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Load Image preLoad Image
검색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주요 기사 바로가기
다른 기사, 광고영역 바로가기
중앙일보 사이트맵 바로가기

“마귀와 마주하면…” 승군 지휘해 훈장 받은 타이쉬

군사 훈련을 마친 승려들. 전쟁이 끝난 후, 화약 냄새가 향 냄새보다 익숙해졌다며 군에 남은 승려들이 많았다. 연도 미상. [사진 김명호]


1946년 1월, 국민정부는 선종(禪宗) 명찰(名刹) 설두사(雪竇寺) 주지 타이쉬(太虛)에게 항일전쟁 승리 훈장을 수여했다. 이듬해 3월, 타이쉬가 세상을 떠났다. 정부는 생전의 업적을 기리는 성명서(褒揚太虛令)를 발표했다. “항전 시절 승려들을 독려해 구호대를 조직했다. 승려들이 가사(袈裟)를 군복으로 갈아입기까지 타이쉬의 영향이 컸다. 28년부터 17년간 항일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호국의 공이 가상(嘉尙)하다.”


28년 4월, 산둥(山東)에 진입한 북벌군이 지난(濟南)을 압박했다. 패배를 감지한 북양군벌은 병력을 철수시켰다. 지난에는 일본 교민 1800여명이 있었다. 일본은 자국인 보호를 이유로 출병했다. 5월 1일 북벌군이 지난에 진입하자 교전이 벌어졌다. 북벌군은 일본군의 상대가 못됐다. 민간인 포함, 6000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 부상자도 1800명을 웃돌았다. 일본은 중국에 책임을 돌렸다. “중국 사병이 일본 여인을 겁탈하고, 일본 순사를 구타했다.” 아무도 믿지 않았다.


프랑스 파리에 세계불학원(世界佛學院) 설립을 마치고 귀국한 타이쉬는 경악했다. 일본불교연합회에 전문을 보냈다. “고도(古都)가 하루 아침에 인간지옥으로 변했다. 철병을 간곡히 요구한다. 일본 당국에 압력을 행사해 주기 바란다.” 답전이 없었다.


 

타이쉬는 장제스의 고향인 시커우(溪口)의 설두사 주지를 14년간 역임했다. 설두사 주지시절.


3년 후, 일본군이 만주를 침략했다. 타이쉬의 반응은 예상 밖이었다. “타이완과 조선, 일본의 4000만 불도”에게 보내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일본과 조선, 타이완의 불도들은 불타의 구세정신을 계승할 의무가 있다. 모두 일어나 군벌을 폐출하고 전쟁을 제지해, 세계평화 구현에 앞장서야 한다.”


만주사변 2년 후, 상하이 사변이 발발했다. 중국 하늘에 전운이 감돌았다. 타이쉬는 산중에서 염불만 하지 않았다. “동북과 상하이에서 벌어진 사건이 중일 양국의 안전을 위협한다. 전쟁은 승리자가 없다. 모두 패배자로 전락한다. 일본 당국은 중국의 동북을 원래 모습대로 회복 시키기 바란다.”


일본이 산하이관(山海關)을 침범하자 타이쉬는 불교와 호국을 연계시켰다. 전국의 청년 불자들에게 “불교청년호국단” 조직을 권했다. 종군과 모금, 선전 활동을 독려했다. 워낙 행동이 튀다 보니 비난도 잇달았다. 나대기 좋아하는 정치화상(政治和尙)이라며 손가락질을 많이 받았다.


화가 펑쯔카이(豊子愷·풍자개)는 호기심이 남달랐다. 비난 받는 사람을 만나봐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었다. 타이쉬를 찾아갔다. 몇 날 며칠을 묵으며 허점을 찾으려고 무진 애를 썼지만 허사였다. “떠도는 소문들은 오해투성이다. 타이쉬는 자비와 용맹을 겸비한, 진정한 화상이다.”


인물 평에 야박했던 루쉰(魯迅·노신)도 타이쉬에게는 후한 점수를 줬다. “사람을 가리지 않았다. 사상의 폭과 깊이는 끝을 헤아리기 힘들었다.” 타이쉬와의 만남에 동행했던 루쉰의 수제자는 구체적인 기록을 남겼다. “많은 사람들이 타이쉬를 정치화상이라고 깎아내렸다. 가당치 않은 말이다. 타이쉬 법사는 근대화상이라는 말이 잘 어울린다. 온갖 명성을 누리면서도 대 화상의 모습이라곤 어느 한구석도 찾아보기 힘들었다. 봄바람처럼 모두를 푸근하게 해줬다. 그의 말이라면 뭘 해도 도리에서 어긋남이 없을 것 같았다.”


국공연합이 성사되고 항일전이 본격화되자 중앙훈련총감부(中央訓練總監部)는 전국의 승려들에게 징집령 비슷한 걸 내렸다. “지금 이 시간부터 장정으로 분류한다. 장정대에 편입해 군사훈련을 받도록 해라.” 승려들 사이에 찬반 논쟁이 벌어졌다. “우리도 국민의 한 부분이다. 국민 병역의 의무가 있다”는 주장이 있는가 하면 “우리는 이미 출가했다. 불타의 자비를 봉행하는 사람들이다. 전선에서 적을 살상하는 것은 불교의 교리에 어긋난다”는 주장도 만만치 않았다.


타이쉬는 훈련총감부에 서신을 보냈다. “승려들끼리 훈련을 받겠다. 복장은 우리에게 맡겨라. 간편하되 원형은 유지하고 싶다. 두 가지 사항만 허락하면 일반인과 똑같이 훈련에 참여하겠다.” 끝으로 “훈련을 마친 후 전투부대에는 배속시키지 말아달라”고 요청했다.


훈련총감부는 타이쉬의 요청을 군말 없이 수용했다. 타이쉬는 전국의 사찰에 공문을 보냈다. “국가가 위기에 처했다. 우리는 출가한 몸이지만, 국가를 뒤로 하지는 않았다. 신해혁명 이후 계속된 우리의 근대화는 일본의 파괴에 직면했다. 비분을 가눌 길 없다. 비바람이 외로운 등불을 핍박한다. 목탁 두드리며 희생된 항일 전사를 추도하는 것이 능사가 아니다. 마귀와 마주하면 용기가 솟는 법, 정부의 통일된 지휘 하에 난민 구호와 전쟁 지식을 습득하기 바란다. 몸을 던져 국가와 인민을 구하는 것이 불타의 가르침을 실현하는 길이다. 의학 상식과 군 기본동작을 익히고, 삼민주의와 정치사상 같은 학과도 소홀히 하지 마라. 밥값은 각자 부담하고 부족한 부분은 사찰에서 지원해라. 교관들에겐 밥값을 받지 마라.”


타이쉬는 민국 4대 고승(高僧)중 한 사람이었다. 말에 권위가 있었다. 전국의 사찰에 승려 훈련반이 발족했다.<계속>


 


김명호

구독신청

AD
온라인 구독신청 지면 구독신청

중앙일보 핫 클릭

PHOTO & VIDEO

shpping&life

뉴스레터 보기

김민석의 Mr. 밀리터리 군사안보연구소

군사안보연구소는 중앙일보의 군사안보분야 전문 연구기관입니다.
군사안보연구소는 2016년 10월 1일 중앙일보 홈페이지 조인스(https://news.joins.com)에 문을 연 ‘김민석의 Mr. 밀리터리’(https://news.joins.com/mm)를 운영하며 디지털 환경에 특화된 군사ㆍ안보ㆍ무기에 관한 콘텐트를 만들고 있습니다.

연구소 사람들
김민석 소장 : kimseok@joongang.co.kr (02-751-5511)
국방연구원 전력발전연구부ㆍ군비통제센터를 거쳐 1994년 중앙일보에 입사한 국내 첫 군사전문기자다. 국방부를 출입한 뒤 최장수 국방부 대변인(2010~2016년)으로 활동했다. 현재는 군사안보전문기자 겸 논설위원으로 한반도 군사와 안보문제를 깊게 파헤치는 글을 쓰고 있다.

박용한 연구위원 : park.yonghan@joongang.co.kr (02-751-5516)
‘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