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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호근 칼럼] 우수와 경칩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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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호근
서울대 교수·사회학

박근혜 대통령의 결기는 아버지를 꼭 닮았다. 아니 아버지 박정희를 넘어선다. 한번 작심하면 끝내 해내는 집념이 그렇고, 전광석화처럼 해치우는 결단력이 그러하다. 여성으로는 보기 드문 장부 스타일이다. 고(故) 김대중 대통령에게 노벨 평화상을 안긴 야심작 햇볕정책을 한순간에 끝장냈다. 개성공단 전면 폐쇄와 북한 자멸로 정책 플랫폼을 갈아치우면 자신이 심혈을 기울인 신뢰외교와 통일대박 드레스덴 선언 같은 기본 원칙이 무너진다는 것을 왜 몰랐을까만, 북한의 막무가내식 도발과 중국의 미온적 태도가 박 대통령의 좌절감과 변심을 자극했을 것이다.

 돈줄을 끊고 목을 졸라 명을 재촉한다! ‘개성공단 폐쇄는 시작에 불과하다’는 선언 속에 담긴 메시지는 비장하고 무섭다. 평양을 향한 기다림의 미소가 오뉴월의 한 맺힌 서리로 돌변했기에, 그리고 남한 국민이 견뎌야 할 한랭전선의 혹한이 어디까지일지 모르기 때문에. ‘힘을 모아 달라’는 대통령의 호소는 절박했지만 그 배경에서 전쟁의 그림자가 서서히 몰려오고 있음을 느껴야 했다. 돈줄을 끊고 압박을 가하는 전략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그래도 얘기가 먹혔던 과거와는 달리 아예 미사일 놀이에 넋이 나간 김정은을 생각하면 전쟁이 머릿속을 점령하는 것을 어찌할 도리가 없다.

 가슴을 쓸어내린 게 남한 사람뿐이랴. 급진 과격파 김정은이야 그러려니 했겠지만, 가장 놀란 사람은 아마 중국의 시진핑 국가주석일 거다. 단아한 미소를 머금은 한반도의 여인 박 대통령에게서 어디 그런 결기가 나왔을까, 아차 했거나, 최고의 환대 뒤에 숨겨둔 한국 홀대 전략이 간파당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멋쩍어진 시진핑은 미국 본토 공격용 무기인 대륙간탄도미사일 둥펑(東風)-31 발사 장면을 공개했다. 박 대통령이 사드 배치 결단을 내린 며칠 후였다. 그동안 움츠렸던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오랜만에 신이 났다. 오바마 행정부가 제출한 대북제재법이 최단 시간에 하원을 통과했고, 북핵 억제용 최신 무기들이 한반도를 에워쌀 예정이다. 1953년 휴전 이후 강대국 간 충돌 위험이 이렇게 고조된 적은 일찍이 없었다. 불길하기 짝이 없는 전운이 한반도 상공을 덮고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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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쟁, 겪어보지 않으면 모른다.’ 전쟁세대가 입에 달고 다녔던 그 무심한 말의 진가를 어찌 짐작이라도 할까만 멀리는 베트남전, 가깝게는 아프카니스탄, 우크라이나, 시리아 내전의 참상을 간접적으로라도 목격하지 않았는가.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의 아종(亞種)인 인류는 ‘지혜로운 종(種)’이라는 생뚱맞은 학명과는 달리 생존에 위협을 가하는 모든 생명체를 멸종시키는 것으로 유명하다. 지혜롭고 슬기로운 인간이 만든 문명은 본능 속에 감춰진 호전적 유전자를 순치하기는커녕 그 이기적 공격성을 더 뾰족하게 만들었다. 문명이 최고조에 오른 21세기에도 달라진 것은 없다.

 66년 전 시골길을 따라 남하하던 북한군 탱크는 오늘날 장난감이다. 그래도 무서운 살상무기였다. 영국 더타임스 특파원 앤드루 새먼이 쓴 『마지막 한발』은 중공군과 맞붙었던 임진강 설마리 전투 상황으로 전후 세대를 이끈다. 달빛 교교한 밤, 호각소리가 나면 마치 산이 통째로 움직이듯 적들이 다가온다. 그러곤 섬광처럼 번쩍이는 화기들. 새먼은 온갖 종류의 쇠붙이들이 새벽녘까지 머리 위를 난무했다고 썼다. 인간이 발명한 그 쇠붙이들이 영국 29여단 병력의 절반을 쓰러뜨렸다. 그런데 광명성, 둥펑, 사드 같은 최첨단 미사일이 발사되고 핵항공모함, 해상기동여단, 스텔스기, 랩터로 구성된 미 전략함대가 불을 뿜는 그 순간의 한반도를 상상이라도 할 수 있겠는가.

 한반도에서 강대국들의 전력 시위는 폭발성이 대단히 높은 힘겨루기다. 세계군사력의 60%가 집중된 이곳, 제3차 세계대전의 최전선이다. 핵전쟁보다 ‘무장된 평화’가 훨씬 낫다는 것은 상식이다. 북한이 핵 개발에 죽기살기로 매달렸고 또 실질적 핵보유국이 됐음을 인정해야 할 단계에 왔다면 핵문제 해결과 평화협정을 맞바꾸자는 북한의 요구를 진지하게 검토할 필요는 있겠다. 중국이 버티는 한 북한 괴멸은 현실성 없는 분노의 시나리오다. 압록강변 혹은 서해에 배치될 미국의 핵무기들을 중국이 보고 있겠는가. 결국 중국·북한의 전술핵과 미국의 핵우산이 대치하는 무장평화가 21세기 문명적 타협안이 아니겠는가.

 봄눈 녹아 흐르는 옥 같은 물에 생명이 해빙하는 절기 우수(雨水)에 한반도는 혹독한 북서풍으로 다시 한번 얼어붙을 예정이다. 그게 꽃샘추위라면 견딜 만은 할 텐데, 냉전시대를 녹였던 화해의 씨앗들이 매서운 칼바람에 싹틔움을 멈췄다. 절기는 어쨌든 바뀔 것인가, 한반도는 우수와 경칩 사이를 통과하고 있다.

송호근 서울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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