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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이 넘보지 못할 곳 떠올라”… 장제스, 쓰촨으로

장제스는 “결정적 순간이 도래했다. 희생을 결심한다면 최후의 승리는 우리의 것”이라며 전 군과 국민에게 항일전쟁 동참을 호소했다. 1937년 7월 뤼산(廬山). [사진 김명호]



일본의 중국 침략은 주도면밀했다. 1931년 9월 18일 밤, 일본군이 동북(滿洲)을 침략했다. 형식적이나마 통일정부를 수립했던 장제스(蔣介石·장개석)는 저항을 포기했다. 전국적으로 비난이 잇달았지만 꿈쩍도 안 했다.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460-

이듬해 1월, 일본이 상하이에서 사단을 일으켰다. 수도 난징(南京)과 상하이는 300㎞가 채 안됐다. 전쟁 준비가 부족했던 국민정부는 뤄양(洛陽)으로 이동했다. 국민당도 전체 회의를 소집했다. “뤄양을 행정도시로, 시안(西安)을 시징(西京)으로 개명, 제2의 수도로 한다”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난징에 머물며 상하이사변을 지휘하던 장제스는 맘이 편치 않았다. 불편한 속내를 일기에 털어놨다. “한 나라의 수도는 함부로 정하는 것이 아니다. 지구전을 펴기에 용이한 곳이라야 한다. 서북은 낙후된 지역이다. 물산이 풍부하지 못하고, 인적 자원도 부족하다. 교육 시설은 말할 것도 없다. 이런 곳에서 적과 맞설 생각을 하는 인간들과 일을 도모하자니 답답할 뿐이다.”



시안은 서북의 중심도시였다. 뤄양 일대는 2년 전, 내전에서 승리한 장제스가 지방 실력자들에게 하사한 곳이었다. 일단 뤄양으로 천도한 후 더 안전한 곳을 물색했다. 참모들에게 의견을 물었다. “정부 소재지는 안전이 최우선이다. 국방의 중심지이고 외부의 침입에 대항할 수 있는 총 후방 역할을 감당할 수 있어야 한다”



평소 군사가로 자처하던 사람들은 현실을 직시하지 못했다. 온갖 고상한 언어만 늘어 놓으며 대책은 제시하지 못했다. “이기건 지건, 무슨 일이 있어도 일본과 강화는 절대 안 된다. 우리에게 방법이 있다며 국민들은 안심시키고 일치 단결을 호소하자”는 등 결론도 비슷했다.



 

대일 항전 의연금을 내는 남루한 복장의 충칭시민. 1940년대 초로 추정.  [사진 김명호]



1933년 봄, 일본군이 만리장성 인근을 범하자 장제스는 군사회의를 소집했다. 평소 주장하던 양외필선안내(攘外必先安內·외부의 적을 물리치려면 내부를 먼저 안정시켜야 한다)를 강조하면서 대일 작전의 기본방침도 천명했다. “현재 우리가 일본에게 대처할 방법은 장기적이고, 끊임없는 저항, 한 가지 밖에 없다. 오래 끌면 끌수록 우리에게 유리하다. 3년 내지 5년을 저항할 수 있다면 국제사회가 우리를 보는 눈이 달라질 것이고, 일본의 국내 정세도 새로운 변화가 일 것이 분명하다.”



그 해 여름, 20년간 계속되던 쓰촨(四川)의 군벌 전쟁이 끝날 기미가 보였다. 장제스는 서남쪽에 눈을 돌렸다. “전쟁을 시작하려면 안전한 곳부터 정해야 한다. 적이 넘보지 못할 곳이 떠 올랐다”는 일기를 남겼다.



쓰촨의 마지막 군벌전쟁은 류샹(劉湘·유상)의 승리로 끝났다. 쓰촨을 평정한 류샹은 경내에 들어와 있던 홍군 토벌에 군사력을 집중시켰다. 20만을 동원해 홍군을 포위했다. 10개월간 섬멸 작전이 벌어졌다. 결과는 참패였다. 6만여 명이 전사하고 포로로 끌려간 숫자도 2만이 넘었다. 비행기 추락과 대포 500여 문, 총기 3만여 정의 손실은 참을만했다. 문제는 홍군의 위협을 느낀 자본의 이탈이었다. 쓰촨 경제를 좌지우지하던 기업들이 상하이로 터전을 옮겼다.



위기에 처한 류샹은 장제스에게 구원을 청했다. 장제스에게는 전에도 장총 5000정과 실탄 500만 발을 지원받은 적이 있었다. 장제스는 국민당 세력이 쓰촨을 장악할 기회라고 판단했다. 일본과 전쟁을 치르려면 쓰촨 만한 곳이 없었다. 당대 최정예였던 ‘중앙군(中央軍)’을 파견했다. 홍군은 중앙군의 상대가 못됐다. 쓰촨에서 철수했다.



쓰촨에 침투한 국민당은 쓰촨군을 정부군에 편입시킬 공작에 착수했다. 류샹에게는 쓰촨성 주석과 장제스 다음 계급인 일급상장 계급장을 달아줬다. 류상은 울며 겨자 먹기였지만 도리가 없었다.



1935년 3월 4일, 장제스는 난생처음 쓰촨 땅을 밟았다. 6개월간 머무르며 쓰촨의 후방기지화에 관한 문제를 거론했다.



“쓰촨은 중화민국 입국(立國)의 근거지였다. 모든 방면에서 조건이 완벽한 곳이다. 광대한 지역에 인구가 많고, 물산이 풍부하다. 교육과 문화의 보급도 전국에 으뜸이다. 하늘이 우리에게 내린, 천시(天時)와 지리(地利)·인문(人文)을 두루 갖춘 민족 부흥의 근거지로 손색이 없다.”



군관 훈련원과 국민당 쓰촨성 당부 확대회의에 참석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신해혁명도 발단은 쓰촨이 제공했다. 쓰촨은 혁명의 영원한 근거지가 돼야 한다.”



1937년 6월, 도쿄에 이상한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7월 칠석 날 밤에 큰 사건이 일어난다.” 7월 7일 밤 일본군과 중국군이 루거우챠오(蘆溝橋)에서 충돌했다. 옌안(延安)에 웅크리고 있던 중공이 전 민족의 항전을 촉구했다.



항전 준비를 마친 장제스도 담화를 발표했다. 중공보다 한발 늦었지만 내용은 강경했다. “결정적 순간이 도래했다. 우리는 철저한 희생을 각오해야 한다. 철저한 희생을 결심한다면 최후의 승리는 우리 것이다.”



3개월 후, 최고 국방회의에서 충칭(重慶) 천도를 통보했다. 쓰촨성 직할시였던 충칭을 행정원 직할로 승격시켰다. 충칭의 봉화가 초읽기에 들어갔다. <계속>



 



김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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