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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일의 事思史] 조선 왕을 말하다 : 요약 (26)

소현세자와 봉림대군(효종) 일행이 인질로 끌려간 지 5년 만인 인조 19년(1641) 2월 4일 심양(沈陽)의 조선관(朝鮮館)에서 태어난 아이가 현종이었다. 『현종실록』은 현종이 인조 22년(1644) ‘동국으로 돌아왔다’고 적고 있는데 부친과 소현세자가 영구 귀국하기 1년 전이었다. 조선의 종법(宗法)은 소현세자의 뒤를 석철이 이어야 했으나 봉림대군이 이어받았고 원손의 지위도 이연이 차지하게 되었다.?



조선 후기는 ‘효종→현종→숙종’의 피를 이은 ‘삼종(三宗)의 혈맥(血脈)’이 왕위 계승의 정통성을 뜻하는 핏줄이 된다. 인조에서 시작하지 않는 이유는 소현세자가 아닌 둘째 효종이 왕위를 이었음을 중시하는 의미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효종은 정통성 시비에 휘말려야 했다. 속으로는 명나라를 섬기며 북벌을 외치지만 현실로는 청나라에 사대했던 조선 사대부는 효종에 대한 태도에서도 이중적 성격을 띠었다.?



수험생과 부모가 함께 보는 NIE] -26- 국란을 겪은 임금들 ④ 현종 1

서인은 효종을 왕으로 섬기면서 강빈과 그 아들들의 신원을 요구했다. 이는 효종의 왕위 계승에 문제가 있다고 보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이런 모순이 현실에서 폭발한 사건이 제1차 예송 논쟁이었다. 기해년(1659)에 벌어졌다 하여 기해예송(己亥禮訟), 또는 상복 문제로 논쟁했다 하여 기해복제(己亥服制)라고도 하는 예송 논쟁은 효종의 국상 때 계모(繼母)인 자의대비(慈懿大妃) 조씨가 얼마 동안 상복을 입어야 하느냐를 놓고 발생한 것이었다. 예송이 민감한 정치적 현안이 된 데는 두 가지 배경이 있었다.?



첫째, 조선 후기 성리학의 흐름이었다. 양란(兩亂:임진·병자) 이후 피지배 백성의 신분제에 대한 저항이 커지자 서인 유학자들은 예학(禮學)을 강화해 신분제를 고수하려 했다.?



둘째, 효종에 대한 서인의 이중적 태도였다. 인조반정 후 서인에게 임금은 초월적 존재가 아니라 사대부 중의 제1 사대부에 불과했다. 효종이 왕통은 이었지만 가통으로는 둘째 아들에 불과하다고 나누어 생각했다. 효종에 대한 이런 이중적 태도가 예송 논쟁의 발단 원인이었다.?



고대 『주례(周禮)『나 『주자가례』 등에서 규정하는 상복(喪服)은 다섯 종류가 있었다. 참최(斬衰:3년), 재최(齋衰:1년), 대공(大功:9개월), 소공(小功:5개월), 시마(:3개월)가 그것이다. 장자(長子)의 경우는 3년, 차자(次子) 이하는 1년복이었다. 효종 승하 때 자의대비 조씨의 상복 기간이 문제가 된 것은 이 때문이다. 왕통을 이었지만 가통(家統)으로는 차자로 여긴 것이다. 소현세자의 아들이 살아 있는 상황에서 이 문제는 큰 폭발력을 지닐 수밖에 없었다.?



예조는 대비의 상복 규정에 대해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 나와 있지 않다면서 “혹자는 당연히 3년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혹자는 1년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상고할 만한 근거가 없습니다. 대신들과 의논하소서”(『현종실록』 즉위년 5월 5일)라고 주청했다. 서인 대신은 대부분 1년복이 맞다고 생각했다. 집권 서인의 의견에 따라 그렇게 결정되려 할 때 전 지평 윤휴(尹휴)가 반론을 제기했다. 그는 『의례(儀禮)』 ‘참최장(斬衰章)’의 주석에 ‘제일 장자가 죽으면 본부인(嫡妻) 소생의 제이 장자를 세워 또한 장자라 한다’고 쓰여 있다는 점을 들어 3년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왕세자(현종)는 “두 찬선(贊善)에게 모든 것을 문의하라”고 명하는데 두 찬선은 송시열과 송준길이었다.? 송준길은 송시열과 양송(兩宋)으로 불리며 서인들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했다. 그는 송시열과 함께 1년복설을 지지했다.



연양부원군(延陽府院君) 이시백(李時白)이 윤휴의 3년복설을 듣고 영의정 정태화(鄭太和)에게 서한을 보내 의견을 묻자 정태화는 송시열에게 되물었다. 송시열은 “예법에 천자부터 사대부에 이르기까지 장자가 죽고 차장자(次長子:둘째아들)를 세우면 그 복제 역시 장자와 같습니다만 그 아래 사종지설(四種之說)이 있습니다”(『현종실록』 즉위년 5월 5일)고 답했다. 3년복을 입지 않는 네 가지 예외 사항인 사종지설(四種之說)은 극도로 민감한 문제였다.?부모가 3년복을 입지 않는 네 가지 경우는 ①손자가 후사를 이은 경우 ②장자가 아닌 아들(庶子)이 후사를 이은 경우 ③장자가 병이 있어 제사를 받들지 못한 경우 ④맏손자 아닌 손자(庶孫)가 후사를 이은 경우라는 설명이었다.?

송시열의 초상 : 송시열은 효종 국상 때 표면적으로는 경국대전을 인용해 자의대비 복제를 1년으로 의정했지만 내면적으로는 둘째 아들로 대우한 것이었다.



 



정태화와 송시열은 국제(國制), 곧 『경국대전』을 근거로 1년으로 의정해 올렸다. 『경국대전』 ‘예전(禮典)’의 ‘오복(五服:다섯 가지 상복)조’에는 장남과 차남의 구별 없이 ‘기년(期年)’으로 기록된 것에 착안한 것이다. 속으로는 효종을 체이부정으로 여겼지만 겉으로는 『경국대전』에 따라 장남으로 대우한 것처럼 편법을 쓴 것이다.?그런데 장남과 차남은 구분하지 않았던 『경국대전』은 장자처(長子妻:큰며느리)는 기년(期年:1년), 중자처(衆子妻)는 대공(大功:9개월)이라고 구분해 놓아 15년 후 제2차 예송 논쟁의 불씨가 된다.?



왕조국가에서 왕위를 계승한 국왕에게 장자니 차자니 따지는 것은 무리한 일이었다. 집권 서인은 송시열·송준길의 예론에 따라 효종을 차자로 여겨 1년복으로 의정했으나 겉으로는 국제(國制:경국대전)에 따른 것처럼 위장했다. 남인 윤휴가 “무릇 제왕가의 사체는 사가(私家)와 아주 다르므로 대비가 대행대왕(효종)에 대해 참최복(3년복)을 입는 것이 옳다(『현종개수실록』 즉위년 5월 5일)”고 반발한 것처럼 이 문제는 윤휴처럼 왕가의 특수성을 인정하느냐, 송시열처럼 왕가 역시 사대부가(家)와 같다고 보느냐의 문제였다.?



자의대비의 복상이 거의 끝나가는 현종 1년(1660) 3월 16일. 사헌부 장령 허목이 상복 문제를 다시 제기하면서 예송 논쟁이 재연되었다.?그는 후한(後漢) 정현(鄭玄)이 지은 『의례주소(儀禮注疏)』의 「상복 참최장(喪服斬衰章)」을 근거로 삼았는데, 이 경우 효종은 장자가 되므로 자의대비는 3년복을 입어야 했다.? 허목의 말에 타당성이 있다고 생각한 현종이 대신들에게 다시 의논하게 하자 송준길이 나섰다.?송준길이 자식이 모두 먼저 죽는 극단적인 예를 들어 설명하는 데서 알 수 있듯이 논리가 부족했다.?허목은 재차 상소를 올려 송준길이 자신의 뜻을 곡해했다고 주장했다.?먼저 죽은 아들이 할아버지의 뒤를 이은 정체이기 때문에 3년복을 입는 것이지 장자냐 차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었다.?



윤선도가 송시열을 직접 비판하는 상소를 올려 파란을 일으켰다.?현종은 “윤선도의 심술이 바르지 못하다”며 관작을 삭탈하고 향리로 쫓아냈다. 그러나 서인들은 이에 만족하지 않고 가형(加刑)을 요구했다.?이 문제는 이제 예송 논쟁이 아니라 직접적인 권력투쟁이었다.?윤선도는 상소가 불태워지고 극변인 함경도 삼수로 유배됐다. 그래도 진사 이혜(李혜) 등 142명이 다시 윤선도를 공격하자 현종은 드디어 예송 자체를 금지시켰다.



1차 예송은 외견상 송시열과 서인들의 승리로 끝났다. 현종은 ‘만일 다시 복제를 갖고 서로 모함하는 자가 있으면 중형을 쓰겠다’며 거론 자체를 금지시켰으나 왕권은 이미 심각한 타격을 받았다. 국왕의 복제를 두고 신하들이 싸운다는 것 자체가 왕권의 추락이었다. 게다가 서인들은 효종을 차자로 본 속내를 국제로 포장한 것에 불과했다. 포장과 내용물이 다르다는 사실이 밝혀지는 것이 15년 후의 2차 예송 논쟁이었다.



 

경기도 여주군 능서면에 있는 효종 부부의 영릉(寧陵). 효종과 인선왕후 장씨의 죽음은 1, 2차 예송논쟁을 각각 촉발했다. 1차 예송논쟁에서 승리한 서인은 2차 예송논쟁으로 몰락했다.



 



기해년(현종 즉위년:1659)의 1차 예송논쟁 15년 후인 갑인년(현종 15년:1674) 2월 23일 왕대비 인선왕후 장씨가 승하하면서 이상현상이 재발할 조짐이 보였다. 기해 예송 때 송시열을 필두로 한 서인은 효종을 둘째 아들로 보아 기년복(1년복)으로 의정했으나 겉으로는 ‘장자·차자 구별 없이 기년복으로 규정되어 있는 국제(國制:경국대전)를 쓴 것’이라고 내세웠다. 그래서 현종은 국제에 따라 기년복으로 의정한 것으로 믿었다. 『경국대전』 ‘오복(五服)’조는 아들이 먼저 죽었을 때 장·차자의 구별 없이 부모는 1년복을 입게 되어 있었으나 맏며느리인 장자처(長子妻)의 경우는 1년, 기타 며느리인 중자처(衆子妻)는 대공복(大功服:9개월복)을 입는다고 기록하고 있었다. 인선왕후 장씨가 승하했을 당초 예조판서 조형(趙珩) 등은 기년복으로 의정해 올렸다.?그러나 2월 27일에는 기년복이 잘못이라며 대공복으로 바꾸겠다고 수정했다.?대공복은 왕비를 기타 며느리로 대접하는 것이었으므로 문제가 있었으나 1차 예송 때 윤선도가 삼수로 귀양 간 전례가 있었으므로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다. 그러나 대구 유생 도신징(都愼徵)이 칠순의 노구를 끌고 대궐 문 앞에 꿇어앉아 상소문을 봉입해 달라고 요청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상소문은 현종 15년(1674) 7월 6일 현종의 손에 들어갔다.



현종은 영의정 김수흥(金壽興)에게 “15년 전의 일을 다 기억은 못 하지만 고례(古禮:고대 중국의 예)가 아닌 국제를 써 1년복으로 정했다고 기억한다”면서 “오늘의 대공복 또한 국제에 따라 정한 것인가?”라고 물었다. 대답이 궁색해진 송시열의 제자 김수흥은 고례와 국제를 뒤섞어 설명했다. 그러자 현종은 “이번 국상에 고례를 쓰면 대왕대비의 복제는 무엇이 되겠는가?”라고 물었고 김수흥은 ‘대공복’이라고 대답했다. 현종은 “기해년에는 시왕의 제도(時王之制:조선의 제도)를 사용하고 지금은 고례를 사용하니 어찌 앞뒤가 서로 다른가?”라고 재차 물었다. 김수흥은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기해년에 고례로 결정했으므로 다투는 사람이 저렇게 많았습니다”라고 말했는데 이는 스스로 함정에 빠진 격이었다. 현종이 “고례대로 한다면 장자의 복은 어떠한가?”라고 묻자 김수흥은 “참최 3년복입니다”라고 답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제야 현종은 도신징의 상소를 김수흥에게 건네주면서 “기해년에 과연 차장자(둘째)로 의정한 것인가?”라고 되물었다. 그때 좌부승지 김석주가 “송시열의 수의(收議)에 ‘효종대왕은 인조대왕의 서자로 보아도 괜찮다’고 하였습니다”라고 송시열이 효종을 둘째로 봤다고 보고했다.?



호조판서 민유중이 의논할 시간을 달라고 건의하자 현종은 ‘반드시 오늘 안에 의논해 보고하라’고 재촉했다. 시간을 주면 송시열과 논의해 당론을 정한 다음 집단적으로 대처할 것을 우려한 것이었다. 영의정 김수흥, 판중추부사 김수항(金壽恒), 이조판서 홍처량(洪處亮) 등의 대신들이 긴급히 회동한 후 계사를 올렸는데 기해년에 기년복으로 정한 근거만 장황하게 써 올렸다. 현종은 승전색(承傳色:왕명을 전하는 내시)을 시켜 “대왕대비께서 기년복을 입어야 하는지 대공복을 입어야 하는지 지적하여 결말지은 곳이 없다”고 지적하며 다시 의정하라고 명했다. 현종이 여러 차례 ‘국제에 따르면 대왕대비의 복은 어떻게 되는가?’라고 물은 이유는 ‘기년복’이란 대답을 원한 것이었다.?그러나 서인에게 효종은 둘째 아들이었고, 인선왕후도 중자처에 불과했다. 그리고 이것이 당론이었으므로 김수흥은 ‘지금 예조가 대공복으로 의정해 올린 것이 맞는 것 같다’고 고수했다. 몇 차례나 기회를 주었음에도 서인이 계속 대공복을 고집하자 드디어 현종의 분노가 폭발했다.?



서인 사대부는 왕실의 특수성을 부인하고 자신들과 같은 계급으로 보는 것이었다. 현종은 “당초 국전에 따라 정해진 자의대비 복제를 기년복으로 실행하라”고 단안을 내리고 예조판서 조형을 비롯한 예조 관료들을 투옥했다.?현종은 끝까지 효종을 둘째 아들로 취급하는 서인을 갈아치우기로 결심했다.?남인 장선징을 예조판서, 권대운(權大運)을 판의금, 이하진(李夏鎭)을 사간으로 삼고 7월 26일에는 남인 허적을 영의정으로 삼았다. 그런데 정권을 남인으로 갈아치우기 시작한 직후부터 갑자기 현종은 뚜렷한 병명을 알 수 없는 병이 생겼다. 『현종실록』 8월 17일자는 ‘의관을 갖추어 입고 허적을 인견했다’고 적고 있으나 그 다음 날 세상을 떠났다. 34세, 재위 15년, 정권을 갈아치우던 와중의 의문의 죽음이었다. 각종 재해와 강한 당파에 시달렸던 유약했던 임금이 처음으로 칼을 뽑아 휘두르는 도중에 저세상으로 간 것이다. 그의 유일한 후사는 14세 숙종이었으므로 약체 왕실의 지속은 불가피한 것으로 보였다.



 



- 이덕일, 「事思史 조선 왕을 말하다」, 제117호 2009년 6월 7일, 제118호 2009년 6월 14일, 122호 2009년 7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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