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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일의 事思史] 근대를 말하다 : 요약 ⑤



일제 식민통치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것이 헌병 경찰제도였다. 일제는 대한제국 강점 직전 경찰권부터 빼앗았다. 통감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는 강제 병합 두 달 전 총리대신 서리(署理) 겸 내부대신 박제순(朴齊純)과 한·일 약정각서(韓日約定覺書)를 체결했다. 제1조는 “한국의 경찰제도가 완비되었다고 인정될 때까지 한국 정부는 경찰사무를 일본국 정부에 위탁한다”는 것이었다. 1910년 9월 29일 반포한 조선총독부 관제(官制) 제2조는 “조선총독은 육·해군 대장으로 충임(充任)한다”라고 규정해 조선총독은 군인만이 임명될 수 있었다. 그 3조는 “총독은 일본 천황에 직례(直隷: 직속)하며 위임의 범위 내에서 육·해군을 통솔하며 조선 방비의 사무를 관장한다”고 규정했다. 총독이 군사지휘권까지 갖게 된 것인데, 여기에서 말하는 ‘조선 방비의 사무’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독립 운동가들로부터 식민지를 방비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일제는 헌병에게 경찰 업무까지 부여하는 헌병경찰 제도를 창안한 것이다. 일본인 헌병분대장이 겸임하는 경찰서장은 재판을 거치지 않고 즉결 처벌을 할 수 있었다. 특히 태형은 한국인에게만 적용됐다. 2년 후에 발발하는 3·1운동은 이런 공포통치에 대한 전 민족적 저항이었다. 일본 자본주의는 식민지가 필요할 만큼 발전하지 못했으며 군사력만 비대한 기형 구조였다. 그러니 결국 군사력으로 식민지의 토지를 빼앗는 원시적 자본 축적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일본은 1904년 5월 각의(閣議)에서 대한제국을 식민지로 편입시키기 위한 대한방침(對韓方針)과 대한시설강령(對韓施設綱領)을 결정했다. 일본인들의 토지 소유권 확보가 주요한 내용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대한제국 정부는 외국인에게 토지를 파는 문제만큼은 강경하게 대응했기 때문에 이는 쉽지 않았다. 이런 상황이 바뀌기 시작한 것은 조선통감부를 설치하면서부터였다. 통감부는 토지 소유 확대에 본격적으로 나섰다. 1906년 11월 토지가옥증명규칙(土地家屋證明規則)을 반포해 일본인들의 토지 소유를 합법화한 것이 이를 말해준다. 토지가옥증명규칙과 쌍둥이 법이 그해 12월 반포된 토지가옥 전당집행규칙(土地家屋典當執行規則)이었다. 일본인들이 고리대로 빚을 놓아 제때 갚지 못하면 전당 잡은 가옥이나 토지를 빼앗을 수 있게 한 법이었다. 이 두 법에 의해 일본인들의 토지 소유는 급격하게 확대됐다. 또한 통감부는 1907년 7월 ‘국유미간지(國有未墾地) 이용법’을 발포했다. 개간이란 명목 아래 일본인들이 국유지를 차지할 수 있게 한 법이었다. 1908년 3월 일본 의회에서 특별법으로 ‘동양척식주식회사법’을 공포하고 동양척식회사를 설립했다. 동양척식회사는 회사란 이름을 가장한 조선총독부의 공식 수탈기관이었다. 일본은 본국의 자본을 식민지에 투자하거나 생산품의 독점적 시장으로서 식민지가 아니라 낙후된 일본의 내지(內地) 개발이 더 시급한 상황이었다. 식민지에 투자할 자본이 없으니 ‘자본 없는 자본 형성’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 이는 토지나 산림·광산·어장 같은 원시적 자본을 빼앗는 자본 축적 형태를 뜻한다. 일제는 강점 1년6개월 전인 1909년 2월 일본흥업은행으로부터 1000만 엔을 토지 조사 비용으로 승인받고, 이듬해 1월에 ‘토지조사사업계획’을 수립했다. 그해 3월에는 토지조사국 관제를 공포하고 강점 일주일 전인 8월 23일 ‘토지조사법’을 공포했다. 실제 목적은 황실 및 국유 토지를 빼앗아 조선총독부 소유로 만들고, 지세(地稅)를 늘려 조선 통치자금으로 삼는 데 있었다. 토지 조사 사업의 가장 큰 문제는 수조권(收租權)을 무시한 데 있었다. 그래서 상당수 사유지가 국유지로 돌변해 조선총독부 소유가 됐다. 신고제를 채택한 것도 제도의 맹점을 이용해 토지를 가로채려는 간계였다. 토지조사 사업이 끝난 이듬해 전 민족적인 3·1운동이 일어났던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일제의 폭력적인 토지 수탈 사업에 대한 전 민족적 반감이 팽배했고, 이것은 3·1운동에 일반 민중이 대거 참가하는 중요한 원동력이 됐다. 1910년 반포된 회사령은 기업 설립과 활동을 독려하는 것이 아니라 억제하는 희한한 법령이었다. 이는 민족자본 형성을 불가능하게 만들고 일본 기업, 일본 자본이 식민지를 지배하게 하려는 전략이었다. ‘회사령’은 일본의 통치가 전 국민적 반감을 사는 한 요소가 됐고, 3·1운동에 민족 개량주의자들까지 대거 참가하는 중요한 요인이 됐다. 회사령은 3·1운동 1년 후인 1920년 4월 1일 폐지됐다. 폭압 통치에 대한 전 민족적 항거에 놀라 마지못해 허가제를 신고제로 바꿨지만 민족자본 형성을 억제하려는 기본자세까지 바뀐 것이 아님은 물론이다. 요약=김취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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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연구원 전력발전연구부ㆍ군비통제센터를 거쳐 1994년 중앙일보에 입사한 국내 첫 군사전문기자다. 국방부를 출입한 뒤 최장수 국방부 대변인(2010~2016년)으로 활동했다. 현재는 군사안보전문기자 겸 논설위원으로 한반도 군사와 안보문제를 깊게 파헤치는 글을 쓰고 있다.

박용한 연구위원 : park.yonghan@joongang.co.kr (02-751-5516)
‘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