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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질적 성공 잣대만 들이댄 금수저·흑수저 논란의 함정

루벤스의 ‘파리스의 심판’(1639)



“고등학교 때는 늘 공부 못하는 애들만 손바닥 맞았지. 공부 못하는 게 손바닥 맞을 일이면 그림 못 그리는 애들, 노래 못하는 애들도 손바닥을 맞아야 하는 거 아니야?”



[이진숙의 접속! 미술과 문학] -27- 호메로스의 『일리아드』와 루벤스의 ‘파리스의 심판’

농담처럼 주고 받은 말이었지만, 화가 박불똥 선생의 말은 새겨들을 가치가 있었다. 세상에 기준이 하나면, 일등도 하나다. 호메로스가 『일리아드』에서 묘사한 트로이 전쟁 역시 그 하나의 일등을 위한 어처구니 없는 경쟁이 원인이었다.



이 대서사시는 트로이 전쟁 10년째 되던 해의 이야기다. 승패가 갈리지 않고 오래 끌었던 이유는 단순한 인간들의 전쟁이 아니라 신들의 전쟁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인간 중에 가장 강하고, 진심으로 백성의 안위를 생각하는 트로이 왕자 헥토르는 내심 전쟁을 끝내고 싶어했다. 싸움을 원한 것은 신들이었다. 그리스 측에는 포세이돈·헤라·아테나·헤파이토스가, 트로이 측에는 아프로디테·아폴로·아르테미스가 있었다. 신중의 신 제우스는 트로이 편을 드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아킬레우스가 속한 그리스 편을 들고 있었다.



이야기꾼 호메로스는 이 기나긴 전쟁의 원인을 마지막 대목에서 슬며시 이야기한다. 전쟁의 원인을 알고 이야기를 들었다면 영웅들의 장대한 무용담들이 김빠진 헛발질처럼 보였을지도 모른다. 인간 영웅 헥토르와 신의 아들 아킬레우스의 죽음, 이후 벌어질 오딧세우스의 방황, 아가멤논 가문의 비극, 더 나아가 트로이라는 한 국가의 멸망을 가져온 이 전쟁의 시작은 너무나 엉뚱했다.



전쟁을 일으킨 말 “누가 가장 아름다운가?”17세기 바로크 화가 루벤스가 그린 ‘파리스의 심판’은 이 기막힌 전쟁의 원인을 보여준다. 이데 산의 목동으로 일하던 트로이의 둘째 왕자 파리스에게 여신들이 강림한다. 강(江)의 여신 같은 하급 여신이 아니라 당당히 올림푸스 12신에 속하는 제우스의 아내 헤라와 제우스의 딸들인 아프로디테, 아테나다. 여신 강림이 늘 축복은 아니다. 그림 속 여신들은 자신들의 아름다움 과시에 분주하다. 그림 맨 오른쪽은 공작새와 함께 한 헤라다. 그녀는 지금 아름다운 나신을 보여주기 위해서 푸른 벨벳 천을 내리고 있다. 가운데 붉은 천을 슬며시 내려놓는 안정적인 포즈의 여신은 화살통을 맨 귀여운 아들 큐피드를 대동한 비너스. 옆에 가장 수줍은 자세로 흰 천을 벗어내고 있는 긴 머리 여신은 놀랍게도 지혜와 전쟁의 여신 아테나다.



파리스는 이들 중 가장 아름다운 한 여신에게 황금 사과를 주어야 한다. 날개 달린 모자를 쓴 전령의 신이자 예술의 신 에르메스가 황금 사과를 들고 파리스의 판단을 재촉한다. 파리스가 결정을 못 하고 고민에 빠지자 이제 여신들은 경품을 내건다. 헤라는 아시아에 대한 통치권을, 아테나는 전쟁에서의 승리를, 아프로디테는 절세 미인을 내세운다. 별로 부족함이 없었던 파리스가 선택한 것은 절세 미인. 공교롭게 당시 세계 최고의 미녀는 스파르타의 왕 메넬라오스의 왕비 헬레네였다. 아내를 빼앗긴 메넬라오스가 형 아가멤논에게 호소를 하니, 아가멤논의 주도로 전 그리스 연합군이 함대를 꾸려 트로이를 침공하면서 전쟁이 시작됐다. 이런 사정이 있으니 헤라와 아테나는 트로이에 대해서 좋은 감정을 가질 수가 없고, 아프로디테는 기를 쓰고 트로이의 편을 들게 된다. 여기에 이런저런 이유로 다른 신들이 편을 나누어 가세하면서 전쟁은 트로이가 멸망할 때까지 이어졌다.



루벤스가 주목하고 있는 것은 이후에 뒤따른 고통이 아니라, 장밋빛 피부를 가진 미인들에 둘러싸여 있는 행복, 선택의 즐거움이다. 이 쾌감 때문인지, 루벤스는 ‘파리스의 심판’이라는 제목의 그림을 몇 점 더 그린다. 솔직히 말하면, 우리 눈 앞에 펼쳐지고 있는 것은 여신들이 일개 인간 남자에게 자신들의 아름다움을 판단해 달라고 면전에서 교태를 부리는, 참으로 채신머리 없는 짓을 하고 있는 장면들이다. 그런데 여신들은 어쩌다 자존심도 팽개치고 외모 경쟁에 뛰어들게 되었을까.



다양한 기준 만드는 게 모두가 일등 되는 방법문제는 사과다. 한 국가를 파괴시킨 사과 한 알에는 “가장 아름다운 이에게”라고 쓰여 있다. 이것은 서로 다른 영역을 각기 다른 신들이 관장하는 다양성과 조화의 세계 올림푸스의 민주적 체계를 깨는 악마의 한마디였다. 제우스의 아내 헤라는 가정의 평화와 명예를, 아테나는 지혜와 전쟁을, 아프로디테는 사랑을 담당했다. 그런데 지금 제우스의 머리에서 태어난 올림푸스 최고 알파 걸 아테나가, 제우스의 아내인 영광된 헤라가, 엉뚱하게 미모 경쟁에 열을 올리고 있는 것이다.



황금사과의 출처는 불화의 여신 에리스다. 아킬레우스의 부모인 바다의 여신 테티스와 인간 펠레우스의 결혼식에 초대받지 못한 불화의 여신은 심술이 나서 잔칫상에 황금 사과를 하나 던지고 간다. 가는 곳마다 분쟁을 일으키는 에리스는 노련한 심리조정자였다. 불화의 시작이 무엇인지 너무 잘 알고 있었다. 험담을 하거나 이간질을 할 필요도 없었다. ‘누가 가장 아름다운가?’ 같은 그럴 듯한 하나의 기준을 던져주면 된다. 그러면 일등이 되기 위한 경쟁과 갈등이 시작되기 마련이다.



갈등 속에 놓인 사람들끼리 주고 받는 증오의 말들은 불화의 증폭기가 되고 진영 간의 대결의식은 더욱 격렬해진다. 또 그 기준을 내면화한 사람들은 자신들이 스스로 원해서 경쟁하는 것이라고 착각한다. 치열한 경쟁에 내몰리면 정말 그 기준이 옳은 것인지에 대한 성찰을 하기도 어려워진다.



요즘 떠도는 소위 수저 계급론도 마찬가지다. 세상에는 여러 종류의 수저가 있다. 식사용, 디저트용, 조리용, 티스푼 등등. 쓰임새와 생김새, 소재가 다른 다양한 수저들은 모두 세상에 필요하고 의미가 있기 때문에 만들어졌다. 수저 계급론은 형태나 용도가 아니라 오로지 소재의 색이라는 하나의 기준으로만 수저를 구분하는 방법이다. 이 화법이 나는 많이 아프다. 그 분류법 앞면은 뼈저린 자조와 절망감이지만, 그 뒷면에는 부모가 물려주는 것이 다음 세대 삶의 절대적인 조건이 되어버린 나쁜 사회에 대한 분노가 있기 때문이다. 기성 세대들이 물질적인 성공만을 유일한 잣대로 젊은 세대들을 내몰았기 때문에 일어난 파탄의 한 단면이다.



하나의 기준으로 다양한 사회 성원을 줄 세우고 경쟁시키는 사회에서 삶은 지옥이 된다. 하나의 기준은 하나의 일등만 만들 뿐이다. 모두가 일등이 될 수 있는 좋은 방법은 다양한 기준을 만드는 것이다. 다양한 가치를 존중하는 것은 다양한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일이고, 지금 우리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는 가장 현명하고 유일한 방법이다. 모든 사람은 자기 삶에 최선을 다하고 자신의 삶에서 일등을 해야 한다. 그림 속 여신들은 저 황금 사과를 발로 차버렸어야 했다. 원주인인 불화의 여신 에리스의 품에 다시 떨어지도록. 단 사과에는 ‘가장 추악한 자에게’라고 써서 말이다. ●



 



 



이진숙 ?문학과 미술을 종횡무진 가로지르며 각 시대의 문화사 속 인간을 탐구하는 데 관심이 있다.『 시대를 훔친?미술』『러시아 미술사』『미술의 빅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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