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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뇌, 무의식, 주인 그리고 나

1. 외뇌 인간의 뇌는 내뇌와 외뇌로 이루어져 있다. 내뇌의 무게는 성인의 경우 대략 1.5kg인데 반해 외뇌는 대부분 130g 정도로 내뇌의 1/10 정도에 불과하다. 내뇌는 우리 몸 속에 고정되어 있는 반면에 외뇌는 이동이 가능하고 휴대하기 좋다. 크기는 겨우 가로 7cm, 세로 14cm이고 두께도 7mm 정도라서 한 손에 쥐기 편하다. 외뇌를 작동 시킬 때 주로 손에 들고 하는 경우가 많아 ‘손뇌’라고도 부른다.



2. 넘어진 여자 여자는 택시를 잡기 위해 인도에서 차도로 내려섰는데 턱의 높이를 제대로 가늠하지 못했는지 그만 발을 헛디뎌 앞으로 넘어졌다. 다행히 신호에 걸려 차들이 서 있을 때라 여자는 아스팔트에 넘어지기만 했다.



김상득의 행복어사전

오른쪽 빨강 하이힐이 벗겨지고 왼손에 들었던 테이크아웃 용 종이컵에서는 아메리카노 커피가 밖으로 뛰쳐나와 잠시 1월의 차가운 아침 공기 속에 머물렀다가 강남대로 아스팔트 한 부분을 뜨겁게 데웠다.



여자는 벌떡 일어났다. 모든 것이 엉망이었다. 여자의 머리와 얼굴과 짧은 코트와 치마에는 먼지와 흙이 묻었고 검정 스타킹 무릎은 마치 오늘의 불운처럼 또렷하게 구멍이 났다. 깨진 무릎에서는 피가 살짝 배어 나와 아침 햇살에 반짝였다. 여자는 무릎에 난 상처보다 스타킹이 더 신경 쓰이는지 풀려버린 올들을 몇 번 끌어당겼다. 그리고는 치마와 코트에 묻은 흙먼지를 털고 머리를 이리저리 흔들더니 앞에 선 택시를 탔다. 그때까지 여자는 오른손에 쥔 스마트폰을 한 번도 놓지 않았다.



3. 스마트폰 집사고양이를 기르는 사람을 ‘고양이 집사’라고 부르기도 한다. 사전에 따르면 집사는 “주인 가까이 있으면서 그 집 일을 맡아보는 사람”이다. 고양이 기르는 일이 마치 까다로운 주인 모시는 집사 일과 비슷하다고 해서 그렇게 부르는 것이다. 그러니까 강남대로에서 넘어진 여자는 ‘스마트폰 집사’다.



4. 마술의 비밀 안다 형은 나 같은 동네 조무래기들을 모아놓고 화투로 마술을 보여주었다. 군용담요 위에는 화투가 아무렇게나 펼쳐져 있다. 형은 손으로 그걸 마구 섞는다. 우리 중 한 녀석에게도 마음껏 섞어보라고 한다. 그런 다음 형은 거기 놓인 화투를 한 장씩 무작위로 집어든다. 빠르게. 한 장, 세 장, 다섯 장, 열 장, 스무 장, 서른 장. 그리고 잠시 뜸을 들린 후 차례대로 한 장씩 그 화투가 무엇인지 알아맞힌다. 우리는 놀랐지만 비결은 단순했다. 형은 외우고 있던 몇 개의 전화번호 숫자대로 화투를 골랐던 것이다. 그 무렵에는 누구나 전화번호를 열 개, 스무 개씩 외우고 있었다.



5. 기억상실 페이스북에 이런 글을 올리는 사람이 있다. 제가 휴대전화기를 잃어버렸어요. 물론 새로 스마트폰을 장만하긴 했는데 저장해둔 연락처가 하나도 없답니다. 죄송하지만 저를 아시는 분, 저와 연락하셨던 분들은 제발 제게 문자메시지로 연락처를 좀 보내주세요. 휴대전화기를 잃어버린 사람은 마치 기억상실증에라도 걸린 것 같다.



6. 아무도 전화하지 않았다주말에 깜빡 잊고 사무실에 휴대전화기를 두고 퇴근했다. 그러니까 일종의 무뇌 상태로 나는 길을 걷고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온 것이다. 아파트 현관 앞에 섰을 때에야 비로소 사무실 책상 위에 놓고 온 스마트폰이 생각났다.



휴대전화기는 나보다 나를 더 많이 안다. 그것은 나의 무의식이다. 내가 감추는 나의 욕망을, 나의 과거를, 나의 기호와 취향을 그는 다 알고 있다. 그는 나다. 진짜 나는 사무실 책상 위에 있는데 여기 집에 돌아와 있는 것은 껍데기 같다. 나는 뇌 없이, 주인 없이, 진짜 나 없이 주말을 지내야 한다. 무엇보다 내게 걸려올 많은 전화들, 중요한 문자 메시지들 때문에 나는 불안하고 초조했다.



월요일 아침 출근하자마자 휴대전화기를 확인했을 때 아무도 내게 전화하지 않았다. 문자 메시지도 없었다.



7. 알람나는 스마트폰 집사다. 일할 때도 식사할 때도 책을 읽을 때도 TV를 볼 때도 스마트폰 시중을 든다. 뉴스를 보고, 인터넷을 하고, 음악을 듣고, 페이스북을 하고, ‘좋아요’를 누르고 댓글을 달고, 팟캐스트를 듣고, 인스타그램을 한다. 나는 그의 곁에서 잠들고 그의 곁에서 눈을 뜬다. 스마트폰이 진동한다. 주인님이 부른다. 나는 얼른 눈을 뜨고 그와 눈을 맞추고 그의 말씀을 기다린다. ●



 



 



김상득 ?결혼정보회사 듀오의 기획부에 근무하며, 일상의 소소한 웃음과 느낌이 있는 글을 쓰고 싶어한다.『아내를 탐하다』『슈슈』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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