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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호의 현문우답] 예수를 만나다 ④ 예수보다 더 강한 나만의 신은 누구?

버스는 광야를 떠나 갈릴리 지역으로 향했다. 창밖에는 척박한 풍경이 펼쳐졌다. 중간 중간 오아시스 마을도 보였다.

예수도 이 길을 걸었을까. 홀로 요르단 강의 물소리를 들으며 터벅터벅 걸었을까. 이 땅을 지나 갈릴리로 갔을까. 아니면 반대편인 서쪽으로 갔을까. 세례 요한의 죽음으로 위협을 느낀 나머지, 유대인들이 꺼리는 사마리아 지역을 통과했을까. 그 길로 고향 나사렛으로 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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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 ‘최후의 만찬’을 그리기 전에 예수의 얼굴을 미리 연습한 파스텔화. 두 눈을 감다시피한 예수의 얼굴에서 어쩐지 외로움이 읽힌다. 브레라 미술관 소장.

예수는 외로웠을 터이다. 누구도 예수의 ‘주인공’을 알지 못했다. 그의 내면에 깃든 ‘신의 속성’을 사람들은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저 나사렛에 사는 요셉의 아들, 목수 일을 하는 청년으로만 여겼다.

세례 요한은 달랐다. 그는 안목이 있었다. 광야에서 예수가 세례를 청했을 때 요한은 “세례를 받아야 할 사람은 당신이 아니라 접니다”(마태복음 3장14절)라고 사양했다.

중국 춘추시대였다. 백아(伯牙)는 거문고의 명수였다. 그의 소리를 알아주는 친구가 종자기(鐘子期)였다. 백아가 거문고로 높은 산과 큰 강을 연주하면 종자기는 여지없이 읽어냈다.

하늘 높이 솟은 게 마치 태산(泰山)같다.”


가락으로 강물을 읊어도 읽어냈다. “넘칠 듯 넘칠 듯이 흘러가는 게 황화(黃河) 같다.” 둘은 통했다. 그러다 종자기가 병으로 먼저 죽었다.

백아는 거문고 줄을 끊었다. 다시는 연주를 하지 않았다. 그게 ‘백아절현(伯牙絶絃)’이다. ‘마음의 소리’를 아는 이, 즉 ‘지음(知音)’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갈릴리로 가던 밤, 예수는 달을 보며 세례 요한을 떠올리지 않았을까. 그의 죽음을 애달파 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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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윤(1545~1611)의 작품 ‘월하탄금도(月下彈琴圖)’. 달밤에 선비가 줄 없는 거문고를 타고 있다. 예수 당대에는 그의 설교를, 그의 노래를, 그의 진가를 진정으로 알아보는 이는 없었다. 예수도 그렇게 ‘줄 없는 거문고’를 타는 심정이었을까. 고려대박물관 소장.

예수에게 세례 요한은 ‘지음(知音)’이었다. 오직 요한만이 예수가 ‘신을 품은 인간’임을 알았다. 예수의 제자들도 몰랐다. 십자가에서 숨을 거둘 때도 제자들은 몰랐다. 예수가 진정 누구인지. 그의 내면에 무엇이 깃들어 있는지. 그러니 예수는 외롭지 않았을까. 자신의 가락을 알아주던 세례 요한이 죽었으니 말이다.

기록에는 없지만 세례 요한은 예수에게 숱한 질문을 퍼붓지 않았을까. ‘하느님 나라’에 대해서, ‘신의 속성’에 대해서 온갖 물음을 던지지 않았을까. 예수는 또 반가운 마음으로 일일이 일러주지 않았을까. 마치 백아와 종자기가 ‘마음의 소리’를 주고 받았듯이.

그런데 예수는 달랐다. 거문고의 줄을 끊지 않았다. 갈릴리로 가서 오히려 더 많은 가락을 연주했다. 자신의 내면에 깃든 ‘하느님 나라’를 풀어서 메시지로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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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의 작품 ‘그리스도의 세례’일부. 세례 요한은 예수의 주인공을 아는 유일한 인물이었다. 런던 내셔널갤러리 소장.

뭔가 이상했다. 차창 밖 사막 특유의 건조한 풍광이 변하기 시작했다. “뭐가 달라진 거지?” 버스가 북쪽으로 달릴수록 초록의 점들이 하나씩 둘씩 더 보였다. 나무도, 풀도, 꽃도 조금씩 더 보였다.

이스라엘은 광야와 따가운 햇볕만 있는 줄 알았다. 그런데 위로 갈수록 나무도, 꽃도 푸르게 살아났다. “아, 이 땅에도 생기가 도는구나!”

갈릴리 지역에 들어섰을 때는 두 눈을 비벼야 했다. 믿기지 않았다. 거기는 푸르디푸른 ‘제주도’였다. 커다란 호수, 풀이 무성한 언덕, 울창한 나무들. 정말 가슴 밑바닥까지 초록이 밀려왔다.

버스에서 내렸다. 바람이 상쾌했다. 성서에서 숱하게 들은 이름, 갈릴리 호수. 나는 입이 쩍 벌어졌다. 갈릴리 호수가 그렇게 큰 줄 몰랐다. 육안으로 보기에는 호수보다 바다에 훨씬 더 가까웠다.

영어 이름도 ‘Sea of Galilee’(갈릴리 바다)다. 동서 폭이 14㎞, 남북의 길이는 무려 21㎞다. 넓이는 170㎢. 호수 둘레를 한 바퀴 도는 건 63㎞. 그만큼 컸다.

그제야 이해가 갔다. 왜 북쪽으로 올라올수록 초록이 더 많아졌는지 말이다. 갈릴리 호수에서 우러나는 생명의 기운 때문이었다. 요르단 강의 수량(水量)도 호수에 가까워질수록 더 풍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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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릴리 호수는 바다라는 느낌이 들 만큼 컸다. 호수를 한 바퀴 도는 거리가 63㎞다.

갈릴리 호수 일대에는 작은 마을들이 있었다. 조그만 회당도 있었다. 유대인이 안식일에 모여 신앙 활동을 하는 곳이다. 구약에서 하느님은 천지를 창조하고 마지막 7일째 쉬었다고 한다. 일·월·화·수·목·금 그리고 토요일이다. 유대교에선 마지막 7일째가 토요일이다. 그래서 안식일도 토요일이다.

예수는 유대인이었다. 그는 토요일에 회당을 찾았다. 유대인들이 그곳에 모이기 때문이다. 예수는 설교를 했다. 주제는 ‘하느님 나라’였다. 예수는 자기 내면에 흐르는 ‘신의 속성’을 풀었다. 나와 세상과 우주가 어떻게 숨을 쉬고, 어떻게 맞물려서, 어떻게 돌아가는지. 그 이치를 설했다. ‘하느님 나라’가 무엇이고, 그걸 품으려면 어찌해야 하는지 아주 쉬운 말로 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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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가 설교했던 나사렛의 유대 회당. 작은 목소리로 말해도 강당처럼 소리가 크게 울렸다.

예수의 설교는 명쾌했다. 막힘이 없었다. 사람들의 가슴은 시원하게 뻥 뚫렸다. 성서에는 ‘사람들은 그분의 가르침에 몹시 놀랐다. 율법학자들과 달리 그분의 가르침에는 권위가 있었다’(마가복음 1장22절)고 기록돼 있다.

‘권위’라는 게 어떤 걸까. 그건 어떨 때 생겨나는 걸까. 마음으로 끄덕이는 ‘권위’는 쉽사리 생기지 않는다. 가르침이 이치의 심장을 관통할 때 비로소 ‘권위’가 생겨나는 법이다.

호숫가를 걸었다. 예수의 고향은 갈릴리에서 멀지 않다. 나사렛에서 자란 예수도 종종 이곳을 찾았을 터이다.

‘이 커다란 호수와 푸른 나무들, 갈대가 가득한 언덕, 바람과 함께 철썩대는 파도. 그 모두가 예수에게 말을 걸었겠지. 어린 예수, 청년 예수, 장년 예수는 모두 갈릴리의 추억을 가지고 있었겠지. 이곳에서 자연의 숨결을 익혔겠지. 그 안에 깃든 신의 숨결도 보았겠지.’

갈릴리의 풍성한 물과 푸른 나무는 예수에게 또 하나의 고향이 아니었을까.

정겨운 일화가 성서에 한 토막 있다. 예수가 고향 나사렛에 머물 때였다. 그날도 예수는 회당에서 가르침을 펴고 있었다. 그때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의 동생들이 찾아왔다. 그들은 회당 밖에서 사람을 보내 예수를 불렀다.(마가복음 3장31절)

나는 눈을 감고 그 광경을 그려본다. 혹시 그때가 저녁 무렵은 아니었을까. 성서에 기록된 게 ‘응답하라 1988’의 한 장면은 아니었을까. “예수아! 밥이 다 됐어. 집에 와서 식사해!” 그런 전갈은 아니었을까. ‘예수(Jesus)’의 이름은 아람어로 ‘예수아(Yeshua)’다. 이런 광경을 그려보면 왠지 가슴이 따듯해진다. 예수가 우리가 사는 동네 골목에서도 마주칠 수 있는 ‘친근한 누군가’로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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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베르 캉팽의 1430년 작 ‘난로 가리개 앞에 있는 성모자’. 런던 내셔널갤러리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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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라치오 젠틸레스키의 1628년 작 ‘이집트 피신 중 휴식’. 마리아가 아기 예수에게 젖을 물리고 있다. 마리아는 ‘신의 어머니’란 이유로 오랫동안 거룩한 모습만 그려졌다. 나중에 신을 품은 인간 예수의 면모가 부각되면서 마리아도 인간적인 모습으로 묘사됐다. 파리 루브르박물관 소장.

전갈은 예수에게 갔다.

“선생님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밖에서 찾고 있습니다”(마가복음 3장32절). 예수는 사람들에게 되물었다. “누가 내 어머니이고, 누가 내 형제라고 생각하는가?” 사람들은 멀뚱멀뚱한 눈으로 예수를 쳐다봤을 터이다. 예수는 자신을 빙 둘러싼 좌중을 둘러보며 말했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다.”(마가복음 3장35절)


예수의 답은 파격이었다. 그건 하느님 나라의 문을 열고, 그 속성을 공유하는 이의 답이었다. 갈릴리 호숫가에 섰다.

예수의 ‘물음’이 가슴에 꽂혔다. “누가 나의 어머니고, 누가 나의 형제인가.” 예수의 ‘답’도 가슴에 꽂혔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이들이 내 형제다.”

왜 그리 묻고, 왜 그리 답했을까. 예수의 눈에는 왜 그렇게 보였을까. 신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누구일까. 그들은 신의 뜻에 순종하는 사람이다. 나는‘순종’이라는 말을 안고 눈을 감았다.

‘하느님 뜻에 순종하는 사람’. 무슨 뜻일까. 주일을 지키고, 십일조를 하고, 교회에서 봉사활동을 하는 게 순종일까. 아니면 집사가 되고, 권사가 되고, 장로가 되는 게 순종일까. 그도 아니면 신학교를 나와서 사제가 되고, 수녀가 되고, 목회자가 되는 게 순종일까.

대체 예수가 말한 ‘순종’은 무엇일까. 답은 멀리 있지 않다. 문제 속에 답이 있다. 답과 문제는 한 몸이니까. 그럼 ‘순종하는 사람’ 대신 ‘순종하지 않는 사람’을 먼저 찾으면 된다.

하느님 뜻에 순종하지 않는 사람. 그들은 누구일까. 우리는 착각한다. 나와 종교가 다르고, 나와 교단이 다른 사람들이라 본다. 과연 그럴까.

모세가 받은 십계명 중 하나는 ‘우상을 섬기지 마라’다. 흔히 불상에 절을 하거나, 금으로 만든 송아지 따위를 모시는 걸 우상이라 여긴다. 십계명에 담긴 의미는 그리 간단치 않다. ‘하느님 뜻’에 순종하지 않는 사람들은 어디에 순종할까. 하느님 뜻보다 더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절대자 위의 파워’는 대체 뭘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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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콜라 푸생의 17세기 작품 ‘금송아지 숭배’. 모세가 시나이 산으로 간 사이에 이스라엘 백성은 금송아지를 만들어 우상숭배를 했다. 광야에서 자신들을 이끌어 줄 신으로 섬겼다. 런던 내셔널갤러리 소장.

우리는 신을 섬긴다는 명분으로 수시로 ‘나’를 섬긴다. 나의 기대, 나의 성공, 나의 욕망이 성취되게끔 하느님이 일하기를 바란다. 내가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게 아니라, 하느님이 ‘나의 뜻’을 따르기를 바란다. 그걸 위해 기도까지 한다. “~하게 해주십시오!” “제발 ~가 되게 해주세요!” 그러니 누가 누구를 섬기는 걸까. 내가 하느님을 섬기는 걸까, 아니면 하느님이 나를 섬기는 걸까.

십계명에서 경고한 ‘우상’은 멀리 있지 않다. 아주 가까이 있다. 하느님보다 더 강력하게, 더 열정적으로 섬기는 ‘나만의 신’. 그게 대체 누구일까.

그렇다. 그게 바로 ‘나’다. 하느님 뜻에 순종하지 않는 이들도 ‘나의 뜻’에는 순종한다. 그러니 법당에 앉아 있는 불상이 우상이 아니다. 내가 바로 우상이다. 신의 뜻을 가리는 ‘나의 뜻’이야말로 진정한 우상이다. 그래서 예수는 아람어로 “타브(tab)!”라고 했다. 그리스어로 “메타노이아(metanoia)!”다. ‘마음의 눈을 돌리라’는 뜻이다. ‘나의 눈’에서 ‘신의 눈’으로 돌리라고 했다.

그리스 아테네에 간 적이 있다. 30년째 거기서 사는 한국 여성을 만났다. 남편은 그리스 사람이었다. 그녀는 그리스 정교회에 다니고 있었다. 궁금해서 물었다. “이곳 사람들의 신앙은 다른 점이 있나?”

그녀는 며칠 전 참석한 교회 장례식 이야기를 했다. “평소 잘 알던 이웃이 자식을 잃었다. 교통사고였다. 우리 같으면 하느님께 따지지 않겠나. 울고불고 매달리지 않겠나. 왜 내 자식을 데려가시냐고. 다시 살려 달라고. 그런데 여기는 다르다. 받아들이는 방식이 놀랍도록 차분하다. 이들은 기본적으로 ‘우리가 모르는 하느님의 뜻이 뭔가’를 묻는다. 자식의 죽음 앞에서도 말이다. 이곳에 산 지 30년이 됐지만 나는 지금도 놀랍다.”

전통이다. ‘나의 뜻’을 관철시키는 게 아니라 ‘신의 뜻’을 묻는 그리스도교의 고귀한 전통이다. 그 전통의 출발점은 예수다. 그런데 왜 뒤바뀌었을까. 우리는 왜 ‘나의 뜻’이 이루어질 때만 ‘신의 뜻’이 성취됐다고 여기는 걸까. 축구 경기를 할 때도 내가 골을 넣을 때만 하늘을 향해 기도를 하는 걸까. 왜 내가 골을 먹을 때는 하늘을 향해 기도를 하지 않는 걸까. 감사의 기도는 내 마음대로 될 때만 올리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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렘브란트의 1659년작 ‘십계명 돌판을 집어던지는 모세’. 사람들이 우상숭배 하는 걸 본 모세는 십계명이 새겨진 석판을 집어던졌다. 베를린미술관 소장.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십계명 중 하나다. 사람들은 이걸 두고 ‘이기적이고 배타적인 계명’이라고 말한다. 이 구절로 인해 역사 속의 그리스도교는 다른 종교를 공격하고 배척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게 다일까. 십계명의 뜻은 여기서 그치는 걸까. 호수에 파도가 일었다. 갈릴리의 바람과 함께 나는 눈을 감았다.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마라.’ 여기에는 더 깊은 이유가 있지 않을까.

인도의 붓다는 태어나자마자 일곱 걸음을 걸었다고 한다. 물론 사실이 아니다. 어떻게 갓 태어난 아기가 일곱 걸음을 걸을 수 있을까. 그런데 이 일화에 담긴 메시지는 진실이다.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건 이적을 일으켰느냐는 사실 여부가 아니다. 그 일화에 담겨 있는 이치(메시지)의 진실성이다. 그런 이치가 우리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자유롭게 한다.

아기 붓다는 한 손으로 하늘을 가리키며 말했다. “천상천하 유아독존! (天上天下 唯我獨尊)”. 이 우주에 오직 나만이 존귀하다. 사람들은 말한다. “너무 오만한 것 아닌가. 자신만이 최고라니. 그건 너무 배타적인 것 아닌가.” 왜 ‘유아독존’일까. 왜 붓다만이 존귀하다고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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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가 태어나자마자 일곱 걸음을 걷고 있다. 뒤에는 어머니 마야 부인이 서있다. 이 일화는 ‘붓다의 주인공이 누구인가’를 되묻고 있다.

죽도록 보수를 따지고, 죽도록 진보를 따지는 이들은 안목이 좁다. 눈이 프레임에 갇혀 있기 때문이다. 꿰뚫어 알맹이를 보는 이들은 다르다. 보수와 진보를 자유롭게 넘나들며 ‘무엇이 우리 모두를 위한 최선인가?’에 방점을 찍는다.

진보와 보수는 일종의 방편이다. 세상을 바라보는 어느 한쪽의 시각일 뿐이다. 그래서 전체를 담지는 못한다. 진보가 진보를 놓고, 보수가 보수를 놓을 때 비로소 우리는 자유로워진다. 틀에 갇히지 않고 오가게 된다. 그때는 알게 된다. 둘의 바탕이 실은 하나임을 말이다. 그걸 꿰뚫는 이들의 눈은 남다르다. 넓고도 깊다.

예수도 그랬다. 예수의 눈은 무한히 넓고, 무한히 깊었다. 왜 그럴까. 예수의 주인공은 껍데기로 보이는 나사렛의 목수가 아니었다. 그 안에 깃든 ‘신의 속성’이었다. 하느님이 인간을 지을 때 속을 채웠다는 ‘신의 속성’말이다. 그게 ‘아담의 아들’이라 자처한 예수의 주인공이다. 예수는 그걸 회복하라고 했다. 그걸 위해 하느님께 순종하라고 했다. 나의 고집이 하나씩 둘씩 모두 무너지면 결국 무엇이 남을까. 그렇다. 신의 속성만 남는다. 하느님의 속성만 남는다. 거기가 ‘하느님 나라’다. 그 나라가 과거와 현재, 미래를 뛰어넘어 이 우주에 가득하다. 오직 그것만 있다.

그래서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고 했다. 섬기려야 섬길 수가 없기 때문이다. 오직 그것만 있으니까. 그걸 붓다는 ‘유아독존(唯我獨尊)’이라고 표현했다. 오직 그것만이 존귀하니까. 그러니 십계명의 구절도, 붓다의 말도 배타적이 아니다. 오히려 통합적이다. 둘로 쪼개는 게 아니라 하나로 모은다.

그 눈으로 예수는 물었고, 그 눈으로 예수는 답했다. “누가 나의 어머니고, 누가 나의 형제인가. 이들이 내 어머니고, 이들이 내 형제다.”

겉모습은 분명 둘이다. 너와 나가 다르고, 남자와 여자가 다르고, 보수와 진보가 다르다. 그러나 바탕은 둘이 아니다. 각자의 에고가 무너지면 ‘신의 속성’이 드러난다. 거기서 하나가 된다. 신을 품은 예수의 눈에는 모두가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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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릴리 호숫가에는 군데군데 마을이 있다. 저녁 무렵이 되면 산 아래와 중턱의 마을에 불이 켜진다.

갈릴리 호수에 노을이 붉게 내렸다. 하나ㆍ둘ㆍ셋…. 멀리 산 중턱 마을에 불이 켜졌다. 바람이 차가웠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숙소를 향해 발을 뗐다.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그런데도 우리는 한 눈을 판다. 자꾸만 ‘다른 신’을 섬긴다. 그 신의 이름은 바로 '나'다. 나의 고집, 나의 집착, 나의 욕망을 버무려 자꾸만 ‘나’라는 신을 일으켜 세운다. 그리고 그 신을 숭배한다. 그게 나의 눈이다. 호수의 수면 위로 메아리가 울린다. 가슴을 때리며 쿵쿵 울린다. 하늘이 묻는다.

나 외에 다른 신이 누구인가. 나 외에 다른 신이 누구인가.”


[5회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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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호 기자 vangogh@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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