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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배우 김금지의 백성희 추모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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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원로 연극배우 백성희

원로배우 백성희씨가 8일 노환으로 별세했다. 91세. 고인은 일제시대인 1943년 데뷔, 무려 73년간 무대를 지켜온 한국 현대 연극의 산증인이다.

이에 고인을 추모하는 글을 배우 김금지(74)씨가 본지에 보내왔다. 김씨는 1959년 국립극단 연구소 1기생으로 국립극단 창단멤버였던 고인의 직속 후배이자, 57년간 함께 무대에서 호흡해왔다.


이하 연극배우 김금지의 백성희 추모글

내가 백성희 선생님을 처음 뵌 것은 국립극단연구소 1기생 졸업식에서였다. 나는 대표로 선생님으로부터 수료장을 받았고, 선생님은 그 사실을 지금까지도 기억하고 계셨었다. 수료만 하면 국립극단 배우가 될 줄 알았지만, 단원은 고사하고 여전히 연구생 신세였다. 하는 일은 대사 한 마디 없는 엑스트라나 잘해야 행인 1·2·3과 같은 단역이었다.

그래서 우리 연구생끼리 '동인극장' 이라는 단체를 만들었고 그곳에서 주·조연을 하며 무대에 대한 갈증을 풀었다. 연극에 얼마나 많은 훈련과 세월이 필요하다는 것을 배웠으며, 그 때 나는 국립극단 주연되는 것을 인생의 목표로 삼았다. 자연스럽게 당시 국립극단 주연이었던 선생님이 지표일 수 밖에 없었다.

연극과 사생활을 구분했던 나는 개인적으로 선생님을 뵌 적은 없었다. 비교적 연구생들 중에선 배역을 맡을 기회가 많아 선생님 곁에서 공연을 할 수 있었고, 많은 것을 닮으려고 애썼다. 정확한 대사, 열정적인 태도, 최선을 다하지만 과하지 않은 연기 등 선생님은 교과서였다. 연습 시간은 결코 어기지 않으셨으며, 대사는 빈틈이 없었고, 꼿꼿하고 품위 있는 자세 등. 하지만 감히 선생님을 닮고 싶다는 얘기를 꺼낼 수 없었다.

공교로운 건 내가 잘했다는 평을 받은 연극엔 언제나 선생님이 계셨다는 점이. 주로 어머니와 딸로 말이다. '산불' '만선' '이민선' '수선화' 등등. 1970년 국립극단을 나와 '극단 자유'로 들어갔는데, 정작 선생님과 살갑게 된 건 그 때부터였다. 황송하게도 선생님이 내가 출연한 극단 자유 작품을 보러 오셨고, 또 다른 연극인 '겨울에서 가을까지'를 보신 후 "연기 좋다"고 말씀하셨다. 뛸 듯이 기뻤다.

가장 잊을 수 없는 순간은 1982년, 극단 황토의 '어미'란 작품을 올릴 때였다. 한·일 작가의 '어미'를 따로 올리는 모노드라마였다. 선생님은 한국의 어미를 연기하면서, 여배우들이 그토록 탐내던 일본 '어미'역으로 나를 추천하셨다. 감히 말하건대 내 평생 가장 빛나는 연기였다. 언론에서도 주목 받았고, 상복도 터졌다. 선생님은 마치 자신의 일처럼 기뻐하셨다. 공연 당시 자신의 연기보단 "금지야, 결코 목 상하면 안돼"라며, 마치 매니저처럼 하루도 빠지지 않고 나에게 따뜻한 보온병의 차를 타서 건네주셨다. 하늘 같은 선배의 정에 난 하루하루가 눈물이었고, 무대에서 몸을 던졌다.

선생님은 베푸시는 손도 넉넉했다. 43년 동안 구둣가게를 해온 나는 예쁜 구두가 나오면 선생님께 선물했었는데, 선생님은 내가 드린 것보다 훨씬 많은 것을 주셨다. 오히려 선물 드리기가 죄송스러울 정도였다. 나한테만 유독 그러신 게 아니었다. 연극인들이 자주 드나드는 대학로 카페 '장' 주인장께선 툭하면 "여기 오는 손님중 지갑 가장 많이 여는 분은 백성희 선생"이하고 하셨다.

선생님이 병원에 입원하셨다는 연락을 받고 나는 가지 않겠다고 했다. 언제나 화장 곱게 하신 모습만 보이셨는데, 창백한 모습을 나에게 보이고 싶지 않으실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아니 내가 그런 모습을 기억하고 싶지 않아서였을지도 모른다. 8일 선생님이 뜨셨다는 전화를 받고 혼자서 한참을 흐느꼈다. 그래도 내 기억 속에 선생님은 늘 그랬던 것처럼 꽃사슴 같은 소녀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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