서운 연기를 보여준 ‘김복남 살인 사건의 전말’(2010, 장철수 감독)의 철종 말이다. 외딴 섬마을에서 갖은 학대를 당하며 살아온 복남(서영희)의 섬뜩한 복수를 그리는 이 스릴러에서, 철종은 형수인 복남을 정기적으로 욕보이는 인물로 나온다. 영화 내내 얼빠진 표정으로 여자만 보면 마치 그것이 제 당연한 권리라도 되는 듯 뻔뻔하게 굴었던 그의 연기가 뇌리에 박힐 만큼 강렬했다. 잔혹하고 괴상한 유머를 추구했던 스릴러 ‘몬스터’에서 정체불명의 킬러 성문을 연기했던 것도 마찬가지다. 힘을 뺀 즉흥 연기로 관객의 배꼽을 간질였다가, 순식간에 고강도 액션을 펼치며 관객의 어깨를 움츠러들게 했으니까. 물론 대사 한마디 없이.
목소리는 그의 또 다른 힘이다. 그가 말을 하기 시작하면, 그 특유의 오묘한 연기는 한층 더 강력한 날개를 단다. 안정된 저음인데, 말소리의 박자가 날렵하고 어미 처리가 익살스러워 미묘한 느낌이다. 예를 들어 볼까. ‘집으로 가는 길’에서 프랑스의 교도소에 수감된 주인공 정연이 한국에 있는 남편(고수)과 통화를 하려 하지만 남편이 전화를 받지 않는 장면, 지켜보던 추 과장은 “안 받으시나 본데에~, 안타깝네요!”라 한마디 한다. 신기하게도 그 짧은 말에 약간의 안타까움, 빨리 전화기를 내려놓으라는 압박, 이 모든 상황에 대한 귀찮음 등등의 감정이 다 묻어난다. “내 목소리가 좀 특이한 것 같긴 해요. 연기하기 전에도 쓰는 단어나 말의 박자 같은 게 재미있다는 얘기를 듣기는 했는데, 연기를 하면서부터 말투가 좀 더 독특하게 변한 것 같아요. 말 한마디를 해도 어떤 인상을 남기고 싶은 욕심 때문 아닐까요.” 어쩌면 그의 목소리와 말투는 그의 연기만이 아니라 배성우라는 사람 자체가 의뭉스럽다는 걸 알려주는 실마리가 아닐까. “저요? 다른 사람보다 능청스럽거나 의뭉스러운 구석이 많은 건 맞아요. 하하하. 친한 사람에게도 속마음을 잘 안 드러내거든요. 마음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게 창피하다고 할까(웃음). 그래서 계속 농담만 하는데 그 안에 슬쩍슬쩍 진심을 던지는 식이죠.”

-그에게 같은 연기란 없다
1993년 뮤지컬 ‘레미제라블’로 데뷔해, 설경구, 황정민 등을 배출한 극단 학전에 들어간 것이 2000년. 뮤지컬·연극 무대에 설 때부터 하나의 이미지에 갇히는 게 싫어 일곱 살 아이부터 중년 여성까지 다양한 역할을 맡아 왔다. 독특한 코미디 ‘미쓰 홍당무’(2008, 이경미 감독)의 피부과 의사 역으로 스크린에 데뷔한 뒤로도 마찬가지다. “출연작을 고를 때도, 역할의 임무가 직전에 했던 캐릭터와 너무 비슷하면 피하게 되더라고요.” 최근 수많은 영화의 인상적인 조연으로 주목받으면서 그에게는 또 하나의 고민이 생겼다. 역할의 비중이 커지고, 출연작이 늘고 있다 보니 “전보다 더 신중하게 출연작을 골라 연기해야겠다”는 마음인 것. “관객이 보기에 질리지 않는 연기를 하는 기본은, 그 작품 안에 완벽히 녹아드는 거예요. 어떤 배우의 연기가 그 작품에 도움이 되고 그걸 더 재미있게 만든다면, 아무리 튀는 연기를 해도 관객이 질려 하지 않을 거라 믿어요.” 그가 자신이 맡은 인물뿐 아니라 작품 전체를 중시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연극은 무대 위에서 보여주는 배우의 의도가 선명하게 보이죠. 그래서 연극 무대에 설 때는 ‘내가 이렇게 하면 관객이 이렇게 느끼겠구나’ 감이 잡히는데, 영화는 아직 잘 모르겠어요. 같은 연기라도 촬영 방법이나 편집에 따라 아주 다르게 보일 수 있으니까요.”
충무로에서 개성 넘치는 연기로 한창 주목받고 있는 요즈음, 그 기대를 안고 더 큰 활약을 보여줄 수 있을까 하는 고민 같은 건 그를 괴롭히지 못한다. 그 이야기를 꺼냈더니 배성우가 옛날이야기를 풀어놓듯 이렇게 말한다. “연극은 한 작품의 한 역을 매일같이 몇 달씩 연기하고 또 연기하는 거잖아요. 그러다 어느 날 내 연기가 정말 만족스럽고 관객 분위기도 좋고, 공연이 끝난 순간 아드레날린이 머리끝까지 가득 차 있는 기분을 느끼는 순간이 와요. 그 다음 날 어제와 똑같이 하려 마음먹고 무대에 오르면 백이면 백 공연을 망치게 돼 있어요. 아무리 잘해도 어제와 같은 만족을 느낄 수 없으니까. 그런 날일수록 다시 차근차근 기운을 모은다는 느낌으로 새롭게 시작해야 한다는 걸 그때 배웠어요. 지금도 그래요. 2013년부터 지난해까지 충무로와 대중의 많은 관심을 얻었다고 그걸 그대로 반복하는 게 최선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이럴 때일수록 연기를 처음 시작했을 때 그 충실한 마음을 돌이켜 새로운 시도를 해야죠.” 그의 다음 작품은 범죄 오락영화 ‘더 킹’(한재림 감독), 한국 사회를 움직이는 권력자들의 한 축인 검사 동철 역이다. 그로부터 배성우의 새로운 연기를 만나게 될 거라는 사실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배성우의 개성이 폭발한 영화들>
미쓰 홍당무(2008, 이경미 감독)

김복남 살인 사건의 전말(2010, 장철수 감독)

집으로 가는 길(2013, 방은진 감독)
그가 연기한 프랑스 주재 한국 대사관 추 과장은 극 중 관객을 가장 가슴 치게 만드는 인물이다. 하지만 배성우는 그 인물을 좀 더 복합적으로 연기하려 했다. “스스로는 사건을 상부에 보고했는데 위에서 정연을 도우라 하지 않으니까 그 지시에 따른 것뿐이라 안도하죠. 센 캐릭터가 아닌데도 여러 면으로 볼 수 있는 인물을 연기해서인지 이후 작품이 많이 들어오기 시작했어요.”
몬스터(2014, 황인호 감독)

보호자(2014, 유원상 감독)

-오피스(2015, 홍원찬 감독)

글=장성란 기자 hairpin@joongang.co.kr, 사진=정경애(STUDIO 7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