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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유한 늙음이 가난한 젊음을 곁에 두고 싶어하는 건 죄일까

일러스트 김옥


“특별히 이유가 있어서 일어나는 일은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는 잃기도 하고 얻기도 해요. 전부 종잡을 수 없는 일이죠. 종잡을 수 없음이 지닌 무한한 힘. 반전 가능성. 그래요, 예측 불가한 반전과 그것이 지닌 위력이죠.”


필립 로스의 『전락』을 샌프란시스코 근처 길로이의 베스트웨스턴 호텔에서 읽었다. 미국 서부를 여행하는 중이었다. 책 한 권을 호텔 욕조 안에서 전부 읽을 수 있었던 건 이 책의 판형이 작고 분량이 짧았기 때문이었다. 소설을 다 읽고 난 후, ‘작고 짧았다’라는 말을 ‘크고 두껍다’의 반대편에 놓아두자, 늙은 사내의 열패감 같은 게 느껴졌다. 욕실 안에는 눈물 같은 수증기가 가득 맺혀 있었다.


로스는 이 작품을 76세에 발표했다. 주인공 사이먼 액슬러는 키가 2m에 달하는 거구의 정력가였지만 어느새 위기의 남자로 추락해 있었다. 그는 한때 미국 연극계의 전설적인 스타였다. 65살이 될 때까지 한 번도 무대에서 실패하지 않은 불멸의 존재였다. 하지만 어느 날 문득, 자신이 더 이상 이전처럼 연기할 수 없다는 걸 깨닫는다.


“가상의 찻잔을 들고 차를 마시는 흉내를 내는 내가 우스꽝스럽게 보이곤 했어요. 마음속에선 늘 은밀한 그 목소리가 이제는 내 생각을 점령해버렸어요. 내가 아무리 준비를 하고 뭔가 해보려 해도, 일단 무대에 오르면 언제나 그 목소리가 들려요. 찻잔 같은 건 없어!”


남들이 찬탄하던 바로 그 재능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평생을 천재라는 스포트라이트 속에 살던 사람에게 어째서 이런 일이 벌어진 걸까.


“그가 해낼 수 있는 유일한 역할은 어떤 역을 연기하는 역할뿐이었다. 제정신이 아닌 사람을 연기하는 제정신인 사람, 상심한 사람을 연기하는 안정적인 사람, 자제력을 잃은 사람을 연기하는 자제력 있는 사람…. 그리고 마침내 침대에서 일어났을 때, 그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이라곤 자살에 대한 게 전부였지만 그것을 흉내 내지는 않았다. 죽고 싶어하는 남자를 연기하는 살고 싶은 남자였으니까.”


전락의 깊이를 결정하는 건 높이감이다. 전락은 그러므로 가장 꼭대기에 있었던 사람에게 어울릴만한 말이다. 만약 천부적이라 믿었던 재능을 한순간 잃어버린 노인이 젊고 아름다운 여자를 욕망하기 시작했다면, 추락에는 틀림없이 가속도가 붙는다. 이 소설의 주인공 사이먼 액슬러처럼 말이다.


결국 죽음의 망령에 시달리던 그는 스스로 정신병원에 입원한다. 그리고 병원에 입원한 26일 동안 급작스런 몰락의 원인을 찾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한다. 하지만 결론은 지극히 비관적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추락에 이유 같은 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가장 정확한 진실은 배우로서 그의 경력이 이제 파탄 났다는 것뿐이었다.


죽음만 남겨둔 사내에게 찾아온 선물, 레즈비언으로 산 페긴이 소설의 본격적인 시작은 이제 남은 건 죽음밖에 없다고 생각하던 남자에게 한 여자가 뜻밖의 선물처럼 도착하면서 벌어진다. 그녀는 스물세 살 이후 레즈비언으로 살아온 페긴이었다. 시니컬한 노인이지만 그는 결국 사랑에 굴복한다. 살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하지만 마흔이 넘도록 부모로부터 정신적으로 독립하지 못한 페긴이 그들의 반대에 휘둘리는 모습에 불안감을 떨치지 못한다.


자신에게 남은 마지막 희망을 놓치지 않기 위해 그는 값비싼 옷과 장신구 등을 사주고, 호텔 바에서 술에 취한 트레이시라는 여자를 유혹해 둘의 공간으로 끌어들인다. 옷을 사줬던 것처럼 페긴에게 트레이시를 공급하고 있다고 느끼면서.


하지만 그가 자신의 사랑을 지키기 위해 했던 ‘바로 그 일’이 페긴의 마음을 돌아서게 한다. 결별을 선언하고, 다시 레즈비언으로 돌아간 것이다. 페긴과 아이를 낳아 키우고 연극 무대로 복귀를 꿈꾸던 그의 마지막 희망은 붕괴되었다.


“남자가 가는 길에는 수많은 덫이 깔려 있었는데, 페긴이 그 마지막 덫이었다. 그는 허겁지겁 그 덫에 발을 들였고, 세상에서 가장 비겁한 포로처럼 미끼를 물었다. 파국 외에 다른 길은 없다는 사실을 그는 마지막에야 알았다. 있을 법하지 않았다고? 아니, 예측 가능했다. 한참 후에 버림받았다고? 분명 그녀에겐 그가 느꼈던 것만큼 긴 시간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녀를 매혹했던 모든 것이 사라져버리고, 때가 되자 그것은 그녀가 ‘이제 끝내요’라고 말하게 만들었으며, 그는 살고자 하는 욕심도 비운 채 혼자 그 막대 여섯 개만 지니고 그의 굴로 들어갈 운명에 처했다.”


파국이 다가왔다는 걸 깨닫는 순간, 그는 정신 병원에서 만났던 시블밴 뷰런이라는 여자가 상상만으로 꿈꾸던 바로 ‘그 일’을 실행해 옮겼다는 걸 알게 된다. 자신의 아이를 성폭행한 남편을 총으로 쏴 죽인 것이다. 그는 정신병동 사람들과 나누던 대화를 떠올린다. 세상 사람들에게는 정신병동에 갇힌 완벽하게 무력하고 무능한 존재로 이미 낙인찍혔지만, 세상의 모든 행위 중에 가장 어려운 것을 실행하기로 마음먹는 순간 갖게 되는 충만한 삶의 기쁨이라는 아이러니에 대해서 말이다.


곧 시들어 갈 것을 알기에 활짝 핀 꽃이 아름다운 것시들어가는 부유한 늙음이 피어나는 가난한 젊음을 곁에 두고 싶어 하는 것. 그것은 죄인가 본능인가. 사람들이 가장 흥미로워하는 종류의 스캔들인 ‘돈’과 ‘젊음’이 싸울 때 누가 이길 것인가.


노년은 전투가 아니라 대학살이라고 말한 건 『에브리맨』의 ‘그’다(이 소설에서 필립 로스는 주인공의 이름을 밝히지 않는다). 박범신의 소설 『은교』에서 시인 이적요는 “젊음이 너희의 노력에 의하여 얻어진 것이 아니듯, 노인의 주름 역시 그들의 과오에 의해 얻어진 게 아니”라고 소리 없이 절규한다. 그들의 말에 공포와 애수가 동시에 묻어나는 건, 이 모든 말들이 젊은 시절을 추억하는 회한의 방식으로 서술된다는 점과 연관된다.


시간이 흐르는 이상, 인간의 ‘몸’은 변한다. 그렇다면 사랑도 변해야 하는 게 아닐까. 하지만 어떻게? 노년에도 ‘신약’을 통해 젊음을 되찾을 수 있다는 헛된 이야기 말고, 섹스가 사라진 후 비로소 침대에 찾아든 적막함과 고요함을 사랑하는 법에 대해 누구든 알려주면 좋겠다. 지금까지 많은 소설들은 젊음을 사랑한 노년의 사랑을 ‘파멸’의 형태로 단죄해 왔다. 자신의 시간이 끝나가고 있다는 걸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에게 타인만 지옥이 아니다. 자신의 존재 자체가 지옥이 된다. 어쩌면 ‘마음만은 청춘’이란 인간적인 바람은 자연의 입장에선 가당치 않은 망상인 것이다. 자연은 생산 불능의 늙음에 별로 관심이 없다. 그것이 정확히 바라보고 있는 것은 폭발하는 젊음, 즉 생산 가능한 존재들인 것이다.


60세가 훌쩍 넘은 후 치킨 사업으로 제 2의 인생을 시작했다는 KFC의 커넬 샌더슨 대령의 이야기를 가장 좋아한다는 한 남자를 바라보다가, 문득 이 시대에는 새로운 형식의 자기계발이 필요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가령 이것을 나는 꽃이 피어나는 비유로 말해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계속 활짝 피어 있다면 그건 ‘꽃’이 아니라, 조화다. 꽃이 아름다운 건 결국 시들어가기 때문이 아닐까. 곧 시들 것을 알기에 활짝 핀 꽃이 그토록 소중하고 아름다운 것이다. 시들어가는 것들에 대한 사랑, 요즘의 내 관심은 그런 것이다. 시든 꽃을 꺼내 미라처럼 말려 영구 보존하는 게 아니라, 조금 다른 형태의 사랑도 있다고 믿고 싶다. 결국 우리는 모두 시들어갈 것을 알기에. ●


 


 


백영옥 ?광고쟁이, 서점직원, 기자를 거쳐 지금은 작가. 소설『스타일』『다이어트의 여왕』『아주 보통의 연애』 , 인터뷰집 『다른 남자』 ,산문집『마놀로 블라닉 신고 산책하기』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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