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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드 위험하면 북 핵 개발 중단시켜라’ 중국에 할 말 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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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로명 전 외무부 장관은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국제적 공조를 통한 제재뿐”이라고 말했다. [사진 김경빈 기자]


그는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우왕좌왕하는 여론이 마음에 들지 않은 듯했다. 공로명(84) 전 외무부 장관. 15일 아침엔 사양한다고 했던 인터뷰를 오후가 되자 하자고 연락해 왔다. 질문과 관계없는 말도 쏟아냈다.

 “북한의 핵무기 보유가 현실 문제로 다가왔단 말입니다. 우리가 그동안 저지하려고 애쓰던 모든 문제가 사실은 실패했습니다. 누구보다 박근혜 대통령이 안타깝다고 주장하는데, 이 단계에서는 국민이 하나가 돼야 합니다.”

 함경북도 명천 출신인 그는 경기중학(현 경기고) 졸업 직후 한국전쟁이 터지자 통역장교로 입대했다. 이듬해 입학한 서울대 법대는 전쟁 통에 10년 뒤 졸업했다. 1958년 외무부에 들어간 뒤 96년 김영삼 정부에서 외무부 장관을 마칠 때까지 그는 38년간 외교 현장을 누볐다.

 한·일회담에 참가해 평화선(독도 관련)과 어업협정 실무협상을 벌인 일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83년 중국 민항기 납치사건 때는 최초로 중국 측과 공식 협상을 벌였다.

90년 모스크바에 한국 영사처를 설치했을 때 영사처장으로 가 한·러 수교를 마무리했고, 그해 초대 주러대사로 부임했다. 주일대사까지 역임했다. 주변 강대국과의 외교에서 모두 역할을 한 셈이다. 지금도 부산동서대학교에서 석좌교수로, 동아시아재단 이사장과 『글로벌 아시아』 발행인으로 한국 외교를 들여다보고 있다.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국제적 공조를 통한 제재뿐입니다. 인내를 가지고 국제 여론을 최대한 동원해 얻어낼 수 있는 최고 수준의 제재를 해야 합니다. 그 외에는 방법이 없습니다.”

 그는 인터뷰 직전인 15일 오전 새누리당 원유철 원내대표가 한 국회 연설을 꺼냈다.

 “우리도 핵무기를 보유하자고 얘기하는데…. 한국은 핵을 가질 수 없게 돼 있어요. 핵 도미노가 일어나고, 우리가 추구해 온 비핵화 가치를 포기할 수 없어요. 미국이 왜 지금 핵잠수함과 항공모함을 한반도 주변에 배치하고, B52를 띄우고 하는가요. 한국의 핵보유론을 견제하고, 동시에 핵우산의 존재를 한국 국민에게 인식시키기 위한 움직임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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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 5월 중국 민항기 송환협상을 벌인 공로명 외무부 차관보와 선투(沈圖·오른쪽 셋째) 중국민항총국장이 총상을 입고 입원한 항법사를 방문해 위로하고 있다. [중앙포토]


 - 김영삼 정부 때인 94년, 북폭설도 있었죠.

 “주일대사로 있을 때인데, (우리 정부가 북폭에) 반대했다는 거죠? 그거 나름대로 논리가 있습니다. 북한도 주권이 있고, 한반도란 게 너무나 좁습니다. 핵이 영변에 떨어졌다고 치자, 그 여파가 어디까지 미칠 것 같습니까. 후쿠시마 원전이 그렇게 돼 도후쿠 지방이 지금 굉장히 어려워요.”

 - 한반도 위기가 고조되니 경제적 타격도 큰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핵 개발을 할 수 없습니다. 한국이 핵을 가지게 되면 제일 먼저 일본이 가집니다. 난 그래서 옛날에도 핵 개발 하겠단 사람들한테 ‘좋습니다. 하세요. 그 대신 우리가 먼저 하진 마세요. 일본이 하면 따라 하세요’ 했습니다. 그런데 일본은 가만있고 우리가 나서면 몰매를 맞아, 핵을 가지기도 전에 빈사 상태에 빠질 겁니다. 갖가지 제재가 다 올 텐데….”

 공 전 장관의 회고록 『나의 외교노트』에 변영태 전 외무부 장관(1951~55)의 일화가 나온다. 한국전쟁 때다. 영국이 중국을 승인한 것을 국회의원이 추궁하자 변 전 장관이 “영국과 일전을 불사하겠다”고 답변했다는 것이다. 외교적 현실감각보다 감정이 앞서던 시절의 에피소드다. 핵무장론을 닮았다.

 “변 장관이 다급하니까 일전도 불사하겠다고 했는데 허허…. 유명한 이야기죠.”

 - 도발은 북한이 했는데, 고고도미사일방어(THAAD·사드) 체계 문제로 한국과 중국이 멀어지고, ‘신냉전’ 구도가 돼 갑니다.

 “우리가 겁먹어선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중국에 대해서도 말을 할 수 있어야죠. ‘우리가 왜 사드를 들여오느냐. 우리가 급하다. 만약 사드가 당신들에게 위험 요소가 있다면 북한의 핵무기 개발부터 중단시켜라’,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왜 못합니까.”

 공 전 장관은 그가 ‘대화론자’라고 이름 붙인 사람들에게 불만을 터뜨렸다.

 “대화로 하자고 얘기를 하는데, 문제는 상대가 대화를 진지하게 하느냐입니다. 진지하게 하면 대화가 됩니다. 그러나 91년부터 북한과 핵 문제를 가지고 교섭해 보면서 느꼈던 거지만, 북한은 자기네 바둑만 두지 결코 우리와 대국을 하지 않습니다. 모양은 대국이지만 자기들 바둑만 둡니다.”

 그도 결국엔 대화로 풀어야 한다는 데는 동의했다.

 “물론 방법은 대화밖에 없어요. 하지만 대화하려면 시기가 있어야 돼요. 우리가 대화하자고 해봐야 소용없어. 북한이 자기가 급하면 대화하자고 옵니다.”

 그는 72년 7·4공동성명을 예로 들었다. 미·중 수교로 정세가 급변하자 북한도 대화에 나섰다는 것이다.

 - 사드가 중국을 겨냥한 것이라고 중국이 반발하는데….

 “지금 북한이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을 개발하는 단계에서 패트리엇 미사일만 가지고는 안 된다는 거 아닙니까. 사드를 가져야 한다는 게 전문가들 의견인데, 가져야지, 우리가. 중국이 자기네 안보만 생각하고 한국이 사드 가지는 것에 이론(異論)을 제기하는데, ‘나는 죽고 당신만 살지’ 하는 순박한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나부터 살아야지. ‘그럼 당신들이 북한의 핵 문제 해결해 주시오’, 그래야죠. 이거야말로 주권의 문제 아닙니까.”

 - 먼저 중국의 협조를 받아 유엔 제재결의안을 채택하고, 그 뒤에 사드나 추가 제재를 논의해도 되지 않습니까. 중국의 협조가 필요한 이 시점에 왜 사드 문제를 꺼내는지 모르겠습니다.

 “그거는요, 너무나 순진한 얘기입니다. 우리가 중국을 존중해주면 중국이 우리를 배려할 거란 생각을 하는데, 노(no). 중국은 북한에 대해 강력한 제재를 할 생각이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북한이 파탄된다는 겁니다. 순망치한(脣亡齒寒·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리다는 말로 서로 떨어질 수 없는 밀접한 관계), 이게 중국이 가지는 북한에 대한 기본적인 전략적 인식입니다.”

 - 북한 붕괴는 그렇다 해도 북한 핵무기 제거하는 건 중국의 이해와 일치하는 것 아닌가요.

 “비핵화를 지지하려면 끝까지 가야 할 거 아닙니까. 근데 못 가는 겁니다. 중국의 근본적 이익에 저촉될 경우 비핵화는 부차적인 문제가 됩니다. 다만 한 가지 변수가 있습니다. 전략적 이해관계에 있어서 미·중 관계가 호전된다면 그땐 다르죠. 지금 우리가 중국에 호의적으로 나가면 중국이 우리를 배려할 거라는 생각은 너무나 비현실적입니다. 박근혜 대통령이 전승기념일 (미국의 우방 국가 원수 중에는) 유일하게 참석했지만 결과가 어떻게 됐습니까.”

 - 독일의 예를 보더라도 중국이 적극적 반대는 안 해야 통일이 가능하지 않나요.

 “그럼.”

 - 그럼 한·미동맹이 중요하긴 하지만 그 색깔을 강하게 드러낼수록 중국이 반대하지 않을까요.

 “우리가 미국의 동맹국이라서 중국이 우리 얘길 들어주지 않는다? 굉장히 순진한 생각입니다. 중국인만큼 이해관계에 냉정한 사람이 없습니다. ”

 - 북한을 경제적으로 고립시키고, 고통을 줘 핵을 포기하게 하려 해도 중국이 빠지면 안 되는 것 아닙니까.

 “그럼.”

 - 이렇게 가면 중국은 북한이 무너질까 봐 더 도와줘야겠다고 생각하게 될 것 같은데….

 “그렇게 노골적으로는 못할 겁니다. 중국이 북한만 데리고 사는 게 아니니까. 그런데 유엔 제재를 해도 중국의 협조는 한 65%밖에 못 얻을 겁니다.”

 - 중국이 65%밖에 협조하지 않는다면, 결국 북한이 핵을 포기하지 않는다는 건데, 제재의 목표는 뭡니까.

 “북한은 죽어도 핵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자기들은 핵 없으면 죽는다고 생각합니다.”

 - 미·중 관계가 좋아지면 상황이 호전될 수 있다고 했는데, 결국 다자의 틀에서 북한 안전을 보장해주는 조건으로 협상하는 길을 말씀하시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6자회담을 시작한 거죠. 아니, 나머지 다섯 나라가 북한을 보증하지 않았어요? 그런데도 안 열었단 말이야. 왜 안 열었느냐. 자기들이 핵을 가지기 전엔 안심이 안 된다, 이겁니다. 리비아가 핵을 포기한 순간 정권이 무너졌더라, 그게 뇌리에 박힌 겁니다.”

 - 그럼 어떻게 풀어야 합니까.

 “아무리 해봐도 대화도 안 되고, 유일한 길은 국제사회의 제재를 강화해 북한이 핵을 포기하는 것이 생존 전략이라는 것을 인식시키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그걸 위해 국제 제재를 하는 거지, 북한을 붕괴시키겠다고 하는 거는 아니지 않습니까.”

[S BOX] 한·중 수교 이전인 1983년 ‘중국 민항기사건’ 협상 맡아 스타로

1983년 5월 5일 오후 2시30분. 어린이날을 즐기던 시민들이 깜짝 놀랐다. 민방위훈련 공습경보가 울리며 “이것은 실제상황입니다”는 방송이 나온 것이다. 중국 민항기 한 대가 춘천 미군 비행장에 착륙했다. 납치였다. 한·중 간에는 국교는커녕 공식 접촉도 없던 시절이다.

서울에서는 중국을 ‘중국 공산당’이라고 해 ‘중공’이라고 불렀다. 청와대에서 긴급회의가 소집됐다. 함병춘 대통령 비서실장, 노신영 안기부장, 노재원 외무부 차관 등이 참석했다. 공로명 외무부 차관보도 함께 했다.

“회의 중에 장세동 경호실장이 급하게 뛰어왔어요. 텔렉스 용지를 들고. 중국 민항총국장이 다음날 대표단을 보낼 테니 허가해 달라, 교섭을 하러 온다는 거지. 사건이 발생한 지 2시간 반이나 지났을까…정말 급했던 거예요.”

민항기 탑승객들은 신분증을 찢어 화장실에 버렸다. 한국 측은 그 조각들을 이어 붙여 신분을 확인했다. 정부 부국장급 이상 요인들이 다수 있었다. 특히 미사일 전문가가 포함된 사실은 훗날 밝혀졌다. 이 때문에 중국이 서두른 것이라고 공 전 장관은 말했다.

중국 측은 유엔사를 통해 비행장 길이를 확인하고, 베이징에서 같은 기종으로 이착륙 연습까지 하고 왔다고 한다. 빨리 환수해 가기 위해서다. 이때 협상대표가 공 전 장관이다. 대중적 스타가 됐다. 건국 이후 중국 정부와는 첫 공식 협상이었다. ‘대한민국’이란 국호를 쓴 것도 처음이다. 중국에 관계 개선 의지를 충분히 전달했다. 9년 뒤 정식 수교로 가는 첫걸음이었다.

글=김진국 대기자 kim.jinkook@joongang.co.kr 정리=김경희 기자
사진=김경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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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한 연구위원 : park.yonghan@joongang.co.kr (02-751-5516)
‘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