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Load Image preLoad Image
검색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주요 기사 바로가기
다른 기사, 광고영역 바로가기
중앙일보 사이트맵 바로가기
닫기
닫기

누군가를 눈물짓게 하고 싶다

루마니아 출신 피아니스트 라두 루푸. 잘 연마된 음과 미묘한 뉘앙스로 아름다운 서정을 자아낸다.



모든 연주자는 사실 지극히 단순한 한 장면을 꿈꾸며 산다. ‘누군가 내 연주를 듣고 감동 받아서 눈물을 흘리는’ 그 장면. 나 역시 연주 후에 붉은 눈시울로 찾아 올 누군가를 늘 꿈에 그리며 산다.



[하노버에서 온 음악 편지] 음악적 감동

그렇담 거꾸로 나는 누구의 음악을 듣고 울었던가. 사실 연주회장에서 실연으로 피아노 음악을 듣다가 울어 본 일은 여지껏 딱 두 번이 있다. 그 중 한 번은 2009년 4월의 어느 날이었다.



그 날 나는 친한 친구 한 명과 하노버에서 기차를 타고 베를린까지 연주를 보러 갔다. 기차가 늦어 연주회장인 필하모니에 아슬아슬하게 도착해 전력으로 질주해서 2층 문 앞에 당도했다. 문을 닫으려던 검표원이 우리를 마지막으로 우겨넣어 주었고 홀 안에 들어서니 연주자는 이미 피아노 앞에 앉아 있었다.



 

라두 루푸의 베토벤 소나타 음반



덕분에 자리에 앉자마자 헐떡이는 숨을 고를 새도 없이 연주가 시작됐다. 이 날의 피아니스트는 라두 루푸(71)였다. 첫 곡인 베토벤의 소나타 9번 E장조 작품번호 14의 1을 지나 다음 곡은 소나타 8번 C단조 작품번호 13, ‘비창 소나타’였다.



몇 년이 지난 일이라 사실은 1악장 연주가 어땠는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리고 3악장에 대한 기억도 좀 또렷치가 않다. 대신 2악장이 시작했을 때의 그 충격은 잊을 수가 없다. 전 인류의 반 정도 되는 사람들이 한 번쯤은 들어봤을만 한 저 유명한 멜로디, 그 중 첫 세 음 정도를 쳤을 때였을까. 눈물이 핑 고였다.



그 눈물은 어쩌면 첫 음에서 이미 결정되었던 것도 같다. 그 첫 음을 듣는 순간 벌써 내가 바라보고 있는 시야는 걷혔으니까. 그러면서 아주 먼 밤하늘에 많은 별이 조각조각 아른거리는 그림이 순식간에 형상화되었는데 그 순간이 너무 비현실적이어서 그만 옆에 있던 친구의 어깨에 얼굴을 기댔다. 그리고 눈을 감았는데, 나는 누구, 여긴 어디인지 알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그러고 보니 2악장의 나머지 부분들도 어떻게 결론지어졌는지 잘 기억이 안 난다.



눈물을 흘린 연주 두 번 중 한 번이 이 때 였다면, 다른 한 번은 언제였냐고? 대학교 때의 일이었다. 나는 3학년이었고, 한 학년 위인 4학년 선배 중 한 사람이 부친상을 당했다. 날씨가 급격히 추워지던 어느 날이었다. 서로의 경조사에 빠지지 않는 우리 피아노과의 전통에 따라 단체로 버스를 타고 전북 익산의 상가집을 방문하기로 했는데, 같은 날 저녁 연주가 있어 그 차에 못 탄 나와 후배 K군은 밤 열한 시를 넘겨 수원역에서 떠나는 마지막 무궁화호에 입석으로 탔다. 새벽 세 시가 넘어 도착해 마주한 언니 얼굴은 슬프다기보다 그저 더할 수 없이 피로해 보였다.



두 주쯤이 지난 어느 날 저녁에 언니가 학교 홀 무대에 올랐다. 그 연주는 언니의 졸업 연주였다. 프로그램 중에는 브람스의 ‘6개의 피아노곡 작품번호 118’이 있었다. 두번째 곡인 간주곡이 시작하고 얼마가 흘렀는지 모르겠다. 어쩌면 A장조로 시작한 이 곡이 F샵단조로 이어지는 중간 부분에 들어섰을 때쯤이었나 보다. 눈물이 너무 많이 나 소리내지 않으면서 삼키기가 힘들다는 걸 느끼고 주위를 둘러보니 모두가 나와 같았다. 북받쳐도 울지 않고 마음 아파도 원망하지 않는 브람스가 나는 평소 영 못마땅했었다.



하지만 그 날 언니의 연주로 듣는 브람스는 그저 슬플 뿐이었다. 조르지 산도르는 저서 『온 피아노 플레잉』에서 ‘가장 이상적인 연주는 작곡가가 작곡할 당시에 느꼈을 법한 심경과 정서를 청중으로 하여금 그대로 느낄 수 있게 해주는 연주’라고 했다. 나는 그날 분명 가장 이상적인 연주를 들었음에 틀림 없었다.



하지만 그날 이후로 ‘절대 감동’에 대한 환상을 마음 한 켠으로 꿈꿔온 것도 사실이었다. 그날 언니의 연주는 분명 객관적으로도 훌륭했지만, 우리가 언니의 지난 2주를 몰랐더라도 과연 그런 눈물바다를 만들 수 있었을까. 그렇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상대적 감동을 이길 수 있는 것은 결코 없을까. 감명보다 센 것은 결국 이입이란 말인가. 나는 오래도록 답을 내릴 수가 없었다.



그러다 몇 년이 흘러 라두 루푸의 비창 소나타가 나를 강타했을 때, 실로 절대적 감동의 실체를 확인하고 ‘다 이루었다’고 기뻐했으면 그만이었을 그 때에, 내 생각은 오히려 거꾸로 돌아갔다. 절대적 감동과 상대적 감동이 과연, 굳이 구분되어야 할 상반되는 개념일까. 정말로 어느 한 쪽이 다른 한 쪽보다 모자라는 수직선상의 가치란 말인가.



단 한 번도 맛본 적 없었던 환상 속의 그 맛을 창조해 내야 할 요리사는, 꼭 손님의 ‘어렸을 적 할머니가 해주던 맛’과 싸워서 이겨야 하나 말이다. 결국 절대적 감동만이 숭고하다고 생각하는 것도 모순이요 상대적 감동을 최고라고 생각하는 것 역시 타협이 아닌가. 거꾸로 상대적 감동을 굳이 객관적으로 계산해 내려는 것도 크게 필요없는 짓이 아닌가 말이다.



결국 감동은 감동일 뿐, 느끼는 대로 받으면 그뿐인데. 어쨌든 그때 그렇게 나는 울었고 나를 울린 연주들은 내 기억 속에 고이 간직되어 있다. 나도 그렇게 남을 울릴 수 있으면 그뿐이 아닐까.



 



손열음피아니스트

선데이 배너

AD
온라인 구독신청 지면 구독신청

PHOTO & VIDEO

shpping&life

많이 본 기사

댓글 많은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