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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갯마을 벽화 명소로, 공예가 남현경·이현정…약자 목소리 만화로 품다, 사회 아픔 녹인 김금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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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 김녕 해안가에 금속공예 벽화를 제작·설치한 남현경(왼쪽)·이현정씨. 왼쪽 작품은 남씨가 제작한 ‘원더 해녀’다.


어망을 든 원더우먼이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달린다. 옆 말풍선엔 이렇게 적혀 있다. “Do You Know Who We Are?(우리가 누군 줄 알아?)” 금속공예 아티스트 남현경(33)씨가 제주도 김녕리 해안가 건물 외벽에 동으로 장식한 이 벽화의 제목은 ‘원더 해녀(Wonder HaeNyeo)’다. “제주도 해녀 하면 ‘고된 인생’이라는 이미지가 강하잖아요. 그런데 제주에 내려와 ‘물질’하는 해녀 아주머니들을 보니 함께 ‘뽕짝’ 들으며 잡은 물고기를 정리하기도 하고 아주 즐거워 보이더라고요. 밝고 건강한 해녀의 이미지를 보여주고 싶었어요.”

제주도 제주시 구좌읍 김녕로 1길부터 21길까지. 김녕 해안가를 따라 조성된 ‘고장 난 길’엔 이런 신기한 벽화 28점이 설치돼 있다. 흔히 보는 알록달록한 그림 벽화가 아니라 동과 철로 작업해 단아한 분위기를 내는, 그래서 고즈넉한 바닷가 풍경에 신비하게 녹아드는 금속공예 벽화다.

제주 토박이말로 ‘고장’은 ‘꽃’, ‘난’은 ‘피우다’는 의미니 ‘고장 난 길’은 ‘꽃이 핀 길’을 뜻한다. 2013년 여름 서울에서 제주도로 이주해 ‘다시방’이란 공방 겸 카페를 차린 젊은 예술가 남현경(다시방 대표), 이듬해 합류한 이현정(37·다시방 실장)씨의 기획으로 조성됐다.

먼저 제주에 터를 잡은 건 남씨였다. “정신없이 바쁜데 행복하지는 않았던”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제주도에서도 한적한 편인 김녕 바닷가에 작업실을 차렸다. 작업실을 여는 날, 동네 어르신들이 찾아와 금속공예 작품을 보곤 “아이고 예쁘네” 했다. 이젠 나이가 들어 농사도, 물질도 못하고 해변가를 걷는 게 주요 일상인 어르신들에게 예술 작품을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녕리사무소에 사업계획서를 제출해 공원 조성 자금으로 마련된 돈 중 일부를 지원받았다. 2014년 가을, 남씨의 전 직장 동료였던 이씨가 합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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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현경(왼쪽)·이현정씨.


벽화의 주제는 바람·해녀·물고기 등이다. 지역의 특성과 주민들의 이야기를 담아내자는 원칙에 따라서다. 소셜미디어 공지를 보고 찾아온 금속공예가·애니메이션 감독 등 13명의 아티스트도 힘을 보탰다.

설치 중에는 주민들과 부딪히기도 했다. 못 하나 박을 때도 길일(吉日)을 따지는 제주에서 아무것도 모르는 ‘육지것’들이 쿵쾅쿵쾅 설치는 걸 좋지 않게 보는 시선도 있었다. “원색의 화려한 벽화를 기대했는데 회색·갈색 위주의 금속 작품이라 우중충하다”며 “우리 집 벽에서 떼어달라”고 요구하는 주민도 있었다.

하지만 김녕이 ‘한국 유일 금속공예 벽화마을’로 알려지면서 분위기가 바뀌었다. 남씨는 “마을 방문자가 세 배 가량 늘었다고 한다. 관광객들이 오면 자진해서 안내에 나서는 주민도 많다”고 했다.

두 사람은 더 큰 꿈을 꾸고 있다. 올여름에는 마을 안쪽 산책로를 따라 작품을 설치하는 2차 작업을 시작한다. ‘다시방’에서 만든 금속공예 소품을 인터넷 등으로 판매해 수익금 일부를 마을 발전에 사용할 계획도 세웠다. “서울에 있을 땐 몰랐던 일이죠. 벽화 작업을 하며 내가 가진 재능을 누군가와 나누는 기쁨을 알게 된 것 같아요.”(남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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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금숙 작가가 위안부 할머니의 증언을 토대로 작업 중인 신작 ‘제3의 목소리’ 이미지 앞에서 포즈를 취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요즘 ‘만화’라고 하면 사람들이 가벼운 웹툰만 떠올려요. 하지만 저는 함께 고민할 수 있는 만화를 그리고 싶습니다.”

지난 26일 베트남에서 귀국한 김금숙(45) 작가가 힘주어 말했다. 그는 베트남전쟁 당시 벌어진 민간인 학살을 취재하기 위해 베트남에 다녀왔다. 5박6일 동안 현장을 답사하고 생존자를 만나 당시 상황을 들었다. 취재 결과물은 모두 새 작품을 위한 자료로 쓰일 예정이다.

김 작가의 만화는 유쾌하지 않다. 그의 작품 대부분은 사회문제를 다루며 출판만화를 고수한다. 대표작은 위안부 할머니의 삶을 다룬 ‘비밀’이다. 이 밖에 제주 4·3사건을 다룬 ‘지슬’, 이산가족의 아픔을 그린 ‘내 산에 오르기’, 한국 현대사의 맨 얼굴을 바라본 ‘아버지의 노래’ 등을 냈다.

무거운 주제를 만화로 보는 느낌은 색다르다. 네모난 컷 안에는 거친 폭력과 야만 대신 정제된 슬픔이 응축돼 있다. 여과된 비극은 작가의 메시지를 더욱 부각시킨다. “폭력적인 사건을 전달한다고 해서 똑같이 폭력을 묘사하는 건 좋은 전달방법이 아니에요. 작가가 비극을 한 번 소화한 다음 만화적인 상상력으로 여과해 표현하는 게 중요합니다.”

김 작가가 처음부터 만화가를 꿈꿨던 건 아니었다. 1994년 세종대 회화과를 졸업한 뒤 프랑스로 건너가 스트라스부르 고등장식 미술학교에서 조각을 배웠다. 그리고 생계를 해결하기 위해 한국 만화 번역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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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부터 2010년 귀국하기 전까지 이희재의 『간판스타』, 오세영의 『부자의 그림일기』 등 한국 만화 100여 권을 프랑스어로 번역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만화의 매력을 알게 됐고, 뒤늦게 만화에 뛰어들었다.

작가의 주제의식은 분명하다. 비극적 사건은 ‘사회문제’가 아닌 ‘누군가의 일상’이다. “사회문제에 천착하는 게 아니에요. 사람들이 살아가는 이야기를 할 뿐입니다. 우리는 함께 고민해야 하거든요. 이러한 것들을 만화로 표현하면 쉽고 재미있게 전달할 수 있죠.”

그의 작품들은 국내외에서 호평받고 있다. ‘아버지의 노래’는 2012년 프랑스 NMK 만화페스티벌에서 ‘문화계 저널리스트들이 뽑은 언론상’을 받았다. ‘비밀’은 2014년 프랑스에서 열린 앙굴렘 국제만화축제에 소개돼 위안부 할머니들에 대한 국제적 관심을 이끌어 냈으며, ‘지슬’은 지난해 12월 서울시청 본관에서 열린 원화 전시회를 통해 제주 4·3사건에 대한 여론을 환기시켰다.

아직도 김 작가는 하고 싶은 일이 너무 많다. 베트남전쟁 민간인 학살 피해자와 위안부 할머니들, 히로시마 원폭 피해자 등의 삶을 다룬 작품을 준비하고 있다. 그는 “‘굵은 것’을 이야기하는 게 예술가로서 하나의 책임이라고 본다”고 말했다.

이영희 기자 misquick@joongang.co.kr , 정아람 기자 aa@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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