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Load Image preLoad Image
검색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주요 기사 바로가기
다른 기사, 광고영역 바로가기
중앙일보 사이트맵 바로가기
닫기
닫기

‘파리, 텍사스’ (1984)

1 영화 포스터

[영화 속에서]?가족을 사랑하기에 택한 이별?자기 방식으로 희생하는 아버지



 

사막을 걷던 트래비스를 입원시킨 병원은 그의 동생에게 연락한다. 4년만에 만났지만 트래비스는 동생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동생의 집으로 온 트래비스는 동생 부부가 키우고 있는 자신의 아들 헌터를 만난다. 친 아빠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헌터는 당황하지만 곧 친밀감을 느끼고 가까워진다. 헌터의 엄마 제인이 휴스턴에 살고 있다는 것을 안 트래비스는 헌터와 함께 그녀를 찾는 여행을 떠난다.



강신주·이상용의 영화 속 철학 산책

독일의 뉴저먼 시네마를 대표하는 빔 벤더스 감독의 ‘파리, 텍사스’는 한 남자와 그의 가족에 관한 이야기다. 사막 한가운데서 4년 만에 발견된 트래비스는 동생 월터의 도움으로 자신의 아들 헌터를 만나고, 휴스턴으로 이동해 아내를 만난다. 헌터는 동생 부부가 맡아 키우고 있었고, 아내는 휴스턴의 한적한 동네에서 유리벽을 사이에 두고 남자들의 대화를 들어주는 일을 하고 있다.



영화는 트래비스의 여정을 촘촘하게 보여준다. 그러나 이 영화는 트래비스가 4년간 어떻게 보내왔는지는 끝내 다루지 않는다. 4년의 시간은 메워지지 않는 공백이다. 동생은 형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기회를 엿보지만 트래비스는 말을 처음 배우는 사람처럼 과거 일을 쉽사리 끄집어내지 못한다. 4년 전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영화 막바지에 트래비스가 읊조리는 독백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이런 사람들을 알아요. 두 사람을. 그들은 서로 사랑했어요. 여자는 무척 어렸고, 17살인가 18살이었을 거라고 생각해요. 남자는 나이가 꽤 많았죠.”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두 가지 생각이 떠오른다. 이 영화가 ‘대화’하는 영화이기보다는 독백하는 영화이며, 보는 영화가 아니라 트래비스의 이야기를 듣는 영화라는 사실을 말이다.



 



가족을 찾아가는 아버지의 로드무비초라한 행색을 하고 있으며, 아들과 아내를 버린 남자의 이야기를 유심히 듣게 되는 경우가 또 있을까. 영화는 시작부터 4년간의 공백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진다. “죽은 줄 알았어”라는 동생의 말에서도 그의 행적이 묘연했음이 드러난다.



 

2 트래비스가 자기 소유라고 주장하는 텍사스주 파리 지역의 사진.



하지만 과거 사연들이 조금씩 풀릴 때마다 ‘왜’라는 물음이 따라붙고, 결론은 쉽사리 등장하지 않는다. 그리고 관객은 트래비스가 4년간의 공백을 메우려고 어떻게 행동하는지 지켜보게 된다. 이 점이야말로 ‘파리, 텍사스’가 ‘로드무비’인 이유다. 우리는 트래비스의 여정을 따라가며 그의 마음을 조금씩 들여다보게 된다.



트래비스가 학교 앞에서 아들의 수업이 끝나기를 기다리는 대목은 인상적이다. 한 번의 실패를 경험하고 다시 아들을 바라보는 트래비스의 시선은 아버지의 열망으로 가득 차 있다. 트래비스는 동생 부부를 부모로 여기고 사는 아들의 마음을 회복하는 데 성공한다. 학교에서 집까지 두 사람이 나란히 걷는 장면은 움직임을 통해 마음을 표현하는 명장면이 되었다.



하지만 공백을 메우는 일은 완전하지 않다. ‘파리, 텍사스’가 현실의 드라마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사막을 헤매다 깨어난 트래비스는 단숨에 아버지의 자리를, 남편의 자리를 회복할 것처럼 보이지만 남자는 가장의 자리를 포기한다. 녹음된 트래비스의 목소리에 따르면, “머물 수 없는 건 과거를 치유할 수 없기 때문”이다. 가족에게 남긴 상처를 보듬기 위해서는 4년이 아니라 40년의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그는 감당할 자신이 없다. 아내를 만나 아들의 존재를 확인시켜 주고, 두 사람이 만나도록 자리를 주선한다. 그 자리에 트래비스는 빠져있다.



 



가족이 모여 사는 꿈을 꿨던 아버지혹자는 아버지의 역할을 하려는 듯 보이다가 갑작스럽게 엄마와 아이만을 휴스턴의 한 호텔에서 만나게 해 둔 채 사라지는 주인공을 비겁하다고 여길지도 모르겠다. 이는 아버지라는 일면만을 본 탓이다. 트래비스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희생하는 남자다. 그는 자신의 의처증과 불안감 때문에 가족이 망가졌음을 안다. 그것은 반복될 수 있는 일이다. 처음에 이기심으로 인해 가족을 버렸다면, 이번에는 지키기 위해 가족을 버린다. “사랑하기에 떠난다”는 역설은 여기에 해당된다.



물론, 트래비스에게도 놓치고 싶지 않은 소망은 있다. 그는 텍사스 주 ‘파리’지역에 있는 땅을 찍은 사진 한 장을 들고다니면서, 자신이 이 땅의 소유주임을 강조하고 자신의 부모가 이곳에서 사랑을 나누었다고 말한다. 그의 말을 전부 믿을 수는 없지만, 최소한 그가 그곳에서 온 가족이 모여 사는 괜찮은 삶을 꿈꾸고 있음은 짐작할 수 있다. 그것은 말과 기억을 잃어버렸던 남자가 망각하지 않으려고 했던 한 줌의 꿈이다. 영화는 그 열망을 제목으로 달았다. 공허한 사막을 가득 채우는 주인공의 마음의 풍경이 바로 ‘파리, 텍사스’다.



 



이상용영화평론가



 

[영화 밖으로]?상대방 소유하고 싶은 욕망을?다스릴 수 있다면 ‘절정의 사랑’



 



한번 들으면 쉽게 잊히지 않는 라이 쿠더의 기타 선율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파리, 텍사스’는 고행의 길에서 세상 속으로 돌아온 한 남자의 이야기를 허허롭게 다룬 영화다. 그의 이름은 트래비스. 이 남자는 지난 4년간 자의반타의반 고행의 길을 걸었다. 텍사스 사막을 몇 개나 지났는지, 시간은 얼마나 흘렀는지 알지 못했다. 죽은 줄로만 알았던 형을 만난 동생은 당혹스러웠다. 형을 간신히 차에 태워 다시 문명세계로 끌고 온 동생은 궁금하기만 했다. 형의 아내 제인은 어디로 갔을까. 무슨 연유로 아들만 덩그러니 남기고 떠났던 걸까. 선량한 동생 내외는 돌아온 형에게 평범한 일상을, 말과 미소와 온기와 옛 기억을 깨워주려 애쓴다.



힘겹게 찾은 아내, 돌아온 건 당혹감돌아온 트래비스는 아들을 만나자 이제 아내 제인을 찾고자 한다. 곧 그는 아들을 데리고 제인을 찾으러 떠난다. 그러나 우여곡절 끝에 제인을 찾은 트래비스는 당혹스러웠다. 퇴폐업소에서 일하는 아내. 유리창을 사이에 두고 남자는 여자를 볼 수 있지만 여자는 남자를 볼 수 없는 기묘한 공간에서 전화기로 대화를 나누는 곳. 트래비스는 손님을 가장해 제인과 이야기를 나눈다. 4년 만에 만난 제인에게 트래비스는 과연 무슨 말을 꺼낼까. 이어지는 그의 첫 질문. “남자를 따라 나가거나 다른 요구에 응대하나?”



그날 저녁, 트래비스는 술에 취해 자기도 모르게 아들에게 주절거린다. “네 엄마 말고 내 엄마. 내 엄마는 창녀가 아니었어. 그분은 창녀이길 원치도 그렇게 행동하지도 않았어.”



적어도 나에게는 가장 극적인 대목이 끝 간데없이 나른한 기타 선율과 함께 방금 지나갔다. 음악에 취하지 말자. 트래비스라는 캐릭터가 미심쩍었던 관객이라면 여기서 트래비스의 이야기를, 그의 표정의 미묘한 변화와 함께 읽어내야 한다.



다음날, 트래비스는 다시 제인의 일터로 찾아가 유리창을 사이에 두고 마주한다. 그리고는 자신의 이야기를 다른 남자의 이야기인 듯 들려준 뒤 아들이 홀로 기다리는 호텔과 객실번호를 가르쳐준다. 제인 또한 유리창 반대편, 보이지 않는 트래비스에게 그간의 삶을 얘기한다. 지금껏 그를 얼마나 그리워 했는지, 돌아오지 않는 그를 기다리다 마침내 잊게 되었다는 것을. 그녀는 아들을 동생집에 맡긴 이유도 알려준다. 제인은 창을 두드리며 절규한다. “당신은 안 가겠지요?”그러자 트래비스는 말한다. “나는 당신을 볼 수가 없어. 제인.”

3 트래비스의 아내이자 헌터의 엄마 제인. [사진 마티]



사랑의 출발과 완성을 착각한 남자제인을 사랑했지만, 트래비스의 사랑은 그저 병적인 사랑이었다. 왜냐면 ‘질투’로 정의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었기 때문이다.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아내가 다른 사람을 만날까봐 전전긍긍 하다못해 직장까지 그만두고 매순간을 붙어 있으려던 완전한 소유욕. 트래비스는 제인의 발목에 방울까지 매단다. 사랑해서 했던 트래비스의 모든 행동은 제인에게는 참을 수 없는 억압이자 공포였다. 4년 만에 만난 아내에게 다른 남자와 잠을 자느냐고 채근하는 남자, 정말이지 찌질한 남자의 찌질한 애정이 아닌가. 4년의 고행도, 텍사스의 태양도 유치하고 찌질한 소유욕과 독점욕을 녹이지 못했던 것이다.



사랑만큼 광범위한 말도 없을 것이다. 어마어마하게 멀고 긴 그 단어 ‘사랑’의 양끝은 심지어 모순적인 관계 속에 있다. 서로를 소유하려는 욕망도 사랑이라 말하고, 서로를 자유롭게 놓아두어야 한다는 강박도 사랑이라고 말한다. 어쩌면 사랑이란 소유의 욕망에서부터 출발해, 그것을 누르고 상대방을 자유롭게 놓아두어야 한다는 각성 즈음에서 완성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니까 소유하고는 싶지만 상대방을 위해 소유욕을 억누를 때, 그래서 마침내 두 사람이 자유롭게 만날 때, 사랑은 그 정점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트래비스가 홀로 떠난 것은 그래서 아쉽기만 하다. 그는 소유욕을 억누르는 것과 소유욕을 제거하는 것을 혼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같이 있고 싶지만 상대방을 위해 그걸 억누르는 것과, 같이 있고 싶은 마음 자체를 제거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차원이다. 다시 고행길을 떠난 트래비스의 선택이 여전히 유치하게 느껴지는 건 오직 나만의 착각일까.



 



강신주대중철학자

구독신청

AD
온라인 구독신청 지면 구독신청

PHOTO & VIDEO

shpping&life

많이 본 기사

댓글 많은 기사