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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한 일의 복잡함


오늘 설거지는 내가 할 게. 눈 오는 날 고추장찌개로 저녁 식사를 마친 후 나는 앞치마를 두르고 고무장갑을 꼈다.


나는 요리를 잘하고 싶지 않다. 요리 잘하는 남자가 인기 있고 대세라고 하지만 상관없다. 나는 요리를 못한다. 아니 안 한다. 아내가 요리를 잘하기 때문이다. 아내가 해주는 음식은 무엇이든 맛있다. 아내는 원래 요리에 재능이 있는데다 결혼 후 수십 년에 걸쳐 요리 실력을 갈고 닦았다, 라는 주장도 가능하겠지만 그것보다는 남편의 입맛을 자신이 만드는 음식에 강제로 길들였다, 라는 반론이 훨씬 설득력이 있다.


나는 요리보다 설거지를 잘 하고 싶다. 식탁에 잘 차려진 음식이 먹음직스럽게 보이는 것처럼 싱크대에 가득 쌓인 그릇들이 ‘씻음직스럽게’ 보일 지경이다. 오해는 마시길. 좋아한다고 해서 자주 한다든지 잘 하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가끔, 드물게 하기 때문에 여전히 설거지를 좋아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설거지를 하면서 나는 이런 생각을 했다. 나는 왜 설거지를 좋아하는 걸까? 무엇보다 그 일이 단순노동이기 때문인 것 같다. 단순노동에는 몇 가지 장점이 있다. 그야말로 일이 단순하다는 것, 대부분 일련의 동작을 반복한다는 것, 그리고 이 단순하고 반복적인 작업이 의외로 사람을 진정 시키는 힘이 있다는 것, 안정감을 준다는 것. 단순노동을 하다 보면 머리가 맑아지고 마음도 밝아진다.


나는 전에 공장에서 체인을 조립하는 단순 작업을 한 적이 있었다. 대개 단순노동은 여럿이 함께하게 되는데 복잡한 일을 할 때와 달리 서로에게 훨씬 너그러워진다. 그리고 대화가 시작된다. 커피점이나 카페, 심지어 술집에서도 좀처럼 속 마음을 열지 않고 말이 없던 사람도 슬슬 자신의 이야기를 꺼낸다. 잘 웃기까지 한다. 그다지 우스운 이야기도 아닌데 말이다. 작업이 끝나고 손을 씻을 때쯤엔 같이 일한 사람들끼리 굉장히 친해진 느낌이 들었다.


현대의 인간이 불행한 것은 단순노동을 기계에게 빼앗겼기 때문 아닐까. 일자리를 빼앗겨서가 아니라 단순노동이 주는 안정감과 대화를 잃어버려서는 아닐까.


설거지를 하면서 나는 아내에게 대화를 시도한다. 중학교 때인가 고등학교 1학년 때인가 적성검사를 한 적이 있는데 말이야. 그때 결과가 어떻게 나온 줄 알아? 글쎄 내 적성에 맞는 일이 ‘단순노동’이었어. 당시엔 엄청 충격도 받고 검사 자체를 불신하고 그러다 좌절도 하고 그랬는데, 지금 돌이켜보면 그 검사가 정확했던 것 같아. 이렇게 설거지 같은 단순한 일을 경험하면 할수록 내 적성에 맞는 것 같거든.


그래요? 그럼 혹시 당신 같은 경우가 이 책에에 나오는 ‘바보들을 위한 생태적 지위’와 관련이 있는 건가? 소파에서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를 읽고 있던 아내가 책의 몇 구절을 대강 읽어준다.


“수렵채집 시대에 생존하려면 누구나 뛰어난 지적 능력을 지녀야 했다. 하지만 농업과 산업이 발달하자 사람들은 생존을 위해 다른 사람들의 기술에 더 많이 의존할 수 있게 되었고, ‘바보들을 위한 생태적 지위’가 새롭게 생겨났다. 별 볼 일 없는 유전자를 가진 사람이라도 살아남을 수 있으며, 단순노동을 하면서 그 유전자를 후손에게 물려줄 수 있게 되었다.”


별 볼 일 없는 유전자를 가진 남편은 이제 설거지를 마치고 손에 남은 물기를 앞치마에 닦으며 바보처럼 아내를 바라보았다. 우월한 유전자를 가진 게 분명해 보이는 아내는 남편이 설거지한 그릇들을 살펴보았다. 마치 그 지위가 내게 적합한가 아닌가를 확인하는 것처럼.


수고했어요. 수고는 했는데 잘하지는 못했어. 설거지가 단순하다고 그랬죠? 설거지는 단순하지 않아. 단순한 것처럼 보이는 일 대부분이 사실 단순하지 않아요. 설거지하기 전에 환기부터 하고 그릇 놓을 공간도 확보하고 설거지할 그릇들도 기름기 있는 것과 없는 것, 큰 그릇과 작은 그릇, 불릴 것과 아닌 것으로 분류하고. 씻는 순서도 중요하죠. 또 헹굼이 얼마나 중요한지 몰라요. 당신은 한 번 물에 쓱 씻고 말죠. 그러면 세제가 그대로 남아 있어서 안 돼요. 이것 봐요. 세제가 그대로 남아 있잖아요. 건성으로 하면 안 된다 말이죠. 작은 일일수록 정성을 갖고 해야죠. 그래도 수고했어요. 고마워. 커피 내려 줄까?


아니, 내가 내릴 게.


아무래도 설거지 말고 더 단순한 일을 찾아야겠다. ●


 


 


김상득 ?결혼정보회사 듀오의 기획부에 근무하며, 일상의 소소한 웃음과 느낌이 있는 글을 쓰고 싶어한다.『아내를 탐하다』『슈슈』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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