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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 있는 아침] 빈 집

빈 집

-기형도(1960~89)

 
기사 이미지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 집에 갇혔네

기형도는 그 이름만으로도 그 모든 허무와 절망과 고통의 응어리다. 그 망치에 맞은 자가 한 둘이 아니다. 정도의 차이가 있겠지만, 그의 허무와 절망과 고통을 다수의 독자가 공유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이 시는 절망의 세계에 대한 눈물 어린 ‘고별사’이다. 그리하여 안으로 “문을 잠그”는 그는 얼마나 가여운가. “공포”와 “망설임”과 “눈물”로 가득 찬 “내 사랑”은 얼마나 두려운가. 1989년 3월 7일 새벽, 그는 종로의 한 극장에서 숨을 거두었다. 스물아홉 생일을 엿새 앞둔 날이었다고 한다. 잘 가거라, 불운의 시인이여. “흰 종이” 앞에서 더 이상 “공포를” 기다리지 마라.
<오민석·시인·단국대 영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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