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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일의 事思史] 근대를 말하다 : 요약 ①


러·일전쟁의 전운이 감돌자 대한제국은 1904년 1월 23일 국외중립을 선언했고, 각국으로부터 중립국임을 인정받으려 노력했다. 한국은승전국의 전리품이 될 운명이었다. 이런 성격의 국제전에 국외중립선언은 허망한 몸짓에 불과했다. 1904년 2월 8일 일본 해군은 요동(遼東)반도 남단의 여순(旅順)항을 기습공격하는 것으로 러일전쟁의 포문을 열었다. 2월 13일 주한일본공사 하야시 곤노스케(林權助)는 외부대신 임시서리 겸 육군참장(陸軍參將) 이지용(李址鎔:대원군의 형 이최응의 손자, 합방 후 백작 수여)과 고종을 만나 한일의정서(韓日議定書) 체결을 강요했다. 러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끝나가자 고종은 미국으로 밀사를 파견했다. 이때 보낸 밀사가 이승만이었다. 1905년 8월 18일 미국 포츠머스에서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의 중재로 강화회담이 시작되었을 때?일본의 한국 지배는 이미 기정사실이었다. 포츠머스 강화회담이 열리기 직전인 1905년 7월 미국 대통령 특사인 육군장관 태프트(W. H.Taft)가 필리핀 방문 길에 일본을 찾고 밀약을 맺었기 때문이다. 미국은 필리핀을 차지하고 일본은 한국을 차지한다는 밀약이었다.


1905년 11월 17일 일본은 ‘한국이 부강해졌다는 사실을 인정할 때까지’라는 단서를 달아 ‘을사늑약’을 체결했다. 한국의 외교권은 일본인 통감(統監)에게 넘어 갔다.조약 체결 당시 외부대신이던 박제순을 비롯해 학부대신 이완용, 군부대신 이근택, 내부대신 이지용, 농상공부대신 권중현 등 을사오적(乙巳五賊)의 처형을 요구하는 상소와?시위가 거세게 일었다. 20일에는 황성신문 주필 장지연이 ‘이날을 목놓아 통곡한다(是日也放聲大哭)’는 논설을 실어 항의했다. 전국 각지에서 오적 처단과 조약 파기를 외치며 의병이 봉기했다. 자결항쟁도 뒤를 이었다. 고종은 표면적으로는 통감 이토 히로부미에게 순응하는 한편 헤이그에 밀사를 보내 외교권을 되찾으려 했다. 이상설(李相卨)·이위종(李瑋鍾)·이준(李儁) 세 명의 밀사는 1907년 6월 15일부터 10월 18일까지 열렸던 제2차 헤이그 평화회의에서 대한제국의 외교권 회복을?역설했다. 그러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통감 이토는 참정대신 이완용을 불러 “이(헤이그 밀사)는 조약 위반으로 일본은 한국에 대해 선전(宣戰)할 권리가 있다”고 협박했다. 『순종실록』 즉위년 7월 19일자는 “(순종이) 명을 받아 대리청정하고 이어서 선위(禪位)받았다”고?모호하게 기술하고 있다. 7월 24일 통감 이토, 하세가와 주차군 사령관, 하야시 외무대신은?총리대신 이완용과 이른바 제3차 한일협약을 체결했다. 제1조는 “한국 정부는 시정 개선에 관해 통감의 지도를 받는다”고 규정하고, “한국 정부는 법령의 제정 및 중요한 행정상의 처분은 미리 통감의 승인을 거친다(2조)”고 규정해 통감을 사실상의 총독으로 격상시켰다.?또 “통감이 추천하는 일본인을 한국 관리로 임명한다(5조)”고 규정했다. 을사늑약은 외부대신이 체결하고 군대 해산은 군부대신이 주도하는 형국이었다. 군대까지 강제 해산을 당함으로써 대한제국은 일본에 저항할 마지막 수단을 상실했다. 안중근·이재명 등이 잇따라 등장하는 와중에서도 이완용 내각과일진회는 합방의 공을 차지하기 위해 서로 싸웠다. 일진회는 1909년 12월 3일 대한협회와 정견협정위원회(政見協定委員會)를 열고 합방 성명서를 발표하자고 주장했다.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 1909년 12월 7일자는 일진회의 합방청원 성명에 대해 일반 인민들은 ‘일진회는 이미 일본인이지 한국인이 아니므로 어떤 악한 행동을 하더라도한국민의 행위가 아닌 것으로 인정한다’는 여론을 전하고 있다.


이완용은 8월 4일 밤 11시에 비서 이인직을 통감부 외사국장 고마쓰에게 보내 합방조건에 대해 협상했다. 고마쓰는 “병합 후 한국의원수는 일본 왕족의 대우를 받으며 언제나 그 위치를 유지하기에 충분한 세비를 지급받으시게 된다… 또한 내각의 여러 대신은 물론 다른 대관으로서 병합 실행에 기여하거나 혹은 이에 관계하지 않은 자에게까지도 비위의 행동으로 나오지 않는 자에게는 모두 공·후·백·자·남(公侯伯子男)작의 영작을 수여받고 세습재산도 받게 된다”는?방침을 전해주었다. 이인직의 보고를 들은 이완용이 드디어 합방 추진에 나섰다.?일제는 이른바 ‘남한 대토벌’로 전국을 군사적으로 강점한 후 매 국 친일파들을 이용해 병합하는 수순을 밟았다(임시한국파견대사령부, ‘남한 폭도 대토벌 실시 보고(南韓暴徒大討伐實施報告)’).


이덕일, 「事思史 근대를 말하다」, 제211호 2011년 3월 27~28일, 제212호 2011년 4월 3일, 제214호2011년 4월 17일, 제215호 2011년 4월 24일, 제216호, 2011년 5월 1일, 제222호 2011년 6월 12일, 제223호 2011년 6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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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