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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작은 인연들로 아름다워” 아버지 피천득의 유산

[최고의 유산] 피천득 선생의 차남 피수영 교수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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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28일 피수영 교수가 아들 피윤성씨와 함께 서울 잠실에 있는 ‘금아피천득기념관’을 찾았다. 삼대(三代)가 한자리에 모인 셈이다. 두 사람 뒤로 아이처럼 환하게 웃고 있는 피천득 선생의 사진이 보인다.


‘적당히 가난하고, 적당히 부자여야 맘 편하다’
조선은행 이사직 마다하고 대학에 남은 아버지
‘정직하게 살아라’ … 교재 값 부풀렸을 땐 혼쭐

 
손자 기억 속 피천득, 누구에게나 너그러운 신사
동료 험담하자 미워하는 대신 용서하라고 조언
90세 넘어서까지 자녀들과 친구 같은 관계 유지 



아버지는 늘 아이처럼 해맑게 웃었다. 춘원 이광수가 지어줬다는 아호 ‘금아’(琴兒·거문고를 타고 노는 때 묻지 않은 아이라는 뜻)가 그렇게 잘 어울릴 수 없었다. 누군가에게 화를 내거나 싫은 소리를 하는 모습을 보기 어려웠고, 항상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화했다. 아버지는 세 자녀에게 항상 “욕심부리지 말고, 자신에게 정직하고, 다른 사람에게 관대하라”고 했다. 서울대 명예교수이자 ‘국민 수필가’로 불리는 피천득 선생(이하 피 선생)과 2011년 서울아산병원을 정년퇴직하고 현재 하나로의료재단 고문으로 일하고 있는 그의 차남 피수영 교수(이하 피 교수) 얘기다. 피 선생은 수필 ‘인연’ ‘은전 한 닢’ ‘오월’ 등에서 잔잔한 일상을 담담하고 부드러운 어조로 그려내 많은 사람에게 사랑받았다. 그는 떠났지만 그의 작품은 여전히 대중의 마음을 따뜻하게 위로한다. 그리고 그의 가르침은 아들을 거쳐 손자에게로 이어지고 있다. 


신생아의학 명의 된 수필 속 ‘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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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이 끝난 후 다시 서울에 올라와 찍은 삼 남매 사진. 왼쪽부터 수영, 세영, 서영씨.


‘(피씨가) 희성이긴 하지만 어찌하여 역사에 남은 이름이 그다지도 없었던가. 알아보니, 피씨의 직업은 대개가 의원이요. 그중에서는 시의(임금, 왕족을 진료하는 의사)도 있었다는 것이다 … 의학을 공부하는 우리 ‘아이’는 옥관자는 못 달더라도 우간다에 가서 돈을 많이 벌어 가지고 올 것이다.’

피 선생이 1965년에 발표한 수필 ‘피가지변’(皮哥之辨)의 일부다. 이 수필에 등장하는 ‘아이’가 바로 피 교수다.

서울대 의대를 다니고 있던 수필 속 22세 의대생은 이제 73세가 됐다. 지난 50여 년의 세월 동안 그는 대학을 졸업하고 군대를 마친 후 미국으로 건너가 의술을 배웠고, 다시 한국에 돌아와 신생아의학 분야의 명의가 됐다. 미국에서 의사 생활을 시작해 2011년 서울아산병원에서 정년퇴임 할 때까지 그의 손을 거친 미숙아만 1만명을 훌쩍 넘는다. 2000년에는 국내 의료진과 함께 468g의 초미숙아를 성공적으로 살려내기도 했다. 보통 임신해서 37주 미만에 태어나는 아이들을 미숙아로 분류하는데 2.5kg 이하 신생아는 저체중아, 1.5kg 이하 신생아는 극소 미숙아로 분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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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수영 교수가 항상 지갑 속에 넣어 갖고 다니는 아버지 사진.


그가 의사가 된 건 유년시절의 기억 때문이다. 그가 아플 때마다 진료해준 사람이 한국 소아과의학의 산증인이라 불리는 이국주 서울대 소아과 교수다. 이 교수는 피 선생과 경기고 동창이다. 그 인연으로 이국주 교수는 어린 시절 피 교수의 주치의가 됐고, 병원을 찾을 때마다 친절하게 진료해주는 이 교수를 보면서 그는 의사의 꿈을 키웠다. “이 교수님과의 인연으로 소아과 의사가 됐다. 원래는 외과의사가 되기를 희망했다. 서울대에서 인턴 할 때 이 교수님이 저를 부르더니 ‘피군은 소아과 의사가 돼야 한다’고 딱 잘라 말씀하시더라. 아버지 같은 분의 말씀을 거역할 수 있나. 그대로 소아과를 선택하게 됐다.”


미국 유학시절 세부 전공을 정할 땐 서울대병원장을 지낸 스승 홍창의 교수가 신생아의학에 도전해보라고 조언했다. 소아심장의학과를 전공하려다 홍 교수의 권유로 신생아의학을 선택했다. 1980년대 후반까지 국내에서는 신생아의학에 대한 연구가 거의 이뤄지지 않고 있었다. “결국 두 분과의 인연이 오늘날의 나를 있게 했다. 아버지께서 평소에 ‘인생은 작은 인연들로 아름답다’는 말씀을 자주 하셨는데, 이제 와 돌이켜보면 우리의 인생을 완성시키는 게 작은 인연들이 아닐까 싶다.”


욕심부리지 말고 정직한 삶을 살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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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천득 선생이 차남 수영씨에게 보낸 엽서.


피 선생은 부유한 집안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하지만 6세, 10세 때 각각 아버지와 어머니를 여의면서 가세가 기울기 시작했다. 친척들에게 재산을 빼앗기면서 가난한 유년시절을 보내야 했다. “보통 궁핍하게 자라면 물질적인 부분에 집착하기 마련인데, 아버지는 정반대였다. 평생 부를 축적하는 데 관심이 없었다. 마음이, 정신이 풍요로웠기에 가능했던 일이라고 생각한다.”

피 선생이 세상을 떠날 때 살았던 반포동 아파트가 그의 검소하고 소박한 삶을 잘 보여준다. 그곳에는 변변한 가구나 장식품도 없었다. 빛바랜 책이 쌓인 책장과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담은 액자가 놓여 있을 뿐이었다. 지인 중에는 피 선생의 작품만큼이나 그의 소탈한 인품을 존경하는 사람이 많았다.

“아버지는 ‘적당히 가난하고, 적당히 부자여야 마음이 편하다’는 얘기를 자주 하셨다. 말뿐 아니라 스스로 그런 삶을 행동으로 옮기셨다. 늘 소박하고 검소하게 살려고 했고, 작은 일에도 항상 감사하는 마음을 가졌다. 누가 꽃 한 송이를 선물해도 진심으로 크게 기뻐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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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천득 선생이 차남 수영씨에게 보낸 엽서. 아들의 건강과 진로를 염려하는 내용이다.


마음만 먹으면 큰돈 벌 기회는 많았다. 중국 상하이에 있는 후장대에서 영어영문학을 전공한 덕분에 일제 강점기 이후 미 군정 때 피 선생의 능력이 빛을 볼 수도 있었다. 미군 사령관의 눈에 들기도 했다. 외국에서 공부하고 온 사람은 꽤 있었는데, 피 선생처럼 공문을 쓸 수 있는 사람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당시 조선은행(현 한국은행)이 피 선생에게 관사를 주고, 이사급으로 대우해 주겠다고 제안해 오기도 했는데 피 선생은 대학에 남는 걸 선택했다. 후학을 양성하는 일이 돈을 버는 것보다 훨씬 더 가치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는 자녀들에게 항상 ‘정직하게 살라. 부정한 행동을 하면 안 된다’고 강조했다. 6·25전쟁으로 온 가족이 부산으로 피란을 떠났을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먹을 것이 부족하고 모두가 힘들던 시절, 당시 대학 입학시험 출제위원을 맡은 피 선생에게 한 학부모가 ‘내 아이를 잘 봐달라’는 의미로 쌀 한 가마니를 선물했다. 피 선생의 가족들 역시 삼시 세끼를 제대로 못 챙겨 먹는 상황이었다. “항상 배가 고팠던 터라 그 쌀이 엄청나게 크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 쌀로 밥을 해 먹는 꿈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 쌀을 받는 게 올바르지 못한 행동이라고 여긴 아버지가 받은 쌀을 돌려줬으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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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수영 교수가 아들 윤성씨에게 쓴 편지. ‘모든 일에 항상 최선을 다하면 꿈을 이룰 수 있다. 늘 정직하고 관대하라’는 메시지를 담았다. 한글을 잘 못 읽는 아들을 위해 영어로 썼다.


-정직하게 산다는 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아버지가 평소에 도산 안창호 선생을 존경했던 것도 그가 진실한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인생을 살다 보면 부득이하게 선의의 거짓말을 할 수도 있지 않으냐’는 아버지의 질문에 안창호 선생은 ‘만약 거짓말을 하지 않으면 동지에게 큰 해가 돌아갈 때만 거짓말을 해야 한다’고 답했다고 들었다. 아버지는 이 얘기를 평생 가슴에 담고 스스로도 그런 삶을 사셨다. 자녀들에게 늘 자상하고 따뜻한 아버지였지만, 정직하지 못한 행동을 했을 땐 따끔하게 혼을 내기도 했다.”

-실제로 그런 경험이 있나.

“서울대 의과대학 2학년 때 일이다. 당시에는 부모에게 교재 값을 부풀려 받은 뒤에 이를 용돈으로 쓰는 대학생이 많았는데 나도 그랬다. 예컨대 10만원 하는 원서의 가격을 30만원으로 속여 아버지에게 돈을 받은 후 20만원을 남기는 식이었다. 다른 사람에게 큰 해를 끼치는 게 아니니 잘못된 행동이라는 생각을 안 했다. 학생 책값으로는 터무니없이 비싸다고 여긴 아버지가 서점 사장에게 따져 묻는 바람에 사실이 밝혀졌다. 서점 사장이 ‘요즘 대학생들 다 그런다’며 나쁜 일이 아니라고 했지만 아버지는 노발대발하셨다. 새벽 2시에 자는 나를 깨워 혼을 내시더라. ‘왜 정직하지 못하게 사느냐. 부모가 등록금을 안 내줬느냐, 용돈을 안 줬느냐’고 하셨다. 다음 날 시험이었는데 잠도 못 자고, 공부도 못해 결국 전부 다 재시험을 치렀다. 그때 제대로 배우고, 이후에는 정직하게 살려고 노력했다.”


타인에게 늘 너그러운 마음을 가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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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천득 선생(가운데)이 1989년 여름 손자들과 함께 찍은 사진. 왼쪽부터 피수영 교수의 첫째 아들 윤범, 피서영 교수의 아들 스테판 피 재키브, 피수영 교수의 둘째 아들 윤성씨.


피 선생이 또 강조한 게 ‘다른 사람에게 관대하라’는 것이었다. 피 교수가 미국 미네소타의 한 병원에서 근무하면서 같이 일하는 동료 때문에 힘들다고 하니 피 선생은 “그를 용서하라”고 조언했다. 당시엔 의사가 진료를 담당하는 환자 수에 비례해 월급을 받던 때였는데, 동료 의사 하나가 욕심을 부리면서 혼자 환자를 독점하려고 했던 거다. “전화로 이런 일을 얘기하면서 그 사람 흉을 봤더니 ‘다른 사람 미워하지 말고 이해하라’고 하셨다. 나는 아버지와 달리 모든 사람에게 친절한 성향이 아니라 내게 이 얘기를 특히 자주 하셨는지도 모른다.”

휴가를 이용해 지난달 말 한국을 찾은 피 교수의 아들 피윤성(33)씨에게 할아버지에 대한 추억을 물었을 때 가장 먼저 나온 얘기도 ‘타인에게 항상 너그러운 마음으로 대하던 모습’이었다. “할아버지께서는 항상 겸손하고 신사적인 태도를 가지셨어요. 집 밖에 나갈 때는 영국신사처럼 양복 차림에 페도라 모자를 쓰시고, 지팡이를 챙기셨죠. 평생 술과 담배를 멀리하시고 사소한 일에 감사하며 사셨던 할아버지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윤성씨는 시카고대 로스쿨을 졸업한 후 미국에서 변호사로 활동하는 중이고, 그의 형 윤범씨는 뉴욕대에서 영화를 전공하고 현재 이탈리아 볼로냐대에서 경제법으로 박사과정을 밟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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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아버지 피천득 선생(가운데)의 미수(米壽, 88세)를 기념해 가족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의사인 피 교수를 포함해 그의 삼 남매는 제각각 다른 길을 걸어가고 있다. 형 피세영씨는 동국대 연극영화과를 졸업한 후 연극배우, 성우, 라디오 DJ로 활동하다 은퇴 후 캐나다에서 사업을 했고, 동생 피서영씨는 현재 미국 보스톤대에서 물리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서영씨의 아들 스테판 피 재키브는 바이올리니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서영씨는 피 선생의 수필에 여러 차례 등장한다.

-피 선생의 딸 서영이에 대한 사랑은 수필집을 통해 잘 알려져 있다.

“예전에는 아버지에게 딸만 있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었다. 아버지 글에 딸 얘기가 자주 등장하니 그럴 수밖에 없다. 1996년 아버지의 작품 중에 81편만 따로 추려 엮은 수필집 『인연』에서는 ‘서영이’라는 장을 따로 만들었을 정도다. 아버지가 어렸을 때 부모님을 잃고 고아나 다름없이 컸기 때문에 그런지 서영이에게서 어머니의 모습을 찾으려고 했던 것 같다. 원래부터 작고 귀엽고 아름다운 걸 선호하는 편이시기도 했다. 돌아가시기 전에는 한 인터뷰에서 ‘딸애만 편애한 걸 후회한다’고 하셨는데, 내가 옆에 있어서 그렇게 말한 게 아닐까 싶다.”

-아들인 피 교수에겐 어떻게 대했나.

“평생을 단 한 번도 ‘아버지’라고 부른 적이 없다. 2007년 97세로 돌아가실 때까지 ‘아빠’라고 불렀다. 한 번은 같이 택시를 타고 가는데 기사가 우리가 무슨 관계인지 묻더라. 아버지를 너무 편하게 대하니까 이상했던 모양이다. 모르는 사람이 보기에는 버릇없다고 느낄 정도였다. 초등학교 때도 학교에서 받은 빵을 아버지 연구실로 갖고 가서 함께 나눠 먹었던 기억이 있다. 아버지는 언제나 속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좋은 친구였고, 훌륭한 조언자였다. 미국에 있을 때도 한 달에 국제전화비가 500달러(약 60만원)도 넘게 나올 정도로 자주 통화를 했다. 당시 월급이 800달러였으니 60% 이상을 전화 비용으로 쓴 거다. 아버지는 서영이와 통화하느라 월급의 3분의 1을 썼다던데, 어쨌든 나는 아버지에게 전화했다.”

-유명한 아버지를 둔 게 부담이었던 적은 없나.

“아버지의 글 중에 ‘반사적 광영’(反射的 光榮)이라는 게 있다. 남의 광영에 힘입어 영광을 맛보는 걸 말한다. 그 혜택을 누릴 수 있어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누군가 나를 ‘우리나라 신생아의학의 대부’라고 소개하면 대부분 사람은 악수를 청하지만, ‘피천득 작가의 차남’이라는 말을 덧붙이면 사람의 눈빛이 달라진다. 90도로 깍듯하게 인사하는 사람도 있었다. 아버지가 대중들의 마음속에 크게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이 느껴질 때가 많다. 뿌듯하고 감사한 일이다.”

-이제 산수(傘壽·80세)를 바라보고 있다.

“결혼을 늦게 한 덕에 아직 손자는 없지만 할아버지가 됐어도 충분한 나이다. 하지만 여전히 아버지가 보고 싶다. 지갑 속에 넣어놓은 아버지의 사진을 꺼내보며 그리움을 달랠 때가 많다. 사진 속 아버지는 여전히 아이같이 환하게 웃으며 나를 바라보고 계신다. 나이를 먹으니 죽음에 대해 생각할 때가 가끔 있다. 죽으면 아버지 곁으로 가고 싶지만, 가능할지 모르겠다. 만약에 신이 존재하고, 천당이라는 곳이 있다면 아버지는 그곳에 계실 거라고 100% 확신한다. 하지만 내가 천당에 갈 자격을 갖췄는지에 대해서는 자신이 없다. 양심적이지 않고 부정한 인생을 살았다는 게 아니다. 남부끄럽지 않은 인생을 살려고 노력했지만 아버지에게는 여전히 부족한 아들이다. 그만큼 아버지는 타의 모범이 되기에 전혀 모자람이 없었다. 남은 인생 동안 아버지의 가르침처럼 작은 인연들을 소중히 여기며 정직하고 다른 사람에게 너그러운 삶을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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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수영

1943년 서울 출생
 61년 서울사범대부속고 졸업
 67년 서울대 의과대학 졸업
 70년 서울대 대학원 소아과학 석사학위 취득
 72년 서울대 대학원 소아과학 박사과정 수료
 68~72년 서울대 의과대학 부속병원 소아과 레지던트
 78~80년 미국 유타대 부속병원 신생아학 연구원
 80~95년 미국 둘루스클리닉 신생아과 과장
 85~95년 미국 미네소타대 의과대 임상부교수
 95~2001년 서울아산병원 신생아과 과장
2000~2011년 서울아산병원 소아과 교수
1995~2011년 울산대 의과대학 소아과 교수
2002~2003년 서울아산병원 진료부원장
2012~ 현재 의료법인 하나로의료재단 고문
인생의 롤 모델: 아버지 피천득
내 인생을 바꾼 영화: 황금연못(On Golden Pond)
아들에게 추천해주고 싶은 책: 피천득 『A skylark』, 2001년 출간된 영문판 시·수필집으로 아버지의 철학이 잘 드러나 있다.

글=전민희 기자 jeon.minhee@joongang.co.kr
사진=김경록 기자 kimkr8486@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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