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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휴 북벌론 꺾은 사대부들의 이중성

윤휴 초상. 진정한 북벌론자인 윤휴는 사대부의 각종 특권을 폐지해 민생을 강화한 뒤 광활한 요동 지역을 수복하자고 주장했으나 호응하는 사대부는 거의 없었다. 사진가 권태균


【총평】


후금은 점차 세력을 키워 나라 이름을 청으로 고치고, 태종은 스스로 황제라 칭했다. 후금은 명과의 전쟁에 대비하여 물자를 확보하고 배후의 위협을 차단하려는 목적으로 조선을 침공했다(정묘호란, 1627). 후금군은 의주와 안주를 함락하고 황해 평산까지 침입했다. 철산 용골산성의 정봉수, 의주의 이립을 비롯한 의병들은 각지에서 후금군에 대항했다. 의병과 관군이 합세하여 배후를 차단하자 후금은 조선에 강화를 요구했다. 조선은 후금과 형제의 맹약을 맺고 강화했다. 조선은 후금과 강화 조약을 체결하여 피해를 줄일 수 있었다. 그러나 서인 중에 후금과의 강화로 인조 반정의 명분이 훼손되었다고 보는 척화파가 나타났다. 이들은 후금에 대한 강경책을 주장하여 온건책을 내세우는 주화파와 갈등을 빚었다.


후금이 조선에 군신 관계를 요구해 오자, 조선에서는 외교적 교섭을 통해 평화적으로 해결하자는 주화론과 대의명분에 따라 끝까지 싸우자는 척화론이 대립했다. 결국, 척화론이 힘을 얻어 청의 요구를 거절하자 청 태종은 10만 명의 군대를 이끌고 다시 쳐들어왔다(병자호란, 1636). 왕과 대신들은 남한산성으로 피란하여 45일 동안 항전했으나, 결국 청에 굴복하고 군신 관계를 맺었다.


전쟁이 끝난 후 소현 세자와 봉림대군, 3학사(홍익한, 윤집, 오달제) 등 척화론자와 수만 명의 백성이 청의 수도로 끌려갔다. 이에 임진왜란 때 조선을 도와준 명에 대한 의리를 지켜 청에 복수하자는 북벌 운동이 전개되었다.


청에 볼모로 잡혀갔다가 돌아와 왕위에 오른 효종은 송시열, 송준길 등 서인과 이완을 중용하여 군대를 양성하고 성곽을 수리했다. 또한 , 허목과 윤선도 등 저명한 남인 인사도 등용하여 붕당 간 조화를 유지해 나갔다. 이를 바탕으로 대동법이 확대 실시되고, 북벌 정책이 추진되었다. 그러나 청의 세력이 점점 커지고 늘어나는 군비로 재정이 어려워지자, 효종이 죽은 뒤 북벌 계획은 중단되었다. 숙종 때에도 청의 정세 변화를 계기로 남인 윤휴 등이 북벌을 주장했으나, 실천에 옮기지는 못했다. ?


숙종 초에 집권한 남인은 북벌론을 내세워 군사 훈련과 군비 확장에 노력했다. 숙종은 즉위 초에 남인의 윤휴 등이 북벌론을 제기하며 군사적 기반을 강화하고 세력을 넓혀 가자 이들을 몰아내고 서인 중심의 정권을 세웠다(경신환국). 정권을 잡은 서인은 정국 운영 방식을 두고 분열하여 송시열 중심의 노론과 윤증을 영수로 하는 소론으로 나뉘었다. 노론은 북벌론의 대의명분을 내세우면서도 민생 안정을 강조했고, 소론은 실용 지식과 행정 실무를 중시하면서 적극적인 북방 개척과 국방 강화를 추진했다.


간도는 옛 고구려와 발해의 영토였으나 발해 멸망 이후 여진족이 거주했다. 청은 중국을 차지한 뒤에 만주 지역에 살던 여진족이 중국 본토로 이동하여 만주에는 사람들이 살지 않았다. 중국을 차지한 청은 그들의 본거지인 만주 지역을 성역화하여 한족의 출입을 제한하고, 매년 허가된 인원에게만 백두산 부근에서 인삼을 캐도록 하였다. 그러나 평안도와 함경도 북부 지역의 조선인들이 압록강과 두만강을 건너가 인삼을 캐거나 사냥하다가 청인들과 충돌하는 일이 자주 일어났다. 이에 숙종 때 조선과 청의 관리들이 백두산 일대를 답사하고 서쪽으로는 압록강, 동쪽으로는 토문강을 경계로 국경선을 확정하여 백두산정계비를 세웠다(1712).?

발해 건국지인 동모산 부근의 강과 평야. 길림성 돈화현에 있는데, 발해 유적지는 동북공정에 따라 한국인들의 접근을 엄격히 금지하고 있다.


1712년 백두산정계비 세운 후에는 적극적으로 북방 지역을 개발했다. 청과 국경을 확정한 후 압록강과 두만강 중상류 지역은 인구가 늘어나고 개간지가 확대되었다. 1787년(정조 11)에 개마고원 일대에 장진부를 세우고, 1823년(순조 23)에는 압록강 상류 지역에 후주부를 설치했다. 이어서 1869년(고종 6)에는 자성군과 후창군을 세워 폐4군 지역의 행정 구역을 완전히 복구했다. 대한 제국 때에 토문강의 위치에 관한 양국의 의견이 갈라져 간도의 영유권 문제가 발생했다.


우리나라는 일찍부터 독도가 우리 영토임을 인식해왔다. “세종실록지리지”와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독도가 울릉도와 함께 조선의 영토라는 사실이 분명히 기록되어 있다. 울릉도와 독도는 삼국 시대 이래로 우리의 영토였으나 17세기 말 일본 어민이 자주 침범하여 충돌이 일어났다. 우리 영토인 울릉도와 독도에 일본 어민들이 자주 출몰하자 숙종 때 안용복은 이들을 몰아내고 일본으로 넘어가 도쿠가와 막부로부터 우리나라 영토임을 확인 받고 돌아왔다. 안용복의 활약으로 도쿠가와 막부는 울릉도와 부속 도서(독도)를 조선 영토로 인정한다는 내용의 문서를 조선에 주었다. 안용복 사건을 계기로 조선 정부는 일본 막부와 울릉도 귀속 문제를 확정하고 울릉도 지도를 제작하는 등 울릉도 경영에 적극적인 자세를 보였다. 정부에서는 울릉도에 관리를 파견하는 등 적극적으로 관리했다. 정부는 거주 환경이 좋지 않다는 이유로 섬을 비워 두는 정책을 실시하기도 했으나, 일본 어민이 계속 침범하자 19세기 말에는 주민들의 이주를 장려하고 군을 설치했으며 관리를 파견하여 독도까지 관할하도록 했다.


 



 


 


 


【핵심 키워드】


☞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이후 세자와 봉림대군과 척화론자, 수만 명의 백성이 청의 수도로 끌려갔다. 임진왜란 때 조선을 도와준 명에 대한 의리를 지켜 청에 복수하자는 [북벌 운동]이 전개되었다. [효종]은 [송시열], 송준길 등 서인을 중용하여 군대를 양성하고 성곽을 수리했다.


숙종 때에도 남인 [윤휴] 등이 북벌을 주장했다. 숙종은 윤휴 등이 [북벌론]을 제기하며 세력을 넓혀 가자 이들을 몰아내고 서인 중심의 정권을 세웠다([경신환국]).


숙종 때 조선과 청의 관리들이 서쪽으로는 [압록강], 동쪽으로는 [토문강]을 경계로 국경선을 확정하여 [백두산정계비]를 세웠다(1712).


우리 영토인 [울릉도]와 [독도]에 일본 어민들이 자주 출몰하자 숙종 때 [안용복]은 이들을 몰아내고 일본에 가서 도쿠가와 막부로부터 우리나라 영토임을 확인 받고 돌아왔다. ☜


 


【예상 문제】


1.?다음 자료를 이용한 탐구 주제로 가장 적절한 것은?

함경도의 백성 10여 명이 후춘(厚春)으로 몰래 들어가 청나라 사람을 해치고 그들이 캔 인삼을 빼앗았다. 다른 청나라 사람이 이를 알아채고 경원부(慶源府)까지 쫓아와 그 사실을 고하니, 북병사 이상훈이 조정에 보고했다. 임금이 비변사에 명령하기를 “함경도에 지시하여, 국경을 넘은 사람들을 체포하고 칙사가 오기를 대비하도록 하라.”고 하였다.
① 정묘호란의 발생 원인


② 4군?6진의 설치 과정


③ 북벌 운동의 추진 경위


④ 간도 협약 체결의 영향


⑤ 백두산 정계비의 건립 배경

* 2013학년도 9월 모의 평가 3번


 


2. ?가상 토론회에서 제기된 (가), (나) 주장에 대한 설명으로 옳지 않은 것은?



① (가)의 배경은 병자호란이다.


② (가)는 숙종 때 윤휴의 비판을 받았다.


③ (나)는 19세기 후반에 개화 사상으로 이어졌다.


④ (나)는 청의 발전된 문물이 전해지면서 확산되었다.


⑤ (가)의 대표적 인물은 송시열, (나)는 박제가이다.

* 2011학년도 9월 모의평가 13번


 


3. ?다음은 19세기 초 함경도의 지방관이 쓴 일기의 일부이다. 이를 이용한 탐구 학습의 주제로 가장 적절한 것은?



 


① 세종대 4군 6진 개척


② 신라의 북방 영토 확장


③ 백두산 영유권과 간도 문제


④ 서희의 담판과 강동 6주 확보


⑤ 고려 시대 여진 정벌과 9성 축조

* 2007학년도 수능 1번


 


4.?다음은 조선 시대 일본과의 관계를 정리한 것이다. 이와 관련된 서술로 옳은 것을 [보기]에서 모두 고른 것은?


 


 


 


(가) 이종무는 병선 227척, 병사 17,000명을 이끌고 쓰시마 섬을 토벌하였다.


(나) 신숙주는 일본에 다녀와 견문기인 “해동제국기”를 썼다.


(다) 안용복은 울릉도에 출몰하는 일본 어민을 내쫓았다.


[보기]


ㄱ. (가)로 인하여 일본으로부터 왜구의 근절을 약속받았다.


ㄴ. (나)를 계기로 조선은 군사 문제를 전담하는 비변사를 설치하였다.


ㄷ. (다)는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의 영토임을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


ㄹ. (가), (나) 이후 일본과의 교류가 일시적으로 단절되었다.


① ㄱ, ㄴ ? ?② ㄱ, ㄷ ? ?③ ㄴ, ㄷ


④ ㄴ, ㄹ ? ?⑤ ㄷ, ㄹ

* 2007학년도 9월 모의평가 18번


 


5.?지도를 토대로 탐구 학습을 할 때 관련 주제로 적절한 것은?



 


① 고려 말 왜구의 해안 침탈


② 안용복의 영토 수호 활동


③ 여?몽 연합군의 일본 원정


④ 임진왜란과 조선 수군의 활약


⑤ 유정의 대일 외교 활동과 포로 송환

* 2006학년도 6월 모의 평가 4번


 


6.?다음은 우리나라와 관련 있는 여러 나라에 대한 자료이다. (가) ~ (라) 나라와 관련된 옳은 설명을 [보기]에서 고른 것은?


 


 


 


 


 


 


 

(가)의 군대가 살수를 절반쯤 건넜을 때, 우리 군사가 뒤에서 공격하였다. 적장이 전사하고 한꺼번에 무너졌다. … (중략) … 처음 요동에 도착했을 때 30여 만이던 군대가 돌아갈 때는 2천 7백 명뿐이었다.

- 삼국사기 -

(나)의 군대가 귀주를 지나니 강감찬이 동쪽들에서 맞아 크게 싸웠다. 양편 군사가 서로 버티어 승패가 나지 않았다. … (중략) … 그들이 패하여 북쪽으로 도망쳤다.

- 고려사절요 -

?(다)의 군대가 쳐들어와 각 도에서 의병이 일어났다. … (중략) … 호남의 고경명?김천일, 영남의 곽재우?정인홍, 호서의 조헌이 가장 먼저 의병을 일으켰다.

- 조선왕조실록 -

?(라)는 천하를 차지한 지 1백년이 지났다. 그들을 모조리 오랑캐라 하고 중국의 법마저 폐기해 버린다면 옳지 못하다. 진실로 백성에게 이롭기만 한다면, 성인은 그 법이 비록 오랑캐에게서 나왔다 하더라도 취할 것이다.

- 북학의 -


 


[보기]


ㄱ. (가)의 침략에 대비해서 고구려는 천리장성을 쌓았다.


ㄴ. (나)는 조공 조건으로 고려에 동북 9성의 반환을 요구하였다.


ㄷ. (다)에 대해 조선은 교린 정책을 실시하였다.


ㄹ. (라)와 조선은 국경을 확정하여 백두산 정계비를 세웠다.


① ㄱ, ㄴ ??② ㄱ, ㄷ ??③ ㄴ, ㄷ


④ ㄴ, ㄹ ??⑤ ㄷ, ㄹ

* 2008학년도 6월 모의평가 12번?


 


【정답 및 해설】

해설 : 정답 ⑤
⑤ 조선 후기 조선과 청의 백성들이 경계를 넘어 자주 충돌했다. 이에 숙종 때 백두산에 백두산정계비를 세웠다. 정계비 내용은 ‘서쪽은 압록강, 동쪽은 토문강을 경계로 한다.’는 내용이다.

해설 : 정답 ②
② 송시열과 윤휴는 주자의 학설을 해석하는데 있어 입장 차이를 보였지만, 북벌에 대해서는 같은 입장을 보였다.

해설 : 정답 ③
③ 백두산 정계비에는 조선과 청이 압록강과 토문강을 경계로 국경을 정한다고 새겨져 있다. 후일 토문강에 대한 해석을 둘러싸고 간도 귀속 문제가 발생했다. 그러나 조선의 외교권이 박탈당한 상태에서 일본은 청의 만주 지역 철도 부설권을 획득한 대가로 1909년 청과 간도 협약을 체결하여 청의 영토로 주장했다.

해설 : 정답 ②
② ㄱ. 세종 때 이종무는 쓰시마 섬을 정벌한 후 왜구의 근절을 약속받고 돌아왔다. ㄷ. 숙종 때 안용복은 울릉도에 출몰하는 일본 어민들을 쫓아내고 일본에 건너가 울릉도와 독도가 우리 땅임을 확인받고 돌아왔다.

해설 : 정답 ②
② 울릉도와 독도는 우리의 영토였으나, 일본 어민들이 자주 침범하여 충돌이 빚어졌다. 이에 숙종 때 안용복이 울릉도에 출몰하는 일본 어민들을 쫓아 내고 일본에 건너가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의 영토임을 확인 받고 돌아왔다.

해설 : 정답 ⑤
(가)는 고구려를 공격했는 수, (나)는 고려를 공격했던 거란, (다)는 조선을 침입했던 일본, (라)는 조선을 굴복시켰던 청이다.


⑤ ㄷ. 조선시대 외교 정책의 기본 방향은 사대 교린이었다. 교린에 해당하는 나라는 일본과 여진족이다. ㄹ. 청과 조선은 국경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백두산 정계비를 세우고 압록강과 토문강을 경계로 국경을 확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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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석 소장 : kimseok@joongang.co.kr (02-751-5511)
국방연구원 전력발전연구부ㆍ군비통제센터를 거쳐 1994년 중앙일보에 입사한 국내 첫 군사전문기자다. 국방부를 출입한 뒤 최장수 국방부 대변인(2010~2016년)으로 활동했다. 현재는 군사안보전문기자 겸 논설위원으로 한반도 군사와 안보문제를 깊게 파헤치는 글을 쓰고 있다.

박용한 연구위원 : park.yonghan@joongang.co.kr (02-751-5516)
‘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