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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추억] 김성집 대한체육회 고문 별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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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런던올림픽(사진)과 52년 헬싱키올림픽에서 연이어 역도 동메달을 목에 건 김성집 대한체육회 고문은 당시 힘겨운 삶을 이어가던 국민들에게 용기를 준 ‘희망의 아이콘’이었다. [중앙포토]


“오늘날 한국 체육의 기틀을 다진 진정한 체육인이셨습니다.”

20일 걸려 도착한 런던에서 광복 후 첫 올림픽 메달


 22일 오후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을 찾은 김운용(85) 전 국제올림픽위원회(IOC) 부위원장은 고(故) 김성집 대한체육회 고문을 이렇게 회고했다. 그러면서 “1948년 런던올림픽에 참가했을 때 선수들 사기를 높이기 위해 고인이 앞장서서 노력했다. 부와 명예를 멀리하고 한국 체육을 위해 몸바친 이 시대에 보기 드문, 진실한 체육인”이라고도 했다. 

 ‘영원한 올림피언’ 김성집 고문이 지난 20일 향년 97세로 별세했다. 지난달 21일 노환으로 서울 중앙대병원에 입원한 후 끝내 기력을 회복하지 못했다.

김 고문은 1948년 해방 후 한국 선수단이 태극마크를 달고 처음 출전한 런던올림픽에서 역도 미들급 동메달을 땄다. 대한민국 국적으로 따낸 첫 올림픽 메달이다. 이어 6.25전쟁 중 참가한 1953년 헬싱키올림픽에서도 동메달을 추가했다.

 그의 삶은 한국 스포츠 발전사와 함께했다. 1919년 서울 필운동에서 태어난 김 고문은 휘문고보 2학년 때인 1933년 학교 역도부에 가입한 지 2년 반 만에 전국대회를 제패했다. 1936년 베를린올림픽 최종예선에서도 우승했지만 일본 체육계의 텃세로 본선에 진출하지 못했다.

해방 후 올림픽 출전권을 따낸 김 고문은 서울에서 출발한 뒤 부산을 거쳐 하카다·요코하마(이상 일본)·상하이(중국)·콜카타(인도)·로마(이탈리아)·암스테르담(네덜란드)을 거쳐 무려 20일 만에 런던에 입성했다. 김 고문은 여독이 풀리지 않은 채 경기에 나섰지만 이를 극복하고 역사적인 동메달을 따냈다.

 은퇴 이후엔 스포츠 행정가로 체육 발전의 초석을 쌓았다. 1960년 로마올림픽 국제심판을 시작으로 대한체육회 사무총장과 1972년 뮌헨올림픽 선수단장을 맡았다. 1976년 태릉선수촌장으로 부임해 13년 7개월(역대 최장기 재임기록) 동안 근무하며 훈련 시스템 개선 및 시설 현대화에 노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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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년 바르셀로나올림픽 사격 금메달리스트 이은철(오른쪽)과 김성집 당시 선수단장. [중앙포토]

이후 1984년 LA 올림픽 선수단장과 체육회 부회장, 1992년 바르셀로나올림픽 선수단장을 역임했다. IOC는 지난 1995년 한국 체육발전에 기여한 공을 인정해 김 고문에게 훈장을 수여했다.

 김 고문의 빈소는 조문객들로 붐볐다. 김종(55) 문화체육부 제2차관과 김정행(73) 대한체육회장이 다녀갔고, 박근혜 대통령은 조화를 보내 유가족을 위로했다.

휘문고 25년 후배인 차인태(72) 전 제주 MBC 사장은 “선배님이 모교를 찾아 ‘어떤 상황에서든 꿈을 잃지 말라’고 후배들을 격려하신 일이 생생하다”고 전했다.

허록(73) 대한역도연맹 부회장은 “중앙일보 칼럼니스트로 올림픽 뒷이야기를 전하실 때 고인이 행복해하셨던 기억이 난다”며 “체육인들의 표상 같은 분”이라고 말했다.

김 고문은 지난 1985년부터 6개월 여간 중앙일보 칼럼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올림픽 반세기’를 통해 런던올림픽 당시의 생생한 체험과 체육계 전반에 대한 생각을 전했다.

 김 고문의 유족으로는 부인 강순옥(93) 씨와 세 딸 김석희(71)·명희(66)·영희(62)씨, 아들 김철희(59) 인하대 교수가 있다. 장지는 경기도 안성 천주교 추모공원이다. 발인은 23일 오전 8시다. 대한체육회가 고인의 공로를 감안해 체육회장(葬)을 제안했지만 유가족이 정중히 고사해 가족장으로 치렀다.

송지훈·박소영 기자 milkyma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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