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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체 삶이 있는 골목길의 부활을 꿈꾼다

통의동 한옥길. [그림 임형남]


“여러 번 굽은 골목이 담장이 좌우 못 보는 내 아픈 마음에 부딪혀 달은 밝은데/그때부터 가까운 길을 일부러 멀리 걷는 버릇을 배웠더니라.”


27세 젊은 나이에 요절한 천재 시인 이상이 쓴 ‘무제’라는 시의 마지막 부분이다. 서울 사직동에서 태어나 통인동에서 자란 그의 시는 굽은 골목처럼 복잡하고 난해하다. 나는 김소월이나 정지용의 시를 읽으며 느낄 수 없었던 시적 감응을 이상의 시에서는 느꼈다. 그건 아마 이상과 자란 환경이 비슷했기 때문일 것이다. 나 역시 천엽 속처럼 복잡한 골목에서 태어났고 골목을 놀이터 삼아 뛰어 놀며 자랐다.


어릴 때 내가 가장 좋아했던 놀이는 혼자서 아무 골목이나 들어가서 헤매는 일이었다. 을지로 통의 골목을 가본 사람은 알 것이다. 그 골목들은 정말로 복잡하다. 끊어질 듯 끊어질 듯 이어지는 골목을 헤집고 다닐 때 “이번에는 막다른 길이겠지”하며 들어가면 그 길은 다시 다른 길과 이어진다. 그렇게 계속 찾아 들어가다 보면 결국 내가 아는 길과 만난다. 그렇게 홀린 듯 골목을 탐험하다 어느새 나는 내가 살던 을지로를 벗어나 광화문 언저리까지 간 적도 있었다.


최근 종방한 드라마 ‘응답하라 1988’의 골목길이 많은 사람에게 추억과 감성을 떠올리게 했다. ‘응팔’의 장면처럼 골목에는 동네 사람들이 늘 앉아 있었다. 돌돌 말린 장판을 들고 와서 펼치기도 하고 돗자리를 쭉 펴기도 하고 나무 평상을 가져다 놓기도 한다. 그 위에 누우면 이야기책에서나 보았던 ‘나는 양탄자’를 타는 것 같았다. 부채를 휘휘 부치는 할머니 혹은 아주머니들이 동네의 여러 가지 소식들을 공유하기도 하고 각자 고된 인생의 이야기를 펼치기도 한다.


아이들은 그 위에 엎드려 숙제를 하거나 낙서를 하며 논다. 그러다가 누워서 지붕들 틈으로 샐쭉 보이는 하늘을 본다. 몬드리안이 그린 사람 얼굴처럼 길쭉한 골목 안의 하늘로 구름이 지나간다.


골목은 단지 집과 집들이 얼굴을 마주하고 있는 좁은 길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골목은 하나의 공간이며 하나의 공동체다. 골목으로 엮여 있는 ‘우리 동네’에서는 익명성이라는 것은 없었다. 아는 사이에 낯붉히며 싸우기보다는 적당히 양보하고 공조하는 것이 훨씬 편하다는 심정적 합의가 이뤄졌다. 낯선 사람이 들어오면 금세 알 수 있으니 동네의 안전도 자연스럽게 지켜졌다.


그러나 어느 날부턴가 집집마다 차를 들이게 된다. 또한 돈이 된다며 낡은 집과 좁은 길을 헐어버리고 연립주택이 들어서며 동네의 밀도가 높아진다. 세대당 한 대의 주차공간이 확보되지 않는다거나 진입로가 확보되지 않으면 집을 지을 수 없다는 법에 의해 구불구불하던 골목이 다림질되어 쭉 펴진 폭 4m 도로로 대체된다. 할머니가 부채를 휘두르던 곳에, 아이들이 배를 깔고 숙제를 하던 자리에 차들이 몰려든다. 우리는 그렇게 편리와 골목을 바꿔버렸다.


그리고 어느새 골목은 기억이나 추억을 위해 간혹 꺼내보는 낡은 흑백사진이 됐다. 골목의 기억이 없는 사람의 수가 기억하는 사람의 수를 조만간 넘어설 것이다.


없앨 때는 언제고 사방에서 골목 예찬이 들려온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골목은, 아이들이 뛰고 삶의 향기가 있던 골목은 점점 사라지고 있다. 이상한 법규와 제도가 서울의 지도에서 ‘진짜’ 골목을 차근차근 지워가는 와중에 사람들이 사진기를 들고 누빌 수 있도록 잘 세팅된 골목이 늘어나고 있다. 그곳에 우아하게 꾸며놓은 식당에서 이탈리아식 음식과 와인을 즐긴다. 사람들이 몰려가는 그 골목은 사람이 살지 않는 인공 감미료가 듬뿍 들어간 박제된 의사(擬似) 골목이다. 그곳에 낭만과 분위기는 있는지 모르겠지만 생활이 없고 가족이 없다.


도시는 놀이공원의 기구가 아니고 영화나 드라마를 찍기 위한 세트도 아니다. 도시는 사람이 사는 공간이고, 골목은 도시를 건강하게 만들어주는 생생한 실핏줄들이다. 답사나 놀이의 대상으로 박제되는 골목이 아닌, 사람들이 사는 건강한 생활이 담긴 골목들이 다시 우리에게 돌아오길 바란다.


▶관계기사 6면


 


 


임형남 가온건축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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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