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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 돈보다 쓴 돈이 진짜 내 돈” 산악인·평창올림픽 통 큰 후원

일러스트 박용석 parkys@joongang.co.kr



‘회장님’이 한턱 내는 회식날이다. 장소는 고깃집. 메뉴는 불고기다.?“맘껏들 드세요”라고 호기롭게 말하는 회장님을 기대하면 오산이다. “다들 1인분씩 시켜 먹고,?모자라면 따로 더 시켜 드세요”란 ‘당부의 말씀’이 이어진다. 직원들이 먹는 고기가 아까워서가?아니다. 먹을 수 있을 만큼 먹고 모자라면 더 주문해 먹는 것이 “돈을 더 잘 쓰는 법”이기 때문이다.



아웃도어 시장 연 성기학 영원무역 회장

노스페이스로 우리나라에 아웃도어 시장을 연 성기학(69) 영원무역 회장의 이야기다.



이달 2일 그가 회장을 맡고 있는 한국섬유산업연합회가 있는?서울 삼성동 섬유센터에서 그를 만났다. 경쟁이 격해진 아웃도어 시장의 현재와 미래,?그리고 그의 돈과 꿈에 대해 두 시간에 걸쳐 이야기를 나눴다.



 



기업가의 일은 돈을 버는 것이 아니라 쓰는 데서 시작되고 쓰는 데서 끝난다. 기업의 미래에 돈을 쓰면 투자가 되고 사회의 좋은 일을 하는 데 쓰면 사회공헌이 된다. 경영자가 돈을 적재적소에 써야 회사의 성장도 있다. 그런 면에서 성 회장은 돈 쓰기에 이문이 트여 있는 사람이다.



“아껴 쓰라는 교육을 받긴 했지만 부친은 한국전쟁 직후에도 일부러 어린 내게 돈을 많이 주시곤 했다. 사람은 돈을 쓸 줄 알아야 한다는 이유에서였다. 벌어들인 돈은 내 돈이 아니다. 내가 쓴 돈만이 진짜 내 돈이라고 생각한다.”



다운웨어를 방한복에서 기능성 의류로 스스로를 ‘버짓 마인드(budget mind·예산 감각)가 강한 사람’이라고 소개했다. 설명이 이어진다.



“나는 노름이 재미없다. 대신 작은 사업상의 갬블링(도박)을 매일 한다. 하지만 통 크게 매일 하는 건 못한다. (하려고 해도) 안 되더라. 지금까지 우리를 믿고 투자해 준 사람들을 배신할 수 없지 않나. 그 사람들에게 피해가 되는 일을 하면 안 된다. 옛날에 큰 브랜드를 하나 인수하려 했다. 그런데 결국엔 안 했다. 인수해서 잘 안 되면 주문자상표부착생산(OEM) 제품을 주문하는 바이어들에게 누가 되지 않겠나.”



서울대 무역학과를 졸업하고 가발 회사인 서울통상에 들어갔던 그가 3년 만에 회사를 그만두고 1974년에 세운 것이 국내 아웃도어 1위 기업 영원무역이다. 전 세계 40여 곳에 달하는 아웃도어 회사들이 성 회장을 통해 옷을 만들어 판다. 노스페이스를 비롯해 골드윈·에이글 같은 브랜드가 그가 말하는 주요 바이어다.



돌다리도 계산해서 두드려 보고 건너는 그가 제대로 돈을 쓴 건 97년의 일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다운웨어(오리털 의류)’가 시장을 주름잡고 있었다. 아웃도어용 기능성 의류라고 하기보다 방한복에 가까웠다. 당시 그의 눈에 들어온 건 TV에 비친 기자와 사진작가들이었다. 큰 사건이 터지거나 험한 곳을 찾아가는 사람들, 밖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이 입은 옷들이 전부 미국 노스페이스였다.



아웃도어의 가장 표준적인 제품부터 시작해야겠다는 생각에 노스페이스 제품을 만들면서 동시에 한국 판매권을 사들였다. 그의 투자는 맞아떨어졌다. 2001년 5000억원에 불과하던 아웃도어 시장은 2008년 1조8000억원 규모로 커졌다. 2013년엔 6조6000억원, 지난해엔 업계 추산으로 약 8조원에 달할 정도로 십수 년 사이 급속 성장을 이어갔다. 노스페이스는 이 폭풍 성장의 중심에 있었다. 고가에도 불구하고 중·고등학생들에게 큰 인기를 끌어 부모가 사주려고 등골이 휠 지경이라는 ‘등골 브레이커’란 원망 섞인 별칭까지 얻을 정도로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치킨게임 국내 시장서 해외로 눈 돌려 시장은 커졌지만 웃을 수만은 없었다. 경쟁자들이 대거 뛰어들자 재고가 쌓이기 시작했다. 가격할인 전쟁이 벌어졌다. 업계 1위인 영원무역조차 지난해엔 분기 기준으로 매출이 마이너스 성장을 할 정도가 됐다. 주가는 지난해 8월 8만2000원대를 찍었지만 연말이 되자 4만2000원대로 고꾸라졌다. 성 회장은 “경쟁이 충분히 도래한 것이 아니라고 본다”고 말했다. 상황이 더 나빠질 수 있다는 뜻이다. 덤덤한 표정으로 설명이 이어졌다.



“시장은 유한한데 생산은 무한하다. 시장 규모에 비해 엄청난 양을 만들어 ‘네가 죽나 내가 죽나 해 보자’는 식이어서 소비자에게 크게 외면당할까 걱정이다. 이렇게 가다가는 아웃도어 시장이 한 번 깨질 것으로 본다. 하지만 정점이 있으면 또 내려가는 때도 있다고 봐야 한다.”



안방 시장이 출혈경쟁을 동반한 치킨게임으로 치닫자 그는 눈을 바깥으로 돌렸다. 2013년 방글라데시에 가방 제조공장을 세웠고 지난해엔 스위스 프리미엄 자전거 브랜드 회사인 스콧(Scott)을 사들였다. 스콧은 1958년 세계 최초로 알루미늄 스키 폴을 개발했고, 2007년엔 가장 가벼운 자전거 프레임을 만들기도 한 저력 있는 곳이다. 그는 스콧의 의류 생산을 대행해오다 아예 이 회사 경영권을 인수했다. 불과 몇 달 뒤 성 회장은 스콧을 통해 독일 자전거 회사 베르가몬트(BERGAMONT)도 사들였다. 옷으로 시작해 신발·자전거까지 바깥활동에 필요한 다양한 제품군으로 외연을 확장하고 나선 것이다.



새롭게 노리고 있는 시장을 묻자 주저 않고 “세계 시장”이라고 답했다.



“미국·유럽 시장을 재발견해야 하고, 러시아·아프리카라는 새로운 시장도 있다. 아웃도어 시장 참여자들이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지 못하면 소비자들이 제품을 외면할 수밖에 없다. 끝없는 싸움이다.”



지출과 관련해선 촘촘한 계획 안에서 움직이는 걸 철칙으로 하다 보니 에피소드도 있다. 술은 못 마시지만 손님을 고려해 호텔에서 주문해야 하는 상황이 벌어지면 ‘1865’로 불리는 칠레와인 1865 리제르바 카베르네 소비뇽을 시킨다. 호텔에서도 가격 대비 마실 만하기 때문이다. 그는 “내가 그 와인을 좋아한다고 알려지면서 해당 와인 회사에서 12병을 보낸 적이 있다”며 “마침 동창회 하는 날이어서 은사님, 동기들과 함께 마시고 더 좋다고 선전하게 됐다”고 웃었다. 클래식 음악을 좋아하지만 음악감상은 라디오로 한다. 그는 “인터넷에서 세계 음악이 나오니 요즘엔 음악 서비스가 거저인 거 아니냐”며 “소비 수준으로만 보면 우린 옛날 왕의 수준을 넘어선 셈”이라며 파안대소했다.



방글라데시 고궁 유적 복원 나서기도 그는 수도꼭지 틀어 잠그듯 돈을 틀어쥐고 안 쓰는 사람은 아니다. 외려 반대다. 그는 기원후 13세기부터 있던 방글라데시 고도(古都)의 궁전을 최근 복원했다. 방글라데시 정부가 남은 도시지역을 복원해 달라고 요청해 실행 여부를 검토 중이다. 성 회장은 “지구상에 있는 모든 유적은 시간이 지나면 스러지게 돼 있는데 아름다운 문화유산을 내가 복원하면 찬란한 문화가 더 오랜 기간 남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



평창 겨울올림픽 후원에도 나섰다. 그는 “생전에 한 번 있을 일인데 성공시켜야 하는 건 시민으로서의 책무이기도 하다”며 “처음엔 일본 합작처(영원아웃도어)에서 반대했는데 설득해서 이사회 승인을 받았다”고 말했다. 성 회장은 “후원을 하기로 한 이상 사력을 다해서 해야지 우리의 유산이 된다”고 덧붙였다.



엄홍길·박영석씨 같은 유명 산악인 후원을 한 것도 그가 처음이었다. 성 회장은 히말라야에서 실종된 지 5년이 된 박영석 대장 이야기에 눈가가 촉촉해졌다.



“박 대장은 정직해 꼼수를 안 뒀다. 후배를 많이 돌보려고 했다. 박 대장은 1%의 기회만 있어도 덤빈다고 했지만, 나는 1%의 실패 확률이 있으면 제거하고 가는 극과 극인 사람이다. 언제든지 또 갈 수 있는데 과도한 위험에 노출되는 건 하지 말라고 했다. (사고 직전에도) 내려오는 게 좋겠다고 두 번이나 말했는데….”



혜안을 준 멘토 이야기로 화제를 돌렸다. 그는 대뜸 “우리 집에 놀러오라”고 말했다. 그의 본가는 경남 창녕. 우포늪에서 차로 7분 거리에 있는 ‘아석(我石) 고택’이 그가 말하는 ‘우리 집’이다. 한국전쟁 당시 화재로 소실된 고향집을 십수 년에 걸쳐 30여 채 복원했다. 땅을 팔아 빈농을 도운 고조부 아석 성규호 선생의 이름을 따 붙인 이곳은 우리나라에서 양파를 처음 재배한 곳이다. 양파 씨앗을 만들어 전파한 사람이 그의 부친 우석(愚石) 성재경 선생이다. 우석은 소유한 땅을 팔아 소작농에게 나눠주고, 서울에서 출판사를 하다 낙향했다. 일본의 원예서를 읽고 당시엔 환금작물이던 양파 씨앗 만들기에 나서 전국에 퍼뜨렸다. 성 회장은 “어릴 때부터 방학만 되면 양파 대를 말려서 씨를 만든 뒤 포장해 파는 게 내 일이었다”며 “영천과 무안 양파상들이 새벽부터 우리 집에 찾아와 줄을 서곤 했다”고 회고했다.



“집에 당호가 두 개 있는데 경근당(敬勤堂)과 일신당(日新堂)이다. 그 집에서 산 내가 영향을 받은 것은 당연하다. 부지런하고 날마다 새로이 발전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경영자는 사회와 기업의 중간점에 서 있는 사람으로 그 기업과 사회가 장기적으로 발전할 수 있느냐를 신경 써야 한다. 항상 멀리 내다보고 실용적으로 생각하신 부친이 내 롤모델이다.” 



 



 



김현예 기자 hyki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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