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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요인 암살과 식민기관 파괴 주도한 의열단


[총평]


경술국치(1910년 8월 29일) 전후 국내 민족운동에 대한 일제의 탄압이 더욱 심해진다. 이에 많은 애국 계몽운동가가 국외로 이동했다. 1910년 12월 이회영 일가는 가산을 정리해 만주로 망명했다. 이들이 마련한 자금을 기반으로 만주에 신한민촌, 경학사, 신흥강습소를 세웠다. 신흥강습소는 신흥무관학교로 발전해 독립군 사관 양성 기관이 됐다.


1910년대 간도와 연해주의 한인들은 자치단체를 조직하고 독립군을 양성하는 등 무장 독립전쟁 준비를 했다. 1911년 연해주 지역에 한인 집단촌인 신한촌이 건설되고, 한인들의 자치단체인 권업회가 조직됐다. 권업회는 효과적인 독립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이상설, 이동휘를 정·부통령으로 하는 대한광복군 정부를 조직해 군사활동을 준비했다(1914). 그러나 일제와의 관계 악화를 꺼린 러시아가 한국인의 무장활동을 금지해 본격적인 군사활동을 펼치지 못했다.


1910년대 만주에 건설된 독립운동 기지를 기반으로 1920년대에 무장 독립전쟁이 활발하게 전개됐다. 3?1운동 이후 무력 투쟁이 광복의 지름길이라는 인식이 확산됐다. 만주 일대에서는 서로군정서, 북로군정서, 대한독립군, 광복군 총영 등 50여 개의 크고 작은 독립군 부대들이 조직됐다. 독립군은 수시로 압록강과 두만강을 건너 일본 군대와 경찰, 식민통치 기관을 습격했다.


국외 무장투쟁의 대표적인 예로 ‘봉오동전투’와 ‘청산리대첩’이 있다. 1920년 홍범도의 대한독립군은 일본군 추격을 미리 간파하고 일본군이 독립군을 공격해 오자 안무(安武)의 대한국민회군, 최진동(崔振東)의 군무도독부와 연합해 봉오동에서 일본군을 급습, 157명을 사살하는 등 큰 전과를 올렸다(봉오동전투). 일본군은 1920년 8월 훈춘 사건을 조작해 독립군을 압박했다. 김좌진이 이끄는 독립군 연합 부대는 추격해 온 일본군과 6일간에 걸친 10여 회의 전투를 치른 끝에 일본군 1200여 명을 사살하는 큰 전과를 올렸다(청산리대첩). 청산리대첩은 봉오동전투와 함께 무장투쟁의 필요성을 각성시킨 계기가 됐다. 또한 독립군 부대의 통합을 통한 대규모의 장기적인 독립투쟁이 시도됐다는 것은 역사적으로 큰 의미가 있다. 봉오동전투와 청산리대첩에서 대패한 일본군은 독립군의 근거지를 없앤다는 명분으로 간도의 한인 마을에 들어가 한국인을 학살하고 민가와 학교, 교회 등을 불태우는 만행을 저질렀다(간도 참변).


1919년 만주에서는 김원봉 등의 주도로 의열단이 결성됐다. 신채호가 작성한 ‘조선혁명선언’에는 폭력투쟁을 통한 민중 직접 혁명을 추구하는 의열단의 기본 정신이 나타나 있다. 의열단은 1920년 후반부터 개인 폭력투쟁에 대한 한계를 느끼고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중국 정부의 도움으로 의열단원을 황푸군관학교(黃?軍官學校)에 입학시켜 체계적인 군사훈련을 받도록 하는 한편, 1930년대에는 조선혁명간부학교(朝鮮革命幹部學校)를 설립하고 군사훈련을 해 조직적인 항일 무장투쟁을 실시했다.


1921년 대한독립군단은 독립운동을 지원하겠다는 러시아 적군의 약속을 믿고 러시아의 자유시로 옮겼다. 이때 독립군의 지휘권을 둘러싼 분쟁이 일어난다. 러시아 적군과 독립군 일부가 독립군의 무장해제를 요구했는데, 이에 불응하자 독립군을 공격해 큰 피해를 입혔다(자유시 참변). 간도 참변과 자유시 참변으로 흩어진 독립군은 지속적인 항일투쟁을 위해 통합을 추진했다. 남만주에서는 서로군정서와 대한독립단 등이 통합해 대한통군부를 조직했는데, 이후 대한통의부로 개편됐다. 대한통의부가 이념과 노선의 대립으로 참의부·정의부로 분리되고, 대한독립군단이 신민부를 창립함으로써 3부가 성립됐다. 3부는 동포들이 내는 세금으로 조직과 군대를 운영한 일종의 공화주의 자치정부였다.


총평=김취정(고려대 강사·문학박사)



[핵심 키워드]


1911년 연해주 지역에 한인 집단촌인 신한촌이 건설되고 자치단체인 권업회가 조직되었다. 3·1운동 이후 만주 일대에서는 서로군정서, 북로군정서, 대한독립군, 광복군총영 등 50여 개의 크고 작은 독립군 부대들이 조직되었다.


봉오동전투는 홍범도의 대한독립군, 최진동의 군무도독부군, 안무의 국민회군 등이 연합해 봉오동에서 일본군 157명을 사살하는 큰 전과를 올렸다. 이에 일본군은 1920년 8월 훈춘사건을 조작해 독립군을 압박했다. 김좌진이 이끄는 독립군 연합 부대는 추격해 온 일본군 1200여 명을 사살하는 큰 전과를 올렸다(청산리대첩).


간도 참변과 자유시 참변으로 흩어진 독립군은 지속적인 항일 투쟁을 위해 통합을 추진했다. 남만주에서는 대한통군부를 조직했고, 이후 대한통의부로 개편됐다. 대한통의부가 이념과 노선의 대립으로 참의부·정의부로 분리되고, 대한독립군단이 신민부를 창립함으로써 3부가 성립됐다. 3부는 행정·입법·사법 조직을 구성하고, 동포들이 내는 세금으로 조직과 군대를 운영한 일종의 공화주의 자치정부였다.


1919년 11월 만주에서 김원봉을 중심으로 결성된 의열단의 기본 정신은 폭력투쟁을 통한 민중 직업 혁명 추구에 있었다(신채호의 조선혁명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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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