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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산은행 출신 김진형, 美 군정 업고 실세

1947년 덕수궁에서 열린 가든파티에 참석한 여운형, 김규식, 이묘묵, 미국측 랭던, 소련측 스티코프(오른쪽부터).[중앙포토]


“흥 그 사마귀 같은 일본놈들 틈에서 살았고 닥싸귀같은 로스케(러시아인) 속에서도 살아났는데 양키라고 다를까….혁명이 일겠으면 일구, 나라가 바뀌겠으면 바뀌구. 아직 이인국이 살 구멍은 막히지 않았다.”


전광용의 소설 『꺼삐딴 리』는 혼란스러웠던 해방 전후기를 얍삽하게 살아가는 기회주의자 이인국이 주인공이다. 그의 가장 큰 생존기술은 세상이 뒤집힐 때마다 일어·러시아어·영어를 잽싸게 습득하는 어학능력이다.


세상이 뒤집힐 때 강자와의 소통 능력은 개인과 조직의 운명을 좌우하는 중요한 무기다. 1519년 황금을 노리고 신대륙을 밟은 스페인의 정복자 에르난 코르테스에게 아즈텍의 왕은 여자 노예 말린체(Malinche)를 선사했다. 그녀는 빠른 속도로 스페인어를 배워 코르테스의 통역을 맡다가 나중에는 정부(情婦)로 역할을 바꾸고, 마침내 자기를 넘긴 동족의 지배자가 됐다. 멕시코의 역사에서 말린체는 한 문명이 붕괴되는데 앞장선 더러운 배신자로 기억되지만, 똑같은 상황을 다룬 영화 ‘아바타(2009년)’에서는 원주민 처녀 네이티리가 오히려 침략자를 감화시켜 종족을 구한다.


 


통역관들 ‘적산 불하’ 등 좌지우지1945년 8월 15일 이후 남조선에서는 영어가 운명을 좌우했다. 연희전문학교 이묘묵(李卯默)의 삶이 그랬다. 그는 도산 안창호가 이끄는 흥사단에 가입했다는 이유로 교수직을 위협받자 재빨리 사상전향서를 제출하고 미나미(南次郞) 총독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그리고 리규 보우모쿠(李宮卯默)로 창씨개명하고 ‘미영격멸(美英擊滅)’을 주제로 시국강연을 다녔다. 그랬던 그가 해방이 되자 국내 실정을 알린다면서 영자신문 코리아타임즈(오늘날의 코리아타임즈와는 다르다)를 세우고 미군을 환영했다. 며칠 뒤 도착한 하지(J. R. Hodge) 군정청 사령관은 미국 박사인 그를 발견하고 자신의 통역관으로 임명했다. 역사학자 이묘묵은 그때부터 외교관의 길로 나섰다.


조선식산은행 행원 나익진(羅翼鎭, 훗날 한국산업은행 총재)은 전북 이리(오늘날의 익산)에서 해방을 맞았다. 그날부터 라하라 유쿠친(羅原翼鎭)이라는 일본식 이름을 버리고, 지역 주민들에게 영어회화를 가르쳤다. 미군을 영접하자는 취지였다. 그러다가 트럭을 얻어 타고 서울로 올라와 중앙우체국에서 일자리를 잡았다. 패망 직전 조선총독부가 그랬듯이, 미 군정청도 우편물 검열을 통해 사상불순자를 색출했다. 나익진은 그 일을 지휘하는 미군 관리의 통역관으로 뽑힌 것이다. 얼마 뒤 연희전문학교 시절 은사인 이묘묵을 만났다. 이묘묵은 은행원 출신 나익진을 군정청의 은행검사역으로 추천했고, 그때부터 그는 중앙 무대에서 금융계 실력자의 반열에 올랐다.


해방 직후 미군 통역은 굉장한 권력이었다. 공장·기업체·주택·빌딩 등 과거 일본인 소유 재산 일체를 군정청이 압류(1945년 12월 15일, 군정법령 제33호)하자 통역관들이 실세로 부상한 것이다. 소위 ‘적산(敵産)’이니 ‘귀속재산’의 불하(拂下)를 바라는 사람들은 통역관들에게 뒷돈을 주고, 그것을 받은 통역관들은 미군 관리들을 설득하여 소유권이나 경영권을 넘겼다.


여기서 ‘통역정치’와 ‘모리배(謀利輩, 귀속재산을 차지하려는 사기꾼)’라는 말이 생겼다. ‘빽’, ‘사바사바(속닥속닥의 비속어)’, ‘새치기(일본어 요코도리(?取り)의 직역어, 원래 뜻은 횡령)’도 이때 나왔다. “흐지부지 재판소, 먹고보자 관재처, 다짜고짜 경찰서, 오락가락 면사무소, 내일 모레 배급소, 또 나왔다 세무서”처럼 국가기관을 조롱하는 유행어도 출현했다. 대한민국 정부수립과 더불어 이런 말들이 사라졌지만, 서글프게도 ‘빽’은 지금까지 남아있다.


 

1 김진형 제3대 한국은행 총재. 대인관계가 좋고 영어에 능하며 외환 문제에 해박했기 때문에 식산은행 출신이면서도 한국은행 출범 시 합류하여 총재가 되었다. 그러나 장기영을 포함한 조선은행 직원들은 그를 껄끄럽게 생각했다.


영어·조사 역량 앞서는 식산은행 각광부정적인 말들이 판을 칠 때, 건전한 단어를 만들려고 고민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바로 조선은행과 조선식산은행 간부들이었다. 그들은 ‘서울경제구락부(훗날 수요회)’라는 친목모임에서 만나 수표(일본어 小切手)·어음(일본어 手形)·환(일본어 爲替)·환전(일본어 兩替)같은 금융용어들을 창조했다. 그들의 리더는 김진형(金鎭炯, 훗날 한국은행 총재)이었다.


조선은행을 제치고 식산은행의 김진형이 리더가 된 이유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영어실력이었다. 1945년 9월 10일 미 군정청은 해군 소속 스미스 소령과 로빈슨 소령을 각각 조선은행과 조선식산은행의 총재로 임명했지만, 그들은 업무에 별로 개입하지 않았다. 시카고에서 은행 지점장을 지낸 로빈슨 총재가 매우 수요일 각 은행의 간부들을 불러 연설하는 것이 전부였다. 김진형은 로빈슨의 통역이었던 탓에 연설이 끝난 뒤 자연스럽게 사람들을 따로 모을 수 있었다. 김영휘(훗날 산업은행 총재)·김경진(심사부장, 한국전쟁 때 납북)·송인상(훗날 부흥부 장관)·나익진 등 주로 식산은행계 인사들이 참석했고, 조선은행에서는 장기영 조사부 차장만 참석했다. 모임에서 뻘쭘했던 장기영은 사업가 김익균(한국전쟁 때 납북)과 시인 김광균 형제를 스폰서로 끌어들였다.


 

2 해방 직후 미 군정청이 파악한 조선식산은행의 지분투자 현황. 귀속재산 불하의 근거 중 하나다. 전후 남조선의 귀속재산 불하는 상당히 부실하게 진행 되었다. 연고자 우선 불하원칙은 통역관과 모리배가 유착하는 단초가 되었다.


둘째는 식산은행의 조사 역량이었다. 식산은행은 설립 당시부터 일본인과 조선인의 월급차이를 두지 않았고, 초대 총재 하야시 시게조(林繁藏)가 조선총독부 이재국장을 지낸 탓에 조사부를 중시했다. 김영휘는 규슈제대(九州帝大) 법문학부와 교토제대(京都帝大) 경제학부를 둘 다 마쳐 상사들이 눈독을 들이는 신입직원이었는데, 조사부에 배치됐다.


이에 비해 조선은행은 일본인과 조선인 직원 사이에 차별이 컸고, 조사부 기능도 시시했다. 쇼다 가즈에(勝田主計) 총재 시절 조사부가 부상했지만, 1920년대 중반 자본잠식 상태까지 도달한 이후에는 급격히 위축됐다. 해방 당시 조사부 직원은 13명에 불과하여 업무부 21명보다도 작았다. 그나마 조선인 직원은 한명도 없었다. 구용서·백두진·김유택·유창순·장기영·신병현 등은 해방 전 조사부에서 근무해 본 경험이 없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미 군정청의 관리들이 조선은행보다는 식산은행과 더 가까웠다. 조선은행이 독점하던 국고금 취급사무를 식산은행과 공유토록 하기도 했다(1946년 3월). 1947년 2월 과도정부가 출범할 때는 초대 재무부 이재국장 직을 식산은행 심사부장 김경진(金慶鎭)에게 맡겼다.


1947년 7월 미 군정청이 조선환금은행을 세울 때도 식산은행이 주축이었다. 이 은행은 미 군정청의 외환사무를 보좌하고 외환정책을 집행하는 외환부문의 중앙은행 격이었는데, 조선은행과 식산은행으로부터 각각 1억 원씩 대출을 받아 설립되었다. 위치도 두 은행의 중간(오늘날 서울 소공동 한진빌딩)에 있었고, 직원들도 두 은행에서 영어 잘하는 직원 각 5명씩 파견 받아 짜여졌다. 총재는 조선은행의 스미스 총재가 겸임했으나, 전무(김진형)·조사부장·외국부장·총무부장 등 주요 직책은 식산은행 직원들이 차지했다. 김정렴 등 조선은행 직원들은 실무를 맡았다.


 


중앙은행 후보로 앞서가며 오만 싹 터이런 여건에서는 중앙은행 후보로서도 식산은행이 앞서는 듯 했다. 사실 해방 당시 조선은행은 한반도보다 중국에 영업망이 훨씬 많아 국내기관이라고 보기도 어려웠다. 초조해진 조선은행 직원들이 다양한 이유로 조선환금은행 폐지론을 주장했으나, 조사경험이 많은 식산은행 직원들의 방어논리를 따라갈 수 없었다. 식산은행의 오만은 거기서 싹텄다.


1948년 8월 대한민국이 수립되자 미 군정청이 임명했던 윤호병 조선은행 총재가 갑자기 경질되었다. 취임한 지 3개월 밖에 지나지 않은데다가 그 자리를 이어받은 최순주 이사는 원래 연희전문학교 교수 출신이었다. 그래서 직원들의 동요가 컸다. 그해 12월 22일 재무부 이재국장 김경진이 진고개(오늘날의 충무로)의 천향원이라는 음식점으로 조선은행 간부들을 초대했다. 송년모임이었던 그 자리에서 김경진 국장은 구용서 이사에게 이직을 제안했다. 외부에서 온 후배 이사를 총재로 모시느니 차라리 식산은행으로 넘어오라는 것이었다. 조선은행은 어차피 비전이 없다는 말과 함께.


하지만 구용서는 일제 때 굴욕적인 강등까지 참아가며 조선은행에서 20년을 버틴 터줏대감이었다. 조선은행 직원들에게는 맏형이자, 자존심이었다. 김경진의 말에 기가 막힌 구용서가 불쾌감을 표시하자 술이 취한 김경진은 구용서의 멱살을 잡았다. 난장판이 됐다.


며칠 뒤 조선은행의 백두진 이사가 김도연 재무장관을 찾아 항의했다. 그리고 한 달 뒤 이재국장이 경질됐다. 김경진이 초라하게 식산은행으로 복귀하면서 조만간 중앙은행 제도를 마련해야 하는 그 중요한 자리는 조선은행의 김유택(훗날 한국은행 총재) 이사에게 돌아갔다. 그로써 식산은행은 중앙은행 후보에서 멀어졌다.


미 군정시절 잘 나갔던 식산은행이 모르는 것이 있었다. 조선은행은 군정청을 너머 이승만·김구·김성수 등 정치 지도자들과도 끈이 닿아 있었다는 사실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빽’이 훨씬 든든했던 것이다. 이것이 다음 이야기의 주제다.


 


차현진 한국은행 인재개발원장hyeonjin.cha@bok.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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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