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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대북 외교의 판이 바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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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터 차
미국 조지타운대 교수

이번 봄에 한국어 번역본이 출간되는 『까다로운 국가 북한의 과거와 미래(The Impossible State: North Korea, Past and Future)』에서 나는 북한과 협상하는 나라들이 빠질 수밖에 없는 ‘협상 함정’에 대해 언급했다. 미국의 경우에는 ‘지나치게 합리적이다(being too reasonable)’라는 미국의 명망이 문제다. 미국은 북한과 어떤 합의에 이를 때 극도의 정성을 기울여 보상 문제, 합의가 깨졌을 때의 징벌, 실행 단계의 동기화(同期化)와 시간표를 합리성을 기반으로 준비한다. 쭉 그래왔다. 1994년 제네바 합의이건, 2007년 이후 6자회담 합의이건, 결국 도중 하차한 오바마 행정부의 ‘윤달 합의’건 말이다.

25년간 유지된 ‘선 비핵화, 후 평화협정’ 틀에 변화 조짐
비핵화 포함된 평화협정 회담이 학술 차원에선 논의 중


 하지만 평양은 이르건 늦건, 때가 되면 벼랑 끝 전술을 구사하기 시작한다. 미국이 약속한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미국에 요구하거나 자신이 약속한 것보다 못 미치게 실행한다. 모두가 알고 있듯이 북한은 완전히 비합리적이다. 하지만 동시에 모두가 알고 있는 것은 합의가 깨지면 또 다른 위기가 시작될 것이라는 점이다. 파국을 막기 위해서 모든 당사국은 결국 미국에 보다 큰 유연성을 요구한다. 누가 봐도 북한이 잘못한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북한이 공정성을 무시하고 신의를 저버렸다고 해도 진전을 이루려면 상수처럼 돼버린 북한의 불합리성은 어쩔 수 없고, 미국의 합리성에 기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 결과 미국이 어떤 새로운 유연성을 발휘하면 역내 국가들은 미국이 지도력을 발휘했다고 반기지만, 워싱턴 정가에서는 이를 절박함과 나약함이 결합된 결과라고 평가한다.

 나는 북한이 1월에 제4차 핵실험을 한 이후에도 같은 역학이 작동하고 있다고 주장하겠다. 지난주 월스트리트저널(WSJ)은 북한이 1월 6일 핵실험을 강행하기 불과 며칠 전 미국과 북한이 평화조약을 위한 회담을 하기로 비밀리에 합의했다고 보도했다. 핵실험 이후 미국이 회담을 없었던 일로 포기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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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김회룡]


WSJ의 보도에 대해 미 국무부는 보도가 잘못됐다며 다음과 같이 발표했다. ‘워싱턴은 핵실험 전에 평화조약 회담에 합의하지 않았다. 사실은 이렇다. 평양이 평화조약 회담을 제안했지만 미국은 이를 거부했다. 평화조약 회담이 비핵화 회담과 병행해 이뤄져야 한다는 미국의 요구를 평양이 거부했기 때문이다.’ 북한의 입장에 대한 국무부의 발언은 이번 달 초 내가 베를린에서 들은 것과 일치한다.

나는 소수 전문가 그룹의 일원으로서 북한 사람들과 투트랙(two-track) 대화에 임했다. 북한 사람들은 비핵화가 오늘날에는 더 이상 타당하지 않은, 과거에 대한 미국의 집착이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일까. WSJ의 보도가 정확했는지 아닌지는 문제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국무부의 반응에 담긴 함의다. 국무부가 본질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은 미국이 북한과 평화조약을 위한 회담을 할 준비가 됐다는 것이다. 단 평화조약 회담에는 비핵화가 구성 요소로서 포함돼야 한다. 이런 형국을 표현하는 미국 속어는 ‘flipping the script(판세 뒤집기)’다. 즉,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것은 지난 25년간 유지돼온 대북(對北) 협상의 형판(形板·template)이 점진적이지만 상당한 정도로 바뀌고 있는 현장이다.

 94년 제네바 합의나 일련의 6자회담 합의들이나 우선순위의 핵심 목표는 비핵화였다. 오직 비핵화 과정이 빠른 속도로 진행된 다음에야 관련 당사국들이 한반도의 항구적인 평화 체제를 구축하기 위한 논의에 착수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과거의 합의에 담긴 논리는 두 가지였다. 첫째, 한반도에서 핵무기를 제거하지 않고서는 한국전쟁을 종결시키는 평화조약을 상정할 수 없다. (미국 측은 냉전 종식 이후 조지 HW 부시 전 대통령이 한국에서 핵무기를 빼내옴으로써 이 조건을 충족시켰다.) 둘째, 비핵화를 평화조약에 선행되게 함으로써 평화조약이 북한의 핵무기 보유국 지위를 인정하는 효과를 갖게 하는 것을 막을 수 있다.

 WSJ 보도에 대한 국무부의 반응은 사실상 대북 대화에 새로운 선례를 남긴 것이다. 핵무기가 단지 한 요소에 불과한 포괄적인 평화협정을 위한 협상의 가능성이다. 이 가능성은 휴전협정을 대체하는 평화협정이 협상의 필요조건이라고 주장해온 사람들을 틀림없이 만족시킬 것이다. 동시에 새로운 가능성이 ‘법적인(de jure) 핵보유국으로서 미국과 평화조약을 맺는다’는 북한의 목표 실현이라고 보는 사람들을 틀림없이 격분시킬 것이다.

현 단계로서는 논의의 수준은 ‘학술적’인 성격에 불과하다. 머지않아 대화가 시작될 가능성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재의 고조된 긴장 국면이 안정기에 접어들고 외교관들이 협상 테이블로 되돌아갈 공간이 생긴다면 오바마 행정부나 차기 행정부는 다시금 미국의 합리성 문제와 맞닥뜨리게 될 것이다.

빅터 차 미국 조지타운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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