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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잃어도 나를 찾는 법 … 치매와의 투쟁


고령화가 급격히 진행되면서 알츠하이머는 더 이상 극소수의 사람들이 겪는 예외적 질환이 아니라 모두가 경계해야 하는 무서운 질병으로 인식되고 있다. 우리 정신에 닥칠 수 있는 이 무서운 재앙은 21세기 의학의 화두이자 심리학의 화두이기도 하다. 기억을 잃고, 정체성을 잃고, 마침내 스스로 생각하는 능력을 잃게 되는 것. 치료도 수술도 불가능한 이 참혹한 마음의 재앙을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언어로 그려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리사 제노바의 소설 『스틸 앨리스』는 알츠하이머에 대해 우리가 알아야 할 모든 것을 매우 쉽고 친밀한 언어로 이야기해 준다.


하버드대 심리학과 교수이자 사랑스러운 세 자녀의 어머니인 앨리스는 자신이 이루어낸 모든 것이 알츠하이머라는 재앙에 불타 버리기를 원치 않는다. 최고의 학자이자 훌륭한 교육자이기도 했던 그는 청중 앞에서 강연할 때도 전혀 긴장하지 않았으며, 주목받을수록 오히려 성취감을 느꼈다. 하지만 알츠하이머는 그녀의 가장 큰 자부심, 지성부터 갉아먹기 시작한다.


강연 도중 중요한 단어를 잊어버린 앨리스는 처음으로 청중 앞에서 실수를 저지른다. 급기야 매일 다니던 산책로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잃은 채 공황 상태에 빠지자 병원을 찾는다. 조발성치매 진단을 받은 후 가장 먼저 떠올린 것은 남편의 사랑이다. “존은 나의 정신을 사랑한다. 그가 알츠하이머에 걸린 나를 어떻게 사랑할 수 있을까?”


앨리스는 젊은 나이에 치매에 걸린 자신을 누구도 예전처럼 사랑해 주지 않을까 봐 깊은 절망에 빠진다. 자신이 목숨처럼 중히 여기던 일을 포기해야 한다는 것이 너무도 괴롭다. 자신도 모르게 지난번과 똑같은 강의를 하거나 수업 시간에 멍하니 앉아 있다가 나가는 일까지 벌어지자 학생들은 강의 평가를 통해 앨리스를 강도 높게 비난한다. 항상 최고의 평가를 받던 앨리스는 스스로 학교를 그만두고 만다. 지성의 검투사는 이렇게 ‘학자’라는 정체성을 무참하게 빼앗기고 만다.

영화 ‘스틸 앨리스’ 중에서


“엄마가 나를 잊어도 제가 엄마를 잊지 않을게요” 그러나 그녀가 무언가를 잃어 가는 것만은 아니었다. 병에 걸리기 전 앨리스는 막내딸과 자주 다투곤 했다. 의사가 된 오빠 톰이나 변호사가 된 언니 안나보다도 훨씬 공부를 잘했던 리디아가 갑자기 배우가 되겠다며 대학을 포기했기 때문이다. 누가 뭐래도 배우의 길을 가겠다는 딸과 인생이 어찌 될지 모르니 대학은 꼭 가야한다고 주장하는 엄마 사이에는 늘 미묘한 갈등의 기류가 흘렀다.


그러나 정작 앨리스가 알츠하이머에 걸리자 그녀를 가장 따스하게 감싸 주는 사람은 바로 이 말썽쟁이 막내딸이다. 앨리스가 리디아의 연극 공연을 보고 나서 리디아가 자신의 딸임을 잊어버린 채 마치 처음 보는 배우처럼 그녀의 연기를 ‘객관적으로’ 칭찬하자, 큰딸 안나는 면박을 준다. “엄마 딸 리디아잖아요!”


하지만 리디아는 엄마가 자신의 연기를 칭찬해 주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 리디아의 모든 사소한 몸짓은 알츠하이머에 걸린 엄마에게 이렇게 속삭이는 것 같다. 엄마가 나를 잊어버려도 제가 엄마를 잊지 않을게요. 엄마가 제 얼굴마저 잊어버려 저를 더 이상 사랑하지 않아도 제가 먼저 엄마를 사랑할게요.


‘당신은 치매 환자’라는 것을 굳이 상기시킨다든지, ‘당신이 무엇을 잘못했다’는 식으로 지나치게 분명한 지적을 하는 것은 바람직한 보살핌의 방식이 아니다. 아무런 기대 없는 조용한 기다림이야말로 환자를 편안하게 해준다. 와시다 기요카즈는 『기다린다는 것』에서 이런 보살핌의 방식을 ‘패싱 케어(passing care)’라고 설명한다. 굳이 문제의 본질을 붙잡으려 하지 않고 마치 아무렇지도 않게 지나가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처리하는 것. “아무렇지도 않은 듯 피하기, 알아채지 못하게 놓치기, 상처받지 않도록 말 돌리기, 그냥 받아넘기기와 같은 형식으로 삐걱거리는 순환을 빠져나가는 방편”, 이것이 바로 패싱 케어다.


막내딸 리디아는 본능적으로 이런 패싱 케어의 의미를 알고 있다. 그는 목적 없는 기다림, 기대 없는 기다림의 의미를 본능적으로 실천한다. 때로는 엄마가 자신을 전혀 알아보지 못하더라도, 굳이 엄마의 오류를 수정하지 않고 마치 전혀 모르는 사람처럼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끌어 간다.


남편 존은 중요한 연구 프로젝트가 생겼다며 뉴욕으로 떠나려 하지만, 앨리스는 추억이 짙게 배인 이 집을 떠나고 싶지 않다. 막내딸이 그저 조용히 기다리고 지나치고 모른 척함으로써 엄마를 보살피는 동안, 아빠는 어떻게든 자신의 삶을 ‘정상화’시키려고만 한다. 남편이 아픈 자신과 ‘함께 있는 것’보다는 자신의 직업적 성취를 더 중시하는 모습을 보자 앨리스는 절망한다. 지금까지 서로를 믿고 살아왔던 그들의 결혼생활 전체에 위기를 느끼기에. 질병만큼이나 무서운 것은 바로 이런 관계의 절망이다.


그의 남편은 기대 없는 기다림 상태를 견디지 못한다. 그런데 어떤 치료제나 수술도 불가능한 시간에는 ‘기다림’이야말로 뜻밖의 치유를 가져올 수 있다. 알츠하이머라는 병 자체를 치유하지는 못하지만 엄마와 딸의 틀어진 관계를 개선할 수도 있으며, 워킹맘으로 살아가느라 인생에서 한 번도 제대로 쉬지 못한 엄마에게 멋진 휴가를 선물할 수도 있지 않은가. 리디아의 기다림은 ‘질병의 개선’이 아니라 ‘엄마와 조금이라도 더 행복한 시간을 보내는 것’에 있기에, 그녀의 기다림은 결코 수동적인 것이 아니다. 리디아는 엄마에게 끊임없이 말을 걸고, 엄마와 그저 함께 있음으로써 이 고통스러운 기다림의 순간을 ‘지금까지 한 번도 겪어 본 적 없는 행복의 시간’으로 재창조해 낸다. 앨리스는 딸의 얼굴을 전혀 알아볼 수 없는 순간에도, ‘저 아름다운 여인’이 자신에게 너무도 친절하고 따뜻하다는 것을 느끼고 감동한다. 리디아는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엄마에게 이렇게 말하며 눈물짓는다. “엄마, 우리가 예전보다 더 가까워진 것 같아요.”


고통을 행복한 시간으로 재창조한 딸 원작을 각색해 영화로 만든 ‘스틸 앨리스’에는 잊을 수 없는 대사가 있다. 앨리스(줄리앤 무어)는 알츠하이머 환자들을 대표해서 맡은 연설에서 이렇게 고백한다. “저는 고통 받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투쟁하고 있습니다(I’m not suffering, but I am struggling.)”


그녀는 수동적으로 고통을 감내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매순간 자존감을 잃지 않기 위해 ‘내가 여전히 나임’을 증명하기 위해 초인적인 의지로 싸우고 있었던 것이다. 알츠하이머는 물론 모든 마음의 질병으로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이 고백은 힘이 되어 줄 것 같다. 저는 고통 받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투쟁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아직은 앨리스(Still Alice)’라는 소설의 제목이 내게는 ‘강철 같은 앨리스(Steel Alice)’처럼 다가왔다. 앨리스의 두뇌를 알츠하이머가 모조리 잠식한다 하더라도, 앨리스의 강철 같은 투쟁, 그리고 ‘여전히 앨리스’인 엄마를 사랑하는 딸의 기다림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


 


 


정여울 ?작가, 문학평론가. 문학과 삶, 여행과 감성에 관한 글을?쓴다. 『내가 사랑한 유럽 TOP10』『그때 알았더라면?좋았을 것들』『헤세로 가는 길』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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