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Load Image preLoad Image
검색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주요 기사 바로가기
다른 기사, 광고영역 바로가기
중앙일보 사이트맵 바로가기
닫기
닫기

[시론] 과도한 저유가는 축복이 아니라 저주다

기사 이미지

손지우 SK증권 선임연구원

뉴밀레니엄은 유가 랠리와 함께 시작되었다. 브릭스(BRICs)로 불린 신흥국들이 세계 경제의 헤게모니를 장악한 게 큰 원인이었다. 이들의 폭발적 성장에 따른 수요 확대는 글로벌 원자재 시장의 공급 부족을 야기했다. 이에 따라 에너지·곡물·비철금속을 가리지 않고 대다수 상품가격이 급등했다. 2008년 리먼브러더스 사태 직전 유가는 배럴당 150달러에 육박했고, 상품 투자의 귀재인 짐 로저스가 ‘유가 200달러론’을 주창하기까지 했다. 유가는 이후로도 2014년까지 배럴당 100달러 이상을 유지했고, 그게 당연하게 받아들여졌다.

산유국과 석유 메이저 생산 확대는
경쟁자 제거하려는 치킨게임 일환
저유가로 인해 디플레 가능성 확대
B2B보다 소비·기술산업 키워야

 그런데 2014년 하반기에 생각지도 못한 일이 벌어졌다. 영원히 세 자릿수에서 머물 것 같던 유가가 하락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해 11월 석유수출국기구(OPEC) 정례회의가 ‘생산량 동결’ 결정을 내리자 유가는 속절없이 무너졌다. 2014년 말 유가는 50달러 수준으로 ‘반 토막’ 났고, 급기야 올 초에는 20달러 중반까지 무너져버리고 말았다. 도대체 이런 일은 왜 벌어지게 되었을까?

 고전경제학 이론에 따르면 먼저 공급과잉을 들 수 있다. 10여 년간 지속된 고유가 시대는 유가가 영원히 100달러에 머물 것이라는 환상을 사람들에게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이 때문에 주요 석유기업은 1970대 두 차례의 오일쇼크 당시에 이를 정도의 과도한 투자를 서슴지 않았다. 미국의 셰일혁명에 대한 투자가 폭발적으로 늘어난 것도 이런 현상의 한 단면이다. 신흥국의 국영 석유기업들도 석유 메이저를 능가할 정도의 공격적 투자를 단행했다. 이렇게 늘어난 잉여공급 물량들이 2010년 이후 시장을 서서히 압박했고 결국 유가급락 사태를 조장했다. 미국 금리인상, 이란 원유제재 해제, 미국 원유수출 재개는 단지 방아쇠를 당기는 역할을 했을 뿐이다.

 
기사 이미지
 하지만 이것만으로 잘 설명되지 않는 측면이 있다. 유가급락 이후의 상황이다. 유가가 급락하고 일부 국가와 기업이 부도 위기에까지 처했다면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이 작동해 공급물량이 줄고 가격이 회복돼야 한다. 하지만 OPEC과 다른 산유국, 미국을 포함한 공급국들은 오히려 산유량을 더욱 늘려 상황을 악화시키고 있다. 수요·공급의 원리가 통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이를 이해하려면 석유의 역사 혹은 본질을 볼 필요가 있다. 1860년대 2차 산업혁명과 함께 시작된 석유산업은, 존 록펠러의 ‘트러스트’ 시스템에서 보듯 치킨게임이 횡행하는 시장이었다. 자본력과 기술이 우월한 기업이 가격전쟁을 통해 다른 기업을 끊임없이 무너뜨리고 인수하면서 독점화하는 과정을 반복했다. 이번에도 다르지 않다. 미국과 사우디아라비아가 석유패권을 두고 대립하고 있다는 것은 오해다. 그들은 가격 인하와 생산량 확대를 지속하면서 한계기업의 도산을 유도하고 있다. 이를 통해 90년대 후반과 같은 매머드급 인수합병(M&A)을 노릴 가능성이 크다. 시가총액이 300조원가량인 엑손모빌이 이에 버금가는 자금을 M&A 용도로 확보하고 있고, 시장가치가 1경원으로 추정되는 사우디 아람코가 지금에서야 상장을 추진하며 현금을 확보하려는 것도 그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지금의 치킨게임이 끝나기 전까지 저유가가 길어질 수 있다는 얘기다. 무려 15년 동안 평균 유가가 20달러에서 횡보했던 1985~2000년까지의 화두 역시 한계기업의 등장과 M&A였다.

 그렇다면 저유가가 한국에 시사하는 것은 뭘까. 첫째 저유가가 축복이라는 잘못된 시각에서 하루빨리 탈피해야 한다. 저유가는 공포다. 전 세계가 가장 두려워하는 디플레이션, 즉 ‘D의 공포’와 사실상의 동의어다. 유가 급락으로 인해 국내총생산(GDP) 세계 8위인 브라질을 비롯해 많은 신흥국이 위기를 맞고 있다. 이는 연관된 금융 및 실물 기업들의 위기를 조장하고, 소비 위축과 추가적인 자산가격 하락을 일으키는 악순환의 시작점이 될 수 있다. 세계 40위권 경제인 그리스 때문에 전 세계가 긴장했던 경험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둘째는 장기적으로 소비·기술 산업에 대한 육성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기업 대 기업(B2B) 업종으로 분류되는 중장비 산업은 매출과 이익이 유가와 연동되기에 장기 저유가로 타격을 입는다. 따라서 유가와의 연관성이 높지 않고, 오히려 원재료 가격 하락으로 마케팅과 연구개발(R&D) 여력을 증대시킬 수 있는 기업 대 소비자(B2C), 즉 소비·기술 산업을 장려해야 한다. 요즘 화장품·면세점·소프트웨어·바이오 같은 산업이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미국의 셰일혁명은 2005년 시작됐다. 그러나 한국은 2010년이 지나서도 셰일을 ‘신기루’라며 평가절하했다. 세계 경제의 혁신에서 한국이 또 한 발짝 멀어진 것이다. 저유가도 마찬가지다. 아직도 면밀한 분석과 구체적인 대안 없이 저유가를 축복이라고 여기며 상황을 쉬이 넘어가려 한다면 이는 또 한 번 한국에 위기로 다가올 것이다. 케인스는 그랬다. 가장 심각한 경제적 해악은 “리스크, 불확실성, 그리고 무지”에서 비롯된다고 말이다.

손지우 SK증권 선임연구원
AD
온라인 구독신청 지면 구독신청

PHOTO & VIDEO

shpping&life

많이 본 기사

댓글 많은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