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끔찍한 교통사고 영상 나돌고 차량 내 밀회장면 퍼뜨리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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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네티즌들 사이에 한 영상이 급속도로 퍼졌다. 육중한 레미콘이 기우뚱하며 삽시간에 승용차 지붕을 덮치는 영상이다. 여성 세 명이 목숨을 잃은 참혹한 사고를 담은 이 영상은 수백만 명에게 노출됐다. “현장에서 목격하는 듯한 생생함 때문에 충격적”이란 말까지 나왔다.

사생활 침해 늘어나는 블랙박스


 이 영상은 사고 차량 바로 뒤에 있던 차량의 블랙박스로 찍힌 것으로 추정됐다. 한 네티즌은 “제 친한 동생의 어머니께서 돌아가신 영상이다. 발인 끝나고 시간이 지나 동생이 이 영상을 볼까 두렵다. 영상을 내려 달라”는 댓글을 달았다. 이 댓글도 널리 퍼졌다. 그러나 지금도 이 영상은 인터넷상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피해자 유족들은 원치 않게 인터넷 어딘가에서 끔찍한 사고의 순간과 맞닥뜨릴 수 있는 처지다.

 블랙박스가 스마트폰에 맞먹는 국민 촬영장비가 되면서 여러 부작용이 생기고 있다. 2014년 기준으로 블랙박스 누적 판매량은 269만 대(새누리당 김상민 의원, 국토교통부·한국교통연구원·차량용블랙박스업계 자료 취합). 아무도 없는 주차장에도 파란 불을 깜빡이며 지켜보는 눈(블랙박스가 작동하고 있다는 표시등)이 존재하는 시대다.

 블랙박스는 2000년대 중반 이후 교통사고 분쟁의 해결사 노릇을 톡톡히 해 왔다. 한국자동차산업협회에 따르면 2008년 보급된 블랙박스는 6만5000대에 불과했으나 2012년 150만 대를 거쳐 오늘날에 이르렀다. 6년여 만에 40배가 늘었다. 집계되지 않은 수치까지 합쳐 설치 대수가 400만 대를 훌쩍 넘겼다는 추정치까지 있다.

 그러나 이처럼 블랙박스가 기하급수적으로 보급되면서 사생활 침해 문제가 제기되기 시작했다. 2010년엔 ‘택시 승객 진상녀’라는 제목의 동영상이 인터넷에 확산됐다. 한 여성이 택시 기사에게 막말을 하는 장면이 담겼다. 택시 내부를 비추는 블랙박스엔 승객의 목소리와 목적지, 옷차림까지 드러나 지인이라면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신상이 노출됐다. 택시 블랙박스로 인한 개인정보 침해 문제가 제기되면서 행정안전부는 2010년 12월 블랙박스 개인정보보호 가이드라인을 내놓았다. 가이드라인은 승객의 사생활 보호를 위해 촬영범위를 최소화하고, 목적 이외의 영상정보 이용을 금지하며, 안내문 부착과 녹음기능 사용 금지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러나 권고사항일 뿐 강제조항이 아닌 가이드라인은 근원적 해결책이 되지 못했다. 새누리당 김상민 의원은 “차량용 블랙박스는 사용자에 따라 언제든지 몰카로 변신 가능한 것을 정부가 간과하고 있다”며 “행정편의로 마련된 지침이 오히려 더 큰 사회문제를 묵인하는 형국”이라고 지적했다.

 움직이는 CCTV인 블랙박스는 기상천외한 용도로 사용되기도 했다. 2012년 여름엔 술에 취한 남녀가 차량 보닛에 기대 애정행각을 벌이는 동영상이 인터넷을 달궜다. 영상에선 두 남녀의 얼굴이 잘 보이지는 않지만 모자이크 처리가 되지 않았다.

 블랙박스 영상이 배우자 불륜을 잡는 수단으로 이용되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다. 2012년 12월엔 블랙박스에 찍힌 외도 영상이 간통죄의 증거로 채택돼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블랙박스 유출로 인한 사생활 침해 범위도 점점 넓어지고 있다. 연예인들도 블랙박스 영상의 희생양이 됐다. 2014년 11월엔 노상 방뇨 장면이 담긴 블랙박스 장면이 유출돼 울랄라세션이 곤욕을 치렀다. 울랄라세션이 빌린 렌터카에 찍힌 영상을 이후 사용자가 발견해 그냥 올린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이 영상은 유튜브에서 삭제된 상태지만, 한 연예매체 유튜브엔 원본 버전에 가까운 영상이 그대로 게시돼 있다. 2013년엔 가수 최자와 설리 열애설이 블랙박스 유출 영상을 통해 불거졌다. 최자와 설리로 추정되는 인물이 손을 잡고 골목을 나란히 걸어가는 장면이 찍혔다. 법적 대응으로 인한 이미지 실추를 두려워하는 연예인들이라 유포자 처벌로 이어지진 않았지만 블랙박스로 인한 사생활 침해를 보여주는 사례다.

 동영상 시대에 블랙박스 영상은 하나의 인기 게시물이 됐다. 일반인들도 영상의 주인공으로 심심찮게 등장한다. 올 3월엔 ‘화이트데이 날 블랙박스에 찍힌 고딩 남녀의 키스’라는 제목을 단 영상이 올라와 폭발적인 조회수를 기록했다. 한 차량의 블랙박스에 고교생 남녀의 수줍은 데이트와 키스 장면이 고스란히 노출됐다.

 SNS를 중심으로 사고 동영상이 일파만파 번지면서 피해자들의 시름이 깊어지는 게 가장 문제다. 처음엔 경찰 등이 교통사고 경각심을 일깨우기 위한 용도로 편집 영상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블랙박스를 설치한 이들이 자발적으로 사고 장면을 공유하는 식으로 폭을 넓혔다. 좋은 사례로 시작했지만, 차츰 원본 동영상이 마구잡이로 도는 식으로 번지면서 피해자와 그 지인들에겐 사고의 아픈 기억을 떠올리는 덫이 된 것이다. 2014년 인천외고 사고 동영상엔 한 여고생이 두 차량의 사이에 끼여 다치는 장면이 들어 있다. 본인에겐 잊고 싶은 사고의 기억이고 일반인들에게도 혐오스러운 장면이다.

 이런 영상들은 10만 명이 넘는 회원을 거느린 차량 블랙박스 카페 등을 통해 유통되고 있다. 하지만 이곳은 관리의 사각지대다. 이 카페에서 밖으로 유출돼 퍼져 나간 동영상을 본인이 확인해 신고하지 않는 이상 폐쇄된 집단에서 게시되는 것을 막기는 힘든 게 현실이다. 김영식 서원대 경찰행정학과 교수는 “수사 이외의 목적으로 블랙박스의 영상정보가 유출되는 것에 대해 관리책임이 있다는 사실을 법제화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S BOX] 아파트 1층 주민들 “차량 파란 불이 감시하는 느낌”

서울 은평구의 한 아파트에 거주하는 조모(62·여)씨는 지난여름 같은 아파트에 사는 한 남성과 크게 다퉜다. 1층에 사는 조씨가 자신의 베란다 앞 주차장에 차를 세운 남성에게 “블랙박스로 집안이 들여다보일 수 있으니 꺼 달라”고 요구했다가 말다툼을 벌인 것이다. 남성은 “주차한 사이에 사고가 날 수도 있는데 내가 왜 그래야 하느냐. 집안을 들여다볼 일은 없다”고 단칼에 거절했다고 한다. 조씨는 “여름이라 아파트 창을 활짝 열어 두고 지내고 싶은데 주차장에 세운 차량이 블랙박스로 집안을 찍는다고 생각하니 지금 생각해도 불쾌하다”고 말했다.

블랙박스 보급으로 차량이 움직이는 폐쇄회로TV(CCTV)가 된 형국이다 보니 아파트 주민 간의 갈등도 늘고 있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상에도 “블랙박스가 집안을 들여다볼까 불안하다”는 글이 종종 올라온다. 이는 블랙박스의 화질이 하루가 다르게 좋아졌기 때문이기도 하다.

2006년께 블랙박스 도입 초기엔 30만 화소만 해도 최고급으로 불렸다. 하지만 요즘 최고 수준의 블랙박스는 200만 화소 이상의 풀HD급 화질을 보유하고 있다. 10m 거리 사람의 이목구비를 또렷이 알아볼 수 있고 그보다 먼 거리에 찍힌 것도 윤곽을 꽤 선명하게 드러낸다. 시동이 꺼진 상태에서 작동되지 않았던 일부 블랙박스에 불만을 가진 소비자가 늘면서 상시 녹화 기능을 기본으로 갖추게 된 것도 1층 아파트 주민의 불안을 가중시키는 한 이유다.

이정봉 기자, 홍준영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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