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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일의 事思史] 조선 왕을 말하다 : 요약 (30)

강희제의 초상화. 9세에 왕위에 올라 69세까지 60년간 통치했다. 중국 임금 중 가장 오랜 기간 재위했다. 재위 시절 삼번(三藩)을 철폐하고 대만을 장악해 청조의 영토를 크게 넓혔다. 사진가 권태균


현종 말~숙종 초 청나라는 ‘삼번의 난’이라고 불리는 내전에 휩싸였다.?효종이 재위 10년(1659) 송시열과 독대에서 “틈을 봐서 저들이 예측하지 못할 때 곧장 산해관으로 쳐들어가면 중원의 의사(義士), 호걸들이 어찌 호응하는 자가 없겠는가”라고 희망했던 국제 정세가 조성된 것이다. 효종 같으면 비축미를 풀어 당장 압록강을 건넜을 상황이었지만 북벌 대의를 외치던 집권 서인은 조용했다. 청이 전란에 휩싸였다는 소식은 현종 15년(1674) 5월께는 지방 유생들도 알 정도가 되었다.?


훗날 제자들에 의해 북벌의 화신으로 추앙된 송시열은 정작 아무 말도 없는 상황에서 그해 7월 1일 비밀상소(密疏)를 올려 북벌을 주창한 인물이 백호 윤휴(윤휴)였다.?윤휴는 세자시강원 진선(進善:정4품)과 사헌부 지평(持平:정5품) 등을 역임했으나 포의(布衣)로 자칭하며 상소를 올려 ‘효종이 10년 동안 북쪽으로 전진해 보려는 마음을 하루라도 잊은 적이 없었다’며 북벌을 주창했다.?윤휴는 ‘동시에 중국 북부와 남부, 일본에도 격문을 전해 함께 떨쳐 일어나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하지만 서인(노론)이 작성한 『현종수정실록』은 “윤휴가 밀소(密疏)를 올렸으나 (현종이) 답하지 않았다”고만 쓰고 밀소의 내용에 대해서는 한 자도 적지 않는 대신 비난만 잔뜩 써놓았다. 송시열이 아니라 윤휴를 북벌 주창자로 만들어줄 수는 없다는 당파적 오기였다.?이런 와중에 제2차 예송논쟁을 계기로 서인들이 몰락하고 남인들이 정권을 잡았다.?윤휴는 숙종 즉위년(1674) 12월 1일 다시 상소를 올려 북벌 계책을 담은 밀봉한 책자(冊子)를 함께 올렸다. 숙종은 영의정 허적(許積)에게 “윤휴의 상소는 화(禍)를 부르는 말이다”고 평했다. 그러자 남인 정승 허적은?숙종의 말에 찬동했다.?예조판서 권대운(權大運)도 “형세를 돌아보지 않고 큰소리하기를 좋아하는 자는 심히 불가합니다(『숙종실록』 즉위년 12월 1일)”고 가세했다. 서인은 물론 남인들 중에서도 북벌이 가능하다고 믿는 벼슬아치는 거의 없었다.?


그러나 숙종 1년(1675) 1월 2일 경연 시독관(侍讀官) 권유(權愈)가 허목(許穆)과 윤휴를 경연에 출입하도록 허가해 달라고 요청하면서 상황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벼슬을 사양하던 윤휴는 숙종이 사관을 통해 비망기를 보내 ‘생각을 고치기를 내가 날마다 바란다’고 전하자 드디어 경연에 나왔다. 그의 나이 59세였다. 윤휴는 첫 경연에서 소매 안에서 혁제(종이쪽지)를 꺼내 읽었는데 ‘정도를 확립하고 천하의 대의를 펴자’는 내용이었다. 숙종은 “격언(格言)이 아닌 것이 없으니 마땅히 유심하겠다”고 답했다. 두 사람의 만남은 5년 후에는 비극으로 끝나게 되지만 이때만 해도 송시열의 빈자리를 메우는 것으로 여겨졌다. 윤휴의 출사로 현종 때 묵살되었던 비밀상소가 숙종 1년 1월 경연에서 다시 논의되었다. 정오에 시작된 경연은 포시(哺時:오후 3~5시)에 끝났는데 사관은 긴 시간 동안 숙종이 “단정히 손을 모으고 듣기만 했다”고 전하고 있다. 이때 숙종의 나이 열다섯, 강희제의 나이 스물둘이었다.?


할아버지(효종)가 살아 계셨다면 어떻게 했을지를 숙고했을까? 윤휴가 병거(兵車)를 만들자고 주장한 것도 대륙에서 기병을 상대로 싸우기 위한 것이었다.?숙종은 “이미 만들게 했으니 그 제도를 보면 가한지 알 수 있을 것이다”고 답했다. 숙종은 윤휴의 북벌 주장에 군비를 증강하면서 기회를 보자는 쪽이었다. 노론에서 편찬한 『숙종실록』 사관의 말은 윤휴의 북벌론에 대한 불편한 심기가 잘 드러나 있다.?


사신(史臣)은 말한다. “복수하고 치욕을 씻는 천하의 대의를 무릇 누가 옳지 않다고 하겠는가? 단 지금이 어떤 때인가? 백성의 곤궁은 극에 달했고 재력도 고갈되었다. 어린 임금(幼主)이 새로 섰고 조정이 이렇게 어지러운데도 천하의 일에 종사하는 것이 가능하겠는가? 윤휴가 한 번 입으로 대의를 빙자했으나 이날 군신들이 경연에서 정한 것은 머뭇거리고 미룬 것에 불과한데 윤휴가 임금의 뜻이 이미 정해졌다고 여겨 스스로 그 일을 담당했으니 그도 우활(迂闊)하다 하겠다(『숙종실록』 1년 1월 11일).”


윤휴는 숙종을 국왕으로 봉하는 강희제의 칙서도 거부하자고 청했는데 이에 대해 숙종이 “자강의 방책은 지금 실행할 수 있지만 국왕으로 봉하는 칙서를 가져오는 사신을 어떻게 거절하고 마중 나가지 않겠는가?(『숙종실록』 1년 1월 28일)”라고 거부했다. 숙종 1년 2월 전 우후(虞候:병마절도사, 종3품) 노우(盧瑀)가 상소해서 북벌을 주창했는데 “윤휴의 논의가 있고 나서 이런 상소가 잇따라 끊이지 않았다(『숙종실록』 1년 2월 12일)”고 전하고 있다. 그러나 북벌이 가능하다고 생각한 인물은 윤휴·이하진 등 남인 중에서도 소수일 뿐 대다수 사대부는 불가능한 일로 여기고 있었다. 북벌은 말로만 주창해 선명성만 나타내면 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속 다르고 겉 다른 이중처신이었다.


윤휴가 숙종 1년(1675) 9월 체부(體府: 도체찰사부) 설치를 주장한 것은 북벌을 위한 것이었다.?숙종은 체부 설치를 결정하고 영의정 허적에게 도체찰사를 겸임시켰다. 허적은 부체찰사 후보로 김석주·윤휴·이원정을 천거했고(三望) 숙종은 김석주를 낙점했다. 도체찰사를 남인 허적이 차지했으니 부체찰사는 서인 김석주에게 맡겨 견제하게 한 것인데, 부체찰사로서 체부를 북벌 총지휘부로 꾸리려던 윤휴의 계획은 제동이 걸린 셈이었다. 북벌을 위한 윤휴의 암중모색이 계속되는 가운데 숙종 6년(1680)이 되었다.? 남인 정권은 강경개혁파인 청남과 온건개혁파인 탁남으로 나뉜 채 6년째 집권하고 있었다. 숙종 5년(1679) 일흔 살이 된 허적은 거듭 면직을 요청했으나 숙종은 반려했다. 허적은 영의정으로서 행정권을 장악하고 도체찰사로서 군권을 장악했으나 신중하게 처신했다.


숙종 5년부터 서인들의 공세가 거칠어졌다. 서인들의 공세는 허적의 서자 허견(許堅)과 윤휴에게 맞춰졌다. 허견은 서자였지만 외아들이었기에 문과(文科)에 급제해 교서관(校書館) 정자(正字)를 지낸 인물이었다. 허견에 대한 서인들의 광범위한 정보 수집은 당초 의도와는 달리 그의 부인 홍예형과 유철의 간통사건이 발각되는 부산물을 낳았다. 서인들은 또 허견이 서억만(徐億萬)의 아내 이차옥(李次玉)을 5∼6일 동안 납치해 능욕했다고 주장했다.?이 사건은 포도대장의 꼬임에 따라 거짓 자백을 했다고 말을 바꾸었다(『숙종실록』 5년 3월 4일)는 기록처럼 수사기관마다 진상이 달랐다. 남인들은 정권을 잡았지만 포도청 같은 여러 기관들은 여전히 서인들이 장악하고 있었다.?포도대장 구일(具鎰)은 허적의 집을 집중 감시했다. 숙종은 “포도청에서 거짓 자백을 받은 것이 명약관화하다”면서 허견을 석방하고 포도대장 구일을 문초했다.?


한성부 좌윤 남구만은 “대사헌 윤휴가 서도(西道: 황해·평안)의 금송(禁松) 수천 그루를 베어 강가에 새 집을 짓고 있다고 한다(『숙종실록』 5년 2월 10일)”고 공격했다. 윤휴는?헛소문이라고 항변했다. 성균관 직강(直講) 김정태(金鼎台)가 “관리들이 윤휴의 집에 달려들어 새것, 헌것을 가리지 않고 거리낌 없이 일일이 헤아려 조사하고 있다(숙종 5년 2월 13일)”고 항의한 것처럼 서인은 야당이지만 수사기관을 장악하고 있었다.?


숙종은 남인 유혁연을 서인 김만기로 바꾸고 총융사에 신여철, 수어사에 김익훈 등 모두 서인으로 바꾸었다. 그리고 서인 김수항을 영의정, 민정중을 우의정으로 임명했다. 이것이 숙종 6년 정권이 남인에서 서인으로 넘어가는 경신환국(庚申換局)이다.?

허적의 초상. 허적은 원만하고 신중한 인품을 갖춰 온건개혁파인 탁남을 이끌면서 강경개혁파인 청남과 야당인 서인 사이를 중재했으나 경신환국 이후 정치보복을 당해 사형당했다. 사진가 권태균


사전에 짜인 각본처럼 허적과 윤휴에 대한 공세가 시작되었다. 허견에게는 인평대군의 아들 복선군(福善君) 이남(李枏)을 추대하려 했다는 혐의가 씌워졌다. 병조판서 김석주는 경기도 이천의 둔군(屯軍)들이 매일 훈련하고 대흥산성에서도 군사훈련을 했는데, 이것이 “훗날 군사를 동원하는 계제(階梯)로 삼으려고 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천의 둔군 훈련이 복선군 추대를 위한 예행연습이었다는 것이다.?허견은 혐의를 부인했으나 숱한 고문 끝에 4월 12일 군기시(軍器寺) 앞 길에서 능지처사 당했고 복선군 이남은 교수형에 처해졌다. 허적 역시 서인으로 강등당했다가 사형당했다. 윤휴에게는 정사에 관여하는 대비(大妃)를 조관(照管: 단속)하라고 말했다는 점과 자신이 부체찰사로 선임되지 않자 얼굴에 불쾌한 빛을 띠었다는 혐의가 씌워졌다. 윤휴가 부체찰사가 되기를 원한 것은 북벌을 위한 것이었다는 공지(共知) 사실은 애써 무시되었다.?


허적은 국청에서 허견이 윤휴를 부체찰사로 천거하면서 “이 사람이 대의(大義: 북벌)를 밝히려고 하는데 어찌 이를 버리고 다른 사람을 구하겠습니까?”라고 말했다고 전하고 있다. 허견 역시 윤휴의 북벌론을 지지했던 인물이었다.? 그간 경신환국은 서인과 남인 사이 당쟁의 결과물로만 인식되고 있었지만 실상 청의 정세와 깊은 관련을 맺고 있었다. 이 무렵 남부 중국 전역을 전쟁터로 몰고 갔던 삼번(三藩)의 난이 거의 진압되고 있었다. 숙종 4년 8월 오삼계가 죽고 손자 오세번(吳世번)이 뒤를 이었고, 청군은 숙종 5년 악주(岳州: 현 호남성 악양)를 탈환했다. 삼번의 패퇴가 기정사실이 되자 숙종은 북벌을 위한 도체찰사부를 역모의 근거지로 만들고 북벌론자 윤휴 등을 사사함으로써 청의 의심에서 벗어나려는 술책을 부린 것이다. 예송논쟁에서 왕가(王家)를 높이는 3년복설과 북벌을 주창하고 호포제 등으로 백성들의 부담을 덜어주려 했던 유신(儒臣) 윤휴는 이렇게 정치보복으로 세상을 떠났다. 윤휴가 죽은 지 나흘 후인 5월 24일 숙종은 영의정 김수항과 우의정 민정중의 주청을 받아들여 송시열을 방면했다. 윤휴의 빈자리를 다시 송시열이 차지하게 된 것이다.


- 이덕일, 「事思史 조선 왕을 말하다」, 제124호 2009년 7월 26일, 제126호 2009년 8월 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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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