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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일의 事思史] 근대를 말하다 : 요약 ⑥



일제는 대한제국 강점 후 한국사·한국어·한국지리에 관한 지식을 위험하게 보았다. 『조선총독부관보(官報:1910년 11월 19일)』나 『경찰월보(月報:1910년)』 등에는 총독부에서 판매를 금지시키거나 압수한 서적의 목록이 나오는데, 『초등 대한역사(大韓歷史)』, 『대동역사략(大東歷史略)』 같은 역사서와 『국문과본(國文課本)』 같은 국어 관련 서적이 들어있다.『대한신지지(大韓新地誌)』, 『최신대한신지지(最新大韓新地誌)』 같은 지리서들도 금서였다. 한국인들이 한국사·한국어·한국지리에 대한 지식을 갖고 있으면 식민통치가 어렵다고 판단하고 교육시스템을 철저하게 장악하려 했다.


일제는 1906년 조선통감부를 설치한 후 사립학교 장악에 나섰다. 1908년 8월 통감 이토 히로부미는 학부대신 이재곤(李載崑)에게 칙령 제62호로 ‘사립학교령(私立學校令)’을 반포하게 했다. ‘사립학교령’의 대표적인 독소조항은 제2조 학교의 재산에 관한 부분으로서 그 3항은 ‘학교 부지와 학교 교사(校舍)의 평면도’였고, 5항이 “기본 재산과 기부금에 대하여 증빙서류를 첨부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큰 자본이 없는 사람은 학교를 설립할 수 없게 만든 것이다. 또한 일제는 설립자, 학교장 및 교원의 이력서를 제출하게 해서 반일 성향 인사들을 교육에서 배제시켰다. 더 큰 문제는 “기존에 설립된 사립학교도 모두 ‘사립학교령’ 시행일로부터 9개월 내에 본령 규정에 준해서 학부대신의 인가를 받아야 한다”는 제17조의 재심사 규정이었다. 서양 선교사들이 신청한 종교 사학 778개 교(校)는 모두 인가되었지만 한국인들이 신청한 1217개 교 가운데 42개 교만 인가하고 1175개 교를 불인가하거나 퇴출시켰다.


이토 히로부미는 1908년 12월 통감관저에서 열린 이듬해의 예산심의회에서 각 도에 1개씩 간이 실업학교를 설립하자는 학무대신 이재곤의 청에 “한국의 실업이 과연 실업학교 졸업생을 필요로 할 정도로 발전했는가?”라고 반대했다고 전한다. 실업학교를 통해 한국인 사업가가 배출될 것을 꺼린 것이다.


대한제국 학부(學部)는 사라지고 조선총독부 산하 총무부·내무부·탁지부·농공상부·사법부의 5부 중에 내무부 소속의 일개 학무국(學務局)으로 격하되었다. 내무부 학무국 산하의 2개 과가 전체 교육사항을 관장했다. 학무국의 핵심인 학무과장은 동경제대 사학과 출신의 구마모토 이케루요시였다. 그는 강제 병합 직후인 1910년 9월 8일 총 12장으로 구성된 ‘교화의견서(敎化意見書)’를 비밀문서로 총독부에 제출했다. 여기에서 그는 조선인을 일본인으로 동화시키는 것은 어렵기 때문에 순량화(順良化)시켜야 한다면서 ‘철두철미하게 조선은 일본 민족의 발전을 위한 식민지로서 경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국을 강점한 이듬해인 1911년 8월 23일 조선총독부는 ‘조선교육령(朝鮮敎育令)’을 반포하는데 제2조가 “교육에 관한 칙어의 취지에 기초한 충량(忠良)한 신민을 육성하는 것을 본의(本意)로 한다”는 것이었다. 대일본제국에 충성하는 양순[忠良]한 신민을 기르는 것이 교육 목적이 되었다. 1911년 10월 20일에는 조선총독부령 제114호로 ‘사립학교 규칙(私立學校規則)’이 반포되면서 사학에 대한 통제가 더욱 강화되었다.


나라가 근대화되면 사학이 늘어나지만 일제 때는 거꾸로였다. 조선총독부에서 간행한 『조선의 보호 및 병합(朝鮮の保護及倂合)』은 ‘1908년 경성 시내에 약 100여 개의 사립학교가 있었으며, 전국적으로는 5000여 개, 20만여 명의 학생들이 있었다’면서 “서당의 수는 만(萬)으로 헤아린다”고 덧붙이고 있다. 사립학교 수는 ‘사립학교령’ 반포 이후인 1910년 5월에 1973개 교로 줄었고, 1914년 5월에는 다시 1244개 교로 줄어들었다가, 1915년 5월에는 1154개 교로 다시 줄어들었다.


일제 관학교육에 불만을 가진 사람들은 서당으로 몰렸다. 조선총독부 통계연보(1917)에 따르면 1911년의 서당 수는 1만6540개에 학생 수는 14만1604명이었는데, 1917년에는 2만4294개에 학생 수가 26만4835명으로 늘었다. 서당 재학생의 숫자를 세밀하게 파악할 정도로 일제는 서당 교육도 위험시했고 드디어 1918년 서당규칙(書堂規則)을 반포해 서당도 통제했다. 한국인들에 대한 교육 자체를 위험하게 본 것이 일제의 식민지 교육철학이었다.


- 이덕일, 「事思史 근대를 말하다」, 제238호 2011년 10월 2일, 제240호 2011년 10월 16일, 제242호 2011년 10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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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