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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당합당 거부 ‘꼬마 민주당’ 창당 고비마다 명분 선택한 야당 외길

3당 합당을 거부한 이기택 전 총재가 1990년 6월 민주당(꼬마 민주당) 창당대회에서 당 총재에 선출된 뒤 두 손을 들어 당원들에게 인사하고 있다. [중앙포토]


한국 야당사에 큰 족적을 남긴 이기택 전 민주당 총재가 20일 새벽 심장마비로 별세했다. 79세.


고인이 평생을 바친 키워드는 민주화와 정권 교체, 지역감정 타파였다. 그는 이 목표를 위해 정치인생을 걸었지만 스포트라이트는 그의 것이 아니었다. 주연의 자리는 김영삼(YS) 전 대통령과 김대중(DJ) 전 대통령, 노무현 전 대통령이 차지했고 이 전 총재에게 돌아오는 건 조연의 몫이었다. 고인의 비서관으로 정계에 입문한 박관용 전 국회의장은 중앙SUNDAY와의 통화에서 “명분과 실리 중 항상 명분이 있는 쪽을 선택했기 때문에 양김(YS·DJ)과 대결하는 경우가 많았고, 그래서 항상 정치적 소수자로 밀리는 불운을 당했다”고 말했다. 박 전 의장은 “4~5일 전 함께 쇠고기 소금구이로 점심식사를 하며 옛날 얘기, 정치권 돌아가는 얘기를 나눴다. 건강에 이상이 없었는데 갑작스럽게 돌아가셨다”고 덧붙였다.


1937년 경북 영일군(현 포항시)에서 태어난 이 전 총재는 부산상고(현 개성고)와 고려대 상과대학을 졸업했다. 고려대 총학생회장 시절인 60년 4·19혁명 때 학생운동을 주도했다. 이것이 계기가 돼 고려대 은사였던 유진오 박사의 추천으로 67년 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전국구 의원에 당선됐다. 이후 부산 동래구에서 8·9·10대 국회의원을 지내며 신민당 사무총장과 부총재를 지냈다. 전두환 신군부가 집권한 81년 11대 총선에선 정치 규제에 묶여 출마하지 못했지만 85년 12대 국회에 재입성했다. 이후 양김과 함께 87년 민주화 투쟁의 중심에 섰고 14대 국회까지 모두 7선을 기록했다.


그의 정치역정에 변곡점이 된 세 가지 사건이 있었다. 생전 그가 가장 기억에 남는 사건으로 꼽곤 했던 79년 5·30 신민당 전당대회가 첫 번째다. 당시 총재 경선 1차 투표에서 이철승 전 국회부의장이 292표, YS가 267표로 결선에 진출했다. 3위로 탈락한 이 전 총재는 YS 지지를 선언해 당선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개인적으로 이철승씨가 고려대 선배였고, 그 양반이 대표 할 때 내가 사무총장을 해 인간적으로 도저히 배신할 수 없었지만 역사의 흐름을 감안해 결단을 내렸다”고 한 언론 인터뷰에서 그는 술회했다. 당시 YS의 당선을 저지하기 위해 중앙정보부가 이 전 총재의 자형 이임용 회장이 운영하던 태광산업 장부들을 압수하며 압박하기도 했다. 그의 결단은 YS의 국회의원 제명과 부마항쟁, 유신정권 해체로 이어지는 출발점이었다.


두 번째는 90년 1월의 3당 합당이었다. 당시 통일민주당 부총재로 합당 협상에 참가했던 이 전 총재는 돌연 합당에 참여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박관용 전 의장은 “당시 나와 3일 낮밤을 싸웠지만 결국 결별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민정당이 사실상 통합신당 지분을 독점하려는 당시 민정당 측 대표 박철언 의원의 의도를 간파했고 ‘들러리 노릇은 못하겠다’며 나간 것”이라고 회고했다. 이 전 총재는 노무현·홍사덕·이철 등과 함께 통일민주당을 탈당해 ‘꼬마 민주당’을 창당, 스스로 고난의 길을 택했다.


세 번째는 95년 DJ와의 결별이었다. 정계 복귀를 선언하며 민주당으로 돌아온 DJ는 이 전 총재와 마찰을 빚었다. 지방선거 공천을 놓고 감정싸움이 격해진 동교동계와 이 전 총재 측은 분당의 길을 걸었다. 꼬마 민주당 시절 이 전 총재의 비서를 지냈던 장광근 전 의원은 “DJ가 이 전 총재와 타협하기 위해 일산 자택에서 만나자고 했다. DJ는 당권이나 차기 대선후보를 약속하려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부인 이경의 여사 등이 만류했고 결국 DJ와 함께하지 않기로 결심을 굳혔다”고 전했다. 이후 그의 정치인생은 내리막길을 걸었다. 고인은 생전 40년 정치역정에 대해 “내가 YS와 DJ, 노무현 비위를 맞춰가며 살았다면 이기택 시대가 왔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렇게 사는게 옳지 않다고 판단했다”고 회고했다.


이후 97년 대선 직전 이회창 총재의 신한국당과 합쳐 한나라당을 창당했지만 대선에서 패배하며 또다시 야당의 길을 걸었다. 2000년 한나라당의 공천 탈락에 반발해 김윤환·김광일 등과 민주국민당을 창당했으나 부산에서 낙선했다. 2002년 대선 땐 과거 민주당 동지였던 노무현 후보를 지지하며 선거대책위 상임고문을 지냈으나 이후 참여정부의 노선을 비판하며 2007년엔 이명박 한나라당 후보를 지지했다. 2008년 이명박 정부에서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수석부의장에 올랐다.


이 전 총재의 부인인 이경의 여사와의 결혼 스토리는 유명하다. 전국구 의원에 당선된 후 총각으로 지내던 그를 보다 못해 측근들이 당시 이화여대 3학년이던 이 여사와 다리를 놓았다. 이 여사는 94년 남편 모르게 생면부지의 40대 여성에게 신장을 기증해 화제가 됐다.


빈소는 반포동 서울성모병원, 발인은 24일, 장지는 서울 수유동 4·19묘지다. 유족으론 부인 이경의 여사와 아들 성호씨, 딸 우인·지인·세인씨가 있다.


 


 


이충형·추인영·위문희 기자?adch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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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